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樂浪)에 얽힌 사연 (事緣)들-추가
어떤 연유로 낙랑이란 이름이 난하(滦河) 유역에서 나타났나?
상고사를 여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갖게되는 질문이다.
아랫글은 지난을 보충 설명한 글이다. 결론부터 예기하면; 옛적 요수(樂水)를 요수(樂水)로 바꾸어 낙랑이란 이름이 오늘의 난하(滦河) 유역에서 나타났다.
유가에는 명석한 사람(知者)과 어진 사람(仁者)을 비교 설명 할때 요산 요수(樂山 遼水)란 표현을 자주 써왔다. 공자님이 제자 옹(雍, 冉雍,字仲弓) 에게 답한 논어 (論語 雍也)에 실린 한 문구다 . 옥편에는“樂”를 흔히들 이라 훈독하는데, 이 문구에서는 로 읽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 사연이 중국의 영토 확장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금년 1월 하순부터 세차례에 걸처“낭랑(樂浪)에 얽힌 사연 (事緣)들”을 설명 하며, 그 어원은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갈석산을 지나 먼 낙원 땅(遼寧省)으로 들어 오는 길목에서 나타났다고 했다. 갈석산 어느 봉우리에는 낭낭정(娘娘頂)이 있다. 서왕모를 기리는 낭낭묘 (娘娘廟)를 갈석산에 새웠다. 낭랑(樂浪)을 다른 글자로 적은 이름이다. 고전에는 낙랑공주, 낙랑군, 낙랑군공하는 표현이 많이 있다. 한 때는 대한민국의 가요로 낭랑 18세가 있었다. 이러한 이름과 표현이 모두 갈석산 유역 난하(滦河) 일대에서 나왔다.
February 3, 2017 에는 “삼한 (三韓)땅 청구 (靑丘)는 발해만 서쪽 해안이다”에서
북송(北宋; 1007年-1008年)시대에 편찬된 운서에 이라 읽는다고 했다.
“渶yīng/잉; 渶:《廣韻》《集韻》𠀤於驚切,音霙。水名。出靑丘山”
한나라 군사는 한무제의 동북 전초지인 요동(遼東)에서 출발하고, 해군은 오늘의 난하(灤河, 列河) 입구 (列口)에 상륙하여 청구(靑丘)를 지나 왕검성이 있던 조양 으로 올라 왔다. 渶yīng/잉이라고 읽던 글자는 중원에서 가장 멀리 떠러져 있던 요동을 지나 한무제가 영토를 넖히고 난이후에 만든 글자다.
중원에서 제일 먼 곳에 있던 강을 요수(遼水)라 하고 그 동쪽 땅을 요동(遼東)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글자 요동(遼東)을 놓고 아직도 논쟁을 하고 있다. 문제는 첫음에 요수(遼水)라고 하던 강이 어느 시대에 나타 났나를 찾아야 한다. 필자는 요동이라는 지명의 변천 과정을 중국고전을 살펴 자세히 설명했다. 일설에 진시황의 아버지로 알려진 여불귀가 라고 했다 . 오늘의 천진 시가지를 가로 지르는 해하(海河)를 요수라 했다는 추리가 불가피 하다.
한무제가 영토를 넓힌 이후에 편찬된 설원편물(說苑辨物; 유향(劉向, 기원전 77년-기원전 6년)편에는 <제환공이 하북성 당산(唐山)일대에 있던 고죽국 (孤竹國, ?~기원전 664년)을 정벌하러 갔다 도망처 오다 건너던 강을 더 북쪽에 있던 강이라고 선전하기 위하여 관자 (管子)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강(海河 라고 본다)을 오늘의 난하(滦河)로 풀이하여 요수(遼水)라고 했다 . 같은 저자가 쓴 설원잡원(說苑 雜言)에는 유교 경전에 라고 했다 .
유향(劉向)이 요수(樂水遼水) 즉 난하(滦河)를 는 필자의 외람된 풀이는 유향이 예기한 다음과 같은 언질에 있다:
통윤천지간, 국가이성, 시지지소 이 요수야
(通潤天地之間,國家以成,是知之所以樂水也).
한무제가 는 뜻으로 풀이 된다.
북위 문성황제(北魏文成帝 ;440년–465년)는 요수(樂水, 遼水)가까이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요유산(樂游山)이라고 개명 했다. 그가 홍범(洪範)의 이윤유서(彝倫攸敘)가 무슨 뜻인가를 알기 쉽게 설명한 사람이다 .
