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백제-9. 총 결론:
대륙백제가 중원의 옥새를 잡다:
간략하게 삼한의 후예들이 펴처 나났던 중원을 살펴 보았다. 한해의 동북쪽과 동남 쪽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륙에 백제가 중원의 옥새를 잡았던 시절이 삼한의 후예들이 가장 넓은 지역을 관장 했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이 혼미 하다.
그 본보기로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과 임유관을 살펴 본다.
북제 (北齊) 어린 황제의 옥새를 빼았은 우문씨가 세운 북주(北周; 557년–581년)는 26년 만에 멸망 했다. 북위의 재상 고환의 아들 고양이 동위를 건국하자 북위에서 도망 갔던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은 557년에 북주를 건국했다. 우문씨는 정권 싸움 으로 581년에 외척(外戚)양견楊堅, 541년– 604년)에게 옥새를 넘겨주었다. 옥새를 얻은 양견은 우문씨를 멸족 시키고 회수 남쪽에 있던 진나라를 흡수하여 중원을 통일 했다. 양견은 자기 부인을 범한 두쩨 아들 양광(楊廣,569년–618년)이 보낸 자객에 피살 당하고 제2대 황제가 된 수양제는 전대미문의 대 병력으로 고구려를 친입하다 실패 하여 300년 만에 중원을 통일 했던 수 나라(隋, 581년– 619년)를 잃었다. 양견은 북제(北齊, 550년 ~ 577년)의 서쪽에서 서위 땅을 물러 받고 나타난 후량(後梁, 555년 ~ 587년)을 정벌하고 아들 양광을 시켜 중국의 동남쪽에 있던 진(陳, 557년 ~ 589년)을 정벌하여 남북조를 통합 했다. 이 시대에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재위 : 545년 ~ 559년)은 552년에 요서에 장안성 (長安城)을 쌓기 시작하여586년에 그의 아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년 ~ 590년) 이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 했다[1]. 이렇게 번창했던 고구려의 전성기는 철저하게 숨겨저 있어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이 뚜렷하게 밝혀 지지 않았고 장안성과 임유관의 위치마저 밝혀 지지 않았다[2].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추리 할수 밖에 없게 되였다.
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臨渝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부터 국토를 확장하여 장수왕의 손자에 이르러 대흥안령을 너머 영양왕 (嬰陽王) 때에는 산서성에 까지 이르렀다. 임유관 전쟁이후 부터는 국내 불만이 생겼고, 만주에서 밀려난 신라와 백제가 동남쪽 변경을 공략하여 장안성 (長安城) 에 7-8년 있다가 평양성(平壤城)으로 돌아 왔다.
삼국사기에; <당서에는 평양성이 곧 장안이다> 했고, 고기에는 평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古記云; 自平壤移長安) 하였스니, 두성이 같은 곳인지 아닌지, 얼마나 멀리 떠러저 있었는지 알수가 없다>고 했다[3].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년-590년)은 586년에 장안성으로 천도했다. 천도 한지 4년 뒤인590년에 수문제가 진나라를 정복 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나라의 북진 정책에 대비하다 사망 했다[4]. 수 문제는 고구려와 겨루던 돌궐을 동맹자로 삼으려고 아들 양견을 보냈다[5]. 돌궐에 갔던 양견이 돌궐 가한과 같이 있던 고구려 사신을 알아 보았다. 동행 했던 배구(裵矩)가 아뢰기를<고구려는 고죽국(孤竹國)이 옛부터 자기들 땅이라고 계속 친입해 옵니다>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598년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臨渝關)을 선제 공격했다[6]. 임유관(臨渝關)의 뜻을 보면, 유수(渝水)계곡 통로를 막으려고 만든 요새 였다. 설문해자(.說文)와 북주(北周; 557년-581년) 관리의 신도비 (神道碑)에는 유관(渝關)이 산서성(在遼西臨渝)에 있었다고 했다[7].
