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1:
고조선의 후예들이 조위의 뒤를 이은 서진(西晉, 265년- 317년)을 멸망 시키고 여러 나라를 세워 자웅을 다투던 시기를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라 하고, 그 시기를 기록한 역사서를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라고 한다.
회수(淮水) 이남으로 도망 가서 사마예(司馬睿)가 남경(南京)에 세운 사마씨의 망명 왕조가 동진이다. 사마씨의 한 자손이 낭야에 봉해저 290년에는 그가 낭야왕(琅邪王)으로 봉해 졌다. 다음 해에 수도 낙양에서 발생한 팔왕의 난 (八王-亂, 291년 ~ 306년)에 살아나 강남으로 도망 갔다. 그가 동진(東晉; 317년 ~ 420년) 의 첫 황제다. 양자강 이남에서 동진의 뒤를 이어 나타난 “송,제, 양, 진” 왕조를 남조(南朝)라 하고, 북쪽에서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을 잠시 통합한 북위(北魏; 386년~534년)가 다시 분산 되였다가 선비족 우문씨가 세운 북주(北周, 557년 ~ 581년) 까지를 북조 (北朝)라고 한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를 통일한 수나라(隋, 581년-619년)역사 (隋書)와 뒤를 이는 당 나라(唐, 618년 ~ 907년)시절에 편찬된 각종 사료 까지는 함께 종합하여 한국 상고사를 추리해 보기로 한다.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의 신라와 백제:
진서(晉書)에는 백제(百濟)란 이름이 동진의 마지막 황제 간문제(東晉 簡文帝, 재위: 371년 ~ 372년) 시절에 나타난다. 삼국지 위지(魏志)에는 백제(百濟)란 이름이 없었다.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의 여러나라 (宋,齊,梁,陳) 역사서에 모두 백제가 남조의 영역 밖에서 조공을 바쳤다고 나타 난다. 남조 역사서(南史)에 나타난 백제에 관한 문맥을 깊히 살펴 보면 회수 이북 땅에 백제가 있었다.
전진 (前秦;350년-394년)을 세운 부견 (苻堅)이요동에 있던 모용씨를 정벌 했던 해에 동진(東晉)황실은 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에 낙랑태수 (百濟王餘句為
鎮東將軍, 領樂浪太守)로 명했다 . 서쪽에서는 대나라의 왕이였던 척발규 (代王拓拔珪)가 386년에 북위의 초대 황제(北魏 道武帝, 재위 : 386년 ~ 409년)가 되였다. 같은 해에 산동성 발해만 연안에서는 백제왕 여구의 세자 여휘(餘暉)가 선친의 작위를 이어 받아 진동장군 백제왕(鎮東將軍, 百濟王)이 되였다 . 세자에게는 낙랑 태수 (樂浪太守)란 작위가 없다. 더 남쪽으로 내려 갔다고 본다. 그러나 (대륙백제의 존제를 다루지 않았던 韓日 역사서에는)이 두 대륙백제 왕의 이름이 실리지 않았다.
송서(宋書)에는 420년(武帝永初元年)에 백제왕 여영(百濟王扶餘映)에게 진동장군(鎮東大將軍)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년-491년)에게는
정동장군(征東大將軍)이란 작위를 주었다 . 삼국사기에는 백제왕 여영(餘映)이 양서에 따르면 18대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년~420년)라고 했다. 그가 아신왕(阿莘王;재위; 392년-405년)의 큰 아들로 왜국으로 갔다 .
북사(北史)에는 백제(百濟)가 471년에 북위7대 황제 효문제(北魏 孝文帝, 재위: 471년 -499년 ) 에게 고구려 정벌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 북사 제본기 (齊本紀)에는 579년(武平元年)에 백제왕 창(百濟王餘昌, 威德王; 제위: 554년-598년) 이 시중 표기대장군 대방군공(帶方郡公)을 북제(北齊,550년-577년)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 문장 끝에 는 모호한 문구를 남겼다 . 한전(漢典)에는 이 문구를 으로 풀이 했다. 선비족 우문씨 (宇文氏)가 북주(北周, 557년 ~ 581년) 577년에 북제를 통합 했다. 북사 주본기 (周本紀)에 백제가 두 차례에 걸처 조공 했다는 기록이 있다 . 남북조를 통일한 수 나라 본기 (隋本紀)에는 고구려와 사신을 보냈다. 수 나라는 백제 왕창 (百濟王扶餘昌)에게 대방군공(帶方郡公) 고구려왕 양(高麗王高陽)에게는 요동군공(遼東郡公) 의란 작위를 주었다 . 수나라가 중원을 통이한 시기에 고구려는 고조선 땅의 서쪽 영토를 점유 하여 돌궐(突厥)과 접하는 최고 전성기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7(高句麗本紀第七)에 실린 왕들의 통치 시기다. 북사에 실린 고구려왕 고양(高麗王高陽)을 수나라와 당나라는 탕 (諱陽成『隋唐書』作湯)이라고 했다. 그가 고구려의25대 평강상호왕
(平崗上好王) 이라고도 부르는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년-590년) 이다. 앞서 필자는 평원왕이 고 논증 했다.
이렇게 고구려가 <빼앗겼던 옛 고조선의 영토를 되 찾으려고 서쪽으로 진출 하는 동안 한반도 동남쪽 어귀에 수도를 정한 신라는 고구려의 뒷등을 공략 하여 동쪽 해안을 따라 함경도에 이르고 한강을 너머 서울근교 북한산에 경계비를 세웠다. 내우 외환으로 고구려는 요서 장안성에서 남만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
중국사람들이 고구려 전성기의 영역을 삭감 하고 북제라고 한 대륙백제의 영역을 지도로 Xikipedia에 올렸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C%97%E9%BD%90
글자 그대로를 사실로 인정하고 번역한 입본이나 영미 문화권에서도 <중국사람들이 만든 지도와 가똑 같이 고구려의 서쪽 영역을 삭감 했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2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