실전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에도 없던 낙랑(樂浪)이란 이름이 유향(劉向)의 새로운 글자 풀이 후에 편찬된 한서(漢書)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남북조 시대에 북송 진종(宋 眞宗, 968년-1022년)의 명으로 편찬된 광운(廣韻) 에는 “물 맑을 영(渶, yīng/잉)자 영이란 여울이 청구산(靑丘山)에서 시작 된다고 했다 . 여울 이름이니 수경주에 실릴법도 한데, 두 글자 “渶, 靑丘” 모두 수경주에는 보이지 않는다. 영(渶, yīng/잉)자를 추운 겨울에 내린 비가 나무 가지에서 설어 구슬 같다는 뜻을 그린 글자가 영(霙)자다.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고, 꽃 봉우리 영(英), 또는 뛰어낫다는 뜻도 있다. 전욱고양씨악(顓頊髙陽氏樂)을 영(英)라 했고, 맹자가“천하의 영제(英才)를 모아 놓고 가르침”이 인생 삼락의 하나라한 뜻을 지닌 글자다 .
자전을 종합해 보면 이 낙랑이란 글자는 제곡고양씨의 후손인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다. “애가 놀라서(驚) 우는 소리의 사음자”로도 써왔다. 그와 비숫한 상황을 그린 사음자가 설문해자에 실린 “𧧛𧧛, 冄冄, rǎn ㄖㄢˇ rǎnㄖㄢˇ 란란이란 소리를 그린 글자(象聲)다 . 이 글자 풀이를 다어(多語), 즉 외국어라 알아 들을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언(多言), 즉 말이 많은, 수다스러운, 똑 같은 소리를 계속하는 이란 뜻”으로 섞갈린 풀이를 하여, 옛적에 단군조선의 수도 평양 일대에 나타난 현상을 읊은 시문 시경 판 (詩經 大雅 板)을 완전히 다른 뜻으로 설명하게 되였다 . 시고(詩考), 좌씨춘추, 그리고 청구산 에서 “물 맑을 영(渶, yīng/잉) 이라고 풀이한 광운(廣韻)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낙랑을 설명한 글자; “𧧛𧧛, 冄冄, rǎn ㄖㄢˇ rǎnㄖㄢ” 이란 글자는 “맑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를 그린 사음자다 . 한국에서 “ 나아갈 염(冄)이라 읽는 글자에 사람이란 뜻이 있는 귀 이(耳)자를 붙여 노자의 별명이 되는 귀머거리 란 뜻의 담이(耼)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떠나가는 사람이란 뜻이 있다. 후한 시대 이후로는 염(冄)자를 “떠나가다 나약하다 하는 뜻의 나갈 염(冉)로 바꾸어”사용했다 . 나약하다 떠났다는 뜻이 있는 염(冄)자가 갈석산 일대에서 남만주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나타났다 . 삼국지 한전에 염로국 (冉路國)과 변진전에 나오는 염해국 (冉奚國)이 한 예다.
한무제가 보냈던 표기장군이 흉노 정벌을 마치고 낭낭묘 (娘娘廟)가 있는 갈석산 일대 해안에 이르러 제사를드리고 돌아 왔다 (禪姑衍,臨翰海)라고 했다 . 산해경에 따르면, 이 지역에 열고사(列姑射)국이 있었다 . 옛적에 선조가 산서성 열고산(姑射山)에서 옮겨와 열수 연안에 살던 귀부인을 열고사라고 했다 . 서왕모를 뜻했다. 예문류취에는 황제의 아름다움이 고사와 같다(皇帝藐然姑射)고 했다 . 제왕세기( 帝王世紀)에는 복희씨를 뒤를 이은 지도자로 삼황의 하나라 했고,서왕모낭랑 (西王母娘娘) 또는 여와낭랑(女媧娘娘)이라고 했다 . 신비의 귀부인이 다스리던 지역이 열수가 흐르던 청구 땅을 낭랑이라 했다. 낭랑(娘娘)이란 어음을 비슷하게 기록한 이름이 낙랑(樂浪)이다.
이렇게 중국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글자들은 뜻과 음을 이리 저리 뒤섞어 기록에 남겨 무슨 뜻인가를 확인 할수 없게 만들었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다물(多勿)이란 말은 옛 땅을 되 물려라”는 뜻이라고 했다.
끝. July 29,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