고구려의 전성시대 영토를 추리해 볼수 있는 자료가 영양왕 (嬰陽王)의 이름과 좌우명에 있다. 호를 대원(大元)이라하고 제세안민 (濟世安民)을 좌우명으로 치세를 했다.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대흥왕 (大興王)이다[8].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고 대군을 집한 곳이 북경서남쪽 탁군(大軍集於涿郡) 이고, 출전 앞서 발표한 연설문에; <글안의 무리를 모아 해수를 도륙하고,해와 말갈족을 시켜 요서를 침략 했다. 갈석산일대 (崇聚勃碣之間. 侵軼遼西), 청구등지를 고구려가 잠식했다>는 문구가 수서와 삼국사기에 있다[9].
수 양제에 반발 하여 당나라를 세우려던 세력과 겨루다 실패한 이밀(李密; 582년– 619년)은 요동양평사람(遼東襄平人)으로 하씨(何氏, 해)였다. 그의 선조는 후연 (後燕, 384년 ~ 407년) 을 세운 모용수(慕容垂) 밑에서 위국공(魏國公)의 작위를 받아 이밀이그 작위를 이어 받았다[10].
이러한 사료를 종합해 보면, 임유관(臨渝關)은 유수가 흐르는 요서에 있었고, 고구려가 갈석산 남쪽 까지 점유 했다. 장안성은 대흥안령 동쪽에 있던 옛적 현토군 고구려현의 수도 였던 평양(平陽)에 쌓았다고 본다.
隋滅陳形勢圖
한해 동남 쪽에 새로 나타난 일본(日本)의 역사:
한해(瀚海)교역의 중심지에 나타난 여인숙(旅人宿):
일지국(一支國)의 허가 (許家)는 여인숙:
진수가 일대국(一大國)이라고 한 일지국(一支國)은 대마도(對海國; 對馬島)보다 적지만 가호는3배가 되는 3,000허가 있다(有三千許家)고 했다. 허가 (許家) 가 무슨 뜻인가를 찾아 보니 허가를 받은 여인숙(旅人宿)이였다. 그곳이 한해의 동쪽 합도 벡제와 열도 백제를 오가는 해상통로의 구심점이 되는 섬나라였다.
일지국(一支國)에서 뱃길로 (방향은 거론 않고) 1,000리를 가면(又渡一海) 말로국에 도착(末盧國)한다. 말로국(末盧國)은 노국(盧國)의 끝이란 뜻이다. 로국(盧國)은 흉노의 나라(奴國)란 뜻이다. 변진전과 왜인전에 노국(奴國)이란 이름이 여러 곳에 실렸다[11]. 말로국(末盧國)에서 육로를 따라 동남 방향으로 500리를 가면 이도국 (伊都國)에 이른다. 천여호로 대를 이어가는 왕이 있지만(世有王) 모두 여왕국(皆統屬女王國)에 속한다. 그 곳에 군에서 사절단 (郡使)이 와서 상주 한다. 수장을 이지(爾支) 라 한다.
왜인전의 군사(郡使)는 누구였나?
대마도 (對馬島)로부터 대한해협을 건너 여왕국 수도가 있는 구주 남단 아마대국 까지는 4,000리다. 대마도에서 한반도 남해안과 서쪽 해안을 지나 북쪽으로 8,000리를 가면 군사(郡使)가 온 곳이 된다.
갔던 길을 되돌아 계산해서 찾은 곳이 구야한국 북안 (北岸狗邪韓國)이다.
이도국 (伊都國)에 상주 하던 군사(郡使)는 대동강 하구에 있던 반도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에서 보냈던 백제 관리였다.
어찌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漢城)에서 온 사람을 군사(郡使)라고 불렀느냐는 내력은 삼국지, 후한서, 삼국사기를 종합하여 풀이면 답이 나온다. 발해만 서안에 있던 대방을 평양으로 뒤바꾸어, 공손도가 발해만 천진 일대에 설치 했던 대방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했다. 요하동쪽에 있던 하왜왕(假倭王)이 조위로 부터 후작 (侯爵)을 받았다 하여, 대륙백제에서 나온 관리를 대방사(郡使)라 해다.
한성(漢城)에서 파견 나온 군사(郡使)가 상주하던 이도국 (伊都國)이 열도 백제의 첫 수도 였다. 이로부터 점차적으로 사국도를 지나 본주(本州,혼슈)로 진출 했다.
