진한전(辰韓傳)-5: 왜여왕 비미호(倭女王卑彌呼)이 백제 여왕:
남만주에 있던 많은 부족 국가는 모두 제사장(禮君, 壇君,巫堂)이 다스리던 시절이라 이란 뜻이다. 무당(巫堂)에는 여자가 많았다. 우거왕이 여러 부족장들과도 소통이 없이 독제를 했다. 이를 사마천은 옹안불통 (擁閼不通)이라 했다 . 같은 내용을 한서에는 “雍閼弗通”이라 했다 . 삼국유사는 “雍閼不通” 이라 하면서 사기에 실린 “真番旁眾國欲” 을 바꾸어 “真番、辰國欲”로 적은 한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안사고의 주석을 실어 옛 진국을 진한(辰謂辰韓)이라고 했다. 이를 필자의 영문본(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과 한글본에서 밝켰다. 요동만 동북연안 사람들이 발해만 서쪽 연안 육로를 통해 중원과 교류를 했었다는 증거다.
구당서 (舊唐書)에는 백제 (百濟)는 동서 두 곳에 수도가 있다. 동이의 최 강국이 백제라니, 백제 땅이 고구려 땅 보다 더 컸다고 본다.
옛적에 왜(倭)라하던 집단을 왜국과 일본(倭國日本)이라고 분리해서 실었다. 구당서에 나오는 왜국(倭國)이 고구려 보다 크다고 했던 백제 땅의 동쪽 일부가 일본이 되였다.
남만주에 있던 을 왜여왕 비미호 (卑彌呼)라고 했다.
왜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신라의 제8대 국왕 아달라 이사금 (阿達羅泥師今,
재위: 154년-184년) 20년니 되는 173년에게 특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 당시에는 신라, 백제 왜, 가야 여러 나라가 아직 발해-요동만 연안에 있었다.
통전에는 사마중달이 공손연을 정벌하여 왜왕이 사신을 보냈다는 삼국지 왜인전 설명에 이어 수문제 (隋文帝)에게 바쳤다는 기록에 :
이 말은 란 뜻이다. 한반도 북관 방언에 아바이(卑,비, 햇빛,햇님)의 아들로 활을 지닌 사람(彌; 弓,右:爾)이란 뜻이다.
한전에는 햇님의 아들이 다스리던 비미국(卑彌國)이 있었다. 왜인전에는 남자왕 비미궁(卑彌弓)이 있었다. 왜여왕 비미호(卑彌呼)를 남만주에 있던 백제의 최고 집권자 여자 무당 이라고 했던 부족이 한해(瀚海)를 타고 내려가 일본 열도의 동남부에 자리잡은 부족을 왜노(倭奴)라 했다 . 너무 커서 동남쪽 일부를 띠어 일본(日本) 이라고 했다. 그들은 동쪽에 있던 원주민 아이누를 정벌했다. 그 최고 사령관을 쇼군(將軍)이라고 불렀다.
북송시대에 작성된 태평어람과 태평광기에 대률백제를 은패한 증거가 나온다.
진서에는 숙신씨 왜인 비리등 “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慎氏倭人裨離等十國”이라 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12년)이 238년에 주부와 대가(主簿大加)를 지휘관으로 원정군을 조위 (曹魏)에보냈다 . 그해 여름에 사마담이 공손연 (公孫淵:?-2338년) 일당을 잡았다. 여자 무당 비미호(卑彌呼)는 자기 영역에 들어온 공손연의 시달림을 받었다. 양평성(襄平城)에 숨어 있던 공손연 일당이 처형 당하자 그 반가운 소식을 238년 유월(景初二年六月)에 급히 난승미(難升米)를 특사로 조위(曹魏)의 조정에 생포 된 공손연의 친족 일당(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을 증거로 전승을 알려 주었다. 조위 황실은 극진한 대우를 하면서 “나 너를 극진히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
왜에서 238년에 포로(生口)를 보냈다는 기록을 <후한서에는 확대 과장 하여 107년(安帝永初元年)에 포로 160명(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을 보냈다고 했다 .
왜왕이 보냈다는 특사가 백제 특사라고 본다. 과거에 너희들(百濟)이 공손도 일당에게 시달림을 당하여 애석하게 생각 한다는 뜻이다. 잔당이 소탕 된 후에는 더 많은 포로를 보내면서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그중 하나가 숙신씨(肅慎氏)의 대명사로 알려진 단궁(檀弓)이다. 진수는 같은 소리로 읽는 짧을 단자 단궁(短弓) 이라 했다. 진수가 새로 만든 이름으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수 없다. 단궁(短弓)을 훈역하여 짧은 활이라고 한다면 이는 유목민의 각궁(角弓)을 뜻한다. 일본열도에서는 각궁이 사용되지 않았다.
백제 초기부터 발해만 연안에 있던 대륙백제와 요동 반도 위례성(慰禮城)에서 대동강 하류 한성 (漢城)으로 수도를 옮긴 동백제 간에는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 졌다. 그 흔적이 소위 말하는 대동강 유역에 나타난 낙랑유적지(樂浪遺跡地)라고 본다.
다섯쩨: 낭랑인은 본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옛적에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남아 살던 사람들을 낭랑사람이라 부르더란 뜻은, 낭랑사람 일부가 요동반도로 건너와 살던 곳을 한국(韓國)이라 했다. 이 문구가 호동왕자가 옥저 땅에 사냥을 갔다가 만났던 다.
여섯쩨: 삼국지에서 신라의 발생지를 설명한 내용과 같은 설명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첫 구절에: 서라벌이라고 나라 이름을 정하기 전에 그곳에는 이미 (고)조선 사람들이 내려 와서 여섯 고을에 흐터저 살던 진한 6부 (辰韓六部)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라고 풀이 했다 . 거서간(居西干)이란 글자를 훈역 했다: 이란 뜻이다. 서쪽에 있는 마한(馬韓) 사람이 진한의 왕노릇을 했다는 삼국지 내용과 일치 한다. 진수는 진한 (辰韓)은 옛적 진국(辰國)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역계경이 갔다는 곳이 요동만 동북쪽 일대였다 . 이곳에 기준이 잠시 숨었다가 대동강 하구에 도착하여 그곳 원주민(韓, 辰韓, 馬韓)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고 했다 . 대동강 하류가 분명하다.
기준이 도착하여 그곳 원주민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는 최종 종착지를
한 진한 마한(韓, 辰韓, 馬韓)이라고 기록에 나타난다 . 그 사연은 뒤에 염사치 사건에서 다루기로 한다.
일곱쩨: 한전(韓傳)을 다룰 때에 나오는 오림이 낭랑본통 한국(吳林以樂浪本統韓國)
하는 문구는 진한전에 <진나라 사람들이 도망와서 한국에 적응 (避秦役來適韓國) 했다는 내용과 일치 한다. 진한전에 실려야할 사안이다.
끝, 다음에 계속.
June 5,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