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본기 (晉書 帝紀)-2:
북쪽 사관이 평가한 사마중달(司馬懿, 仲達):
흔히들 북쪽 사람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와는 다른 역사관에서 명나라 때 나관중이 고 풀이 한다. 소설에는 유비를 보좌했던 제갈량을 초 인간적인 신적 존제로 묘사 했다. 반대로 조조를 보좌 했던 사마중달 (司馬懿, 字仲達)은 뛰어난 전략가 이지만 제갈공명을 이길수 없었던 사람으로 묘사 했다. 소설 삼국지의 모체가 되는 전상삼국지평화 (全相三國志平話)에서는 제갈량을 신선(神仙)으로, 사마중달증도(司馬仲達曾道),즉 도통한 사람이라 했다 .
진수는 무제기에서 조조를 극찬 하여 해 한백지기책(該 韓白之奇策)이라, 즉 진말 한초의 명장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발한 전략을 가춘(該)사람이라 했고, 보통 사람이 아닌 희대의 영웅호걸(超世之傑)이라 했다 . 그러한 조조가 유언으로 그 아들에게 남긴 내용;“司馬懿非人臣也,必預汝家事” 이라한 문구가 있다 : 사마중달은 보통 사람이 아닌 신하다. 너꼭 그사람 의견에 따라 가사국정을 결정하라고 했다.
진수 (陳壽 233-297)는 사마의(司馬懿, 179년 ~ 251년)보다 50년 후에 태어 났다. 사마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236년 ~ 290년)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조위의 멸망과 사마염이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을 세운 과정을 목격한 사람이다. 사마의 (司馬懿)의 행적을 기록하기에는 입장이 거북해서 그랬던가, 삼국지에는 사마의전 (司馬懿傳)을 남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마씨의 추봉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사료를 근거로 기술 했다 . 본기란 최고 집권자를 기린 글이라 과장된 표현이라고 본다. 그러나 먼 훗날 당나라 때에 작성된 진서 본기 (晉書 帝紀第一)에 실린 앞에 인용한 문구는 조조의 유언이 분명하다.
사료 풀이를 옳바로 하려면 주어진 시대의 가치판단 기준을 인식해야 한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되였다 .
사서에는265년에 사마염이 서진(西晉)을 세웠다지만, 간웅 조조의 손자인 조예(曹叡; 226년 ~ 239년)가 2대 황제로 집권 13년이 되는 239년에 36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부터 정권이 붕괴되기 시작 했다.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촉의 네 제상 (四相)으로 꼽히던 장완(蔣琬, ? ~ 246년)은 조예(曹叡)가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 말기와 같은 폭정으로 요동 3군을 포악하게 다루어 (遼東三郡苦其暴虐) 조위 (曹魏) 가 곧 망하리라고 했다 . 삼한의 후예들이 봉기할 증조가 있었다는 표현이다.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 하러 나간 사이에 2대 황제 조예(曹叡; 226년 ~ 239년)가 죽고, 양아들로 드려온 신원을 알수 없는 조방(曹芳; 231년 ~ 274년)이 8살에 3대 황제(少皇帝; 제위 239년 ~ 254년)로 즉위 했다.
황실의 종친 대장군(大將軍) 조진 (曹眞, ?- 231년)의 큰 아들 조상(曹爽; ? ~ 249년)이 정권을 잡았다. 이를 지켜보던 사마의가 뛰어 들어 큰아들 사마사 (司馬師, 208년 ~ 255년)를 대리고249년에 조상과 그 일당이을 처리한 고평릉의 변(高平陵之變)이라는 학살 사건이 발생 했다. 너무도 비참한 숙청을 목격한 조위의 충신들이 반기 하여 255년에 조위의 왕권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이를 관구검 • 문흠의난 (毋丘儉文欽之乱)이라고 한다. 이후 위나라 는 완전히 사마씨 수중으로 넘어 갔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사마의 (司馬懿)의 큰아들 사마사 (司馬師)와 모구검(毋丘儉)이 죽고 남쪽 오(吳)나라로 도망 갔던 문흠 (文欽;?-258년)은 자기들이 사마의 부자에게 항거한 이유를 오조지정 (烏鳥之情) 이라고 했다. 이 풀이 또한 가관 이다 . 이사자성어는 고 본다.
허수아비로 황제의 위치를10년 동안 버티던 3대 조방(曹芳)은 265년에 옥새를 넘겨 주기 전 (魏元帝咸熙元年)에 여러 사마씨를 추존하였다 . 자화자찬이 아니라 제 3자로 부터 정당하게 직위를 받았다고 알리려는 계획에서 꾸몄던 사기극이다.
사마염(司馬炎, 236년 ~ 290년)이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을 세운 뒤에, 조위의 후손은 철저히 숙청하고 그의 부친 사마소(司馬昭)는 진 태조 문황제 (晉 太祖 文皇帝 司馬昭, 211년 ~ 265년)라 하고, 조부 사마의(司馬懿)는 선황제 (宣皇帝)로 추봉하고, 백부 무양충무후(舞陽忠武侯;255年谥) 사마사(司馬師)는 진경왕 (晉景王) 이라고 했다.
흔히들 소설 삼국지에 실린 는 문구는 진수의 삼국지에서 인용한 문구다 . 그 만치 사마중달 (司馬懿)은 제갈량과 대치한 중원과의 전투에 전념을 다했다. 그가 남만주에 관여한 기록은 에 나타난다 . 이는 조위 궁정에서 사마중달을 문밖으로 밀어 버리려는 계홱에서 였다. 하여 40,000명의 병력이 많으니 줄이자고 항의 했지만 약소한 병력으로 출전하여 원주민의 협조로 공손연을 쉽게 토벌하고, 많은 노획물과 포로10,000여명을 대려와 조위 황실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 그가 양평성에서 탈취해온 물품을 “雕玩之物動以千計”라 했다. 조완(雕玩)이란 각종 조각품으로 고조선 영역에서 쓰던 글자가 각인되여 있었다고 본다. 사마천은 조위 중진들의 모략으로 풍요로운 지원을 못받고 남만주와 한해(翰海)의 해상권을 장악 하고 있던 고조선의 후예들을 이용하여 공손연 토벌 작전에 성공 했다. 삼국지 오환전과 고구려전을 보면 사마의(司馬懿, 179년-251년) 가 살아 있던237년 가을 (景初元年秋)에 무구검이 요동을 공겪했고, 또다시 정시중(正始中; 240년-249년)에 고구려를 친입 했지만 그를 다룬 이 없다. 고구려를 눈에 가시 같이 미워하던 방현령이 만주 세력을 은패 했다는 증거다.
공손도 일당의 잔 꾀에 말려 들었던 고조선의 후예들이 풀려 났다고 생각 했드니, 또 다른 권모술수에 능통한 사마의가 나타나 옛 영토를 기만 술로 빼았으려 했다.
이러한 속샘에서 작성된 중국기록에서 대륙 백제를 찾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