사학계에서는 선사시대 마지막을 고분시대(古墳時代; 250년- 538년)라고 한다.
왜여왕 비미호(卑彌呼)와 관련되는 년대기에는경초(景初)와 정시(正始)가 있다.
경초(景初; 237년-239년)란 연호는 조위 2대황제조예(魏明帝曹叡)의 세번쩨 연호다. 景初3年1月에 명제(明帝)가 죽고 혈통이 분명치 않은 제왕 조방 (齊王曹芳)이 즉위 했다. 정시 (正始:240년-249년) 10년에 가평원년(嘉平元年) 으로 바꾸었다. 조위 황실은 왜왕을 자기들과 절친한 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주고, 남승미와 우리에게는 솔선(率善)이란 형용사가 붙은 관직을 주었다. 사신의 행로를 섭원(涉遠)이라고 기록 했다>. 바다를 건너 왔다는 기록이 없다.
비미호(卑彌呼)는 대륙에 살았다. 왜여왕 비미호(卑彌呼)이후 부터 고분 시대, 그전은 철기시대라 하면서도 야요이 시대(彌生時代) 라고 한다. 야요이는 한반도를 통하여 건너온 철기를 썼다. 백제의 8대 고이왕 (古爾王,재위: 234년 ~ 286년) 시절이다. 고이왕의 가계는논란이 많다. 일본의고분시대 이전 사람이지만, 일본 사서에는 구이(久爾) 또는 구이(仇爾), 고모(古慕) 등의 이름 나타나 있다. 이는 중국 남조의 역사서에<479년(建元元年)에는 백제와 고구려을 제외한 6국을 맏아보는 큰 벼슬 “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을 받았다>고 풀이 한다. 이는
대륙백제를 뜻하는 높다는 뜻의 사음자(倭, wēi wō wǒ / 위, 우 잘못 풀이 하여 일본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이란 이름이 없었다. 다른 사서에는 이 칭호가 백제 왕에게 주었던 무호(武號)로 나타난다. 같은 행사에 가라국왕 하지가 참석하여 보국장군 가라국왕의 칭호를 받았다[12].
언제부터 왜인국(倭人國)이 일본(日本)으로 바뀌었나?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재위: 661년– 681년 ) 10년(679년)에 왜를 일본으로 고첬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문헌에는 구당서(舊唐書)와 통전(通典)에 처음으로 일본(日本)이 왜국(倭國)의 별종으로 취급하여 두 나라로 나타난다[13].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 시대의 기록인 양서(梁書)에도 일본이란 이름이 없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혼란기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년- 619년)나라 역사 수서 (隋書)에도 일본(日本)이란 글자가 없고, 왜국(倭國)에 관해 앞뒤가 틀인 설명을 했다[14]. 그 내용에 일본이란 뜻을 비춘 문구가 보인다.
수나라 첫 황제 20 년인 (開皇二十年) 서기 600년에 왜왕 성은 아매(阿每)
이름이 다리사북고 (多利思北孤), 호는 아배계미(阿輩雞彌)라는 자가 사신을 보내 그들의 풍속을 설명 했다[15]. 아배계미란 뜻은 < 옛적에 그지역에서 부르던, 글안 태조를 만주에서는 아보기 (阿保機)로 불렀던, 발음이 약간 다르지만 같은 뜻으로 아버지의 옛적 말>이다.
< Abegaemi (아배계미;阿輩雞彌) is the same as Abogi (아보기;阿保機) referring father by ancient Tungus people.>
<왜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형이요 해가 동생이다>는 문구는 천손의 후예라고 믿는 우왕의 후손인 부여(扶餘 天孫)가 형이요 일본이 동생이라고 일왕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호십육국 말기에 수문제가 통일하는 싯점에 왜인국(倭人國) 으로 알려 졌던 대륙 백제에서 떠러져 나가 일본이란 이름을 쓰면서 옛 대륙백제가 다스리던 한반도 남쪽 해안 국가 (열도부여)를 형이라고 모셨다. 이 시절에 수나라 전함이 제주도에 표류 하여 백제가 배를 수나라에 돌려 보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도<일본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해뜨는 쪽 변두리에 있다하여 일본이라 했다. 일설에는 왜국이란 이름이 나빠서 일본으로 바꾸었다.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여서 왜국 땅에 속했(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었다[16].>
로마제국이 분산되여 여러 나라가 나타나듯, 중원이 동서남북으로 가라져 서로 싸우던 남북조시대에 고조ㅓㄴ의 후예가 동북아시아게 방대한 연맹체를 이루었다. 내륙에서는 고구려 해양권을 잡은 나라가 대 백제(大百濟, Baekjae The Great)였다. 이를 분포도와 특성에 따라; 대륙백제, 반도 백제, 열도 백제라 이름함이 합당 하다.
열도 백제는 일본열도의 동북으로 퍼저나가 커다란 웃사람(지도자)란 뜻 을 한 때는 일본을 대화국(大和國)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 대왜를 보내서 감시했다(使大倭監)란 문구에서 나타난 이름이다.
통전에 그 뜻이 뚜렸하게 실려 있다 . 세금 증수편에; 대왜(大倭)이 남쪽에 있던 무당 제사장 왜여왕를 제쳐 놓고 실권을 장악 했다는 뜻이다. 대륙백제가 풍괴 죄면서 대왜(大倭)는 제정일치의 권한을 가졌던 단군왕검(壇君王儉)과 같은 사람으로 구주서쪽에서 최초로 나타 났던 집권자다. 한성에서 이도국(伊都國)에 보냈던 군사(郡使)가 대화국(大和國)의 시조 (始祖)다. 대화국(大和國)의 지도층은 그 선조가 옛 백제의 수도였던 오늘의 평양(平壤)에서 건너간 흉노족으로 환웅천왕 (桓雄天王)의 후손이라고 인식하던 사람들이다.
결론:
필자는 새로운 시각에서 동양 상고사를 두루 살펴, 홍수로 시달리던 황하문명의 발생지를 개발한 사람들이 단군조선을 세우고, 동이의 추장으로 알려진 백익이 단군왕검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내시 했다. 그 밖에도 많은 새로운 학설을 제시 했다. 끝으로 중원의 옥새를 대륙백제가 소유했던 시대가 삼한의 후예들이 가장 넓은 지역을 관장 했다. 방대한 지역의 통치권을 지니고 있던 체제가 무너지고 열도 백제에서 신흥국 일본이 탄생 했다.
끝.
[1].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七:陽原王 八年,築長安城. 平原王二十八年,移都長安城
[2].長壽王: 十五年,移都平壤. 六十三年,春二月,遣使入魏朝貢。秋八月,遣使入魏朝貢。
九月,王帥兵三萬,侵百濟,陷王所都漢城,殺其王扶餘慶,虜男女八千而歸
[3]. 三國史記 『唐書』云:「平壤城亦謂長安。」而古記云:「自平壤移長安。」則二城同異遠近,則不可知矣。
[4].三十二年,王聞陳亡,大懼,理治兵積●,為拒守之策。隋高祖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虛置,終須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心易行,率由憲章,卽是朕之良臣,何勞別遣才彦?王謂遼水之廣,何如長江;高句麗之人,多少陳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示,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王在位三十二年,冬十月,薨。號曰平原王。是開皇十年。『隋書』及『通鑑』書:「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誤也.
[5].三十二年,王聞陳亡,大懼,理治兵積●,為拒守之策。隋高祖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虛置,終須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心易行,率由憲章,卽是朕之良臣,何勞別遣才彦?王謂遼水之廣,何如長江;高句麗之人,多少陳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示,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王在位三十二年,冬十月,薨。號曰平原王。是開皇十年。『隋書』及『通鑑』書:「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誤也.
[6]. 三國史記 嬰陽王九年,王率靺鞨之衆萬餘,侵遼西,營州摠管韋●擊退之。隋文帝聞而大怒,命漢王諒、王世績王世積●
為元帥,將水陸三十萬來伐。 帝下詔黜王官爵。漢王諒軍出臨●關,値水●,●轉不繼,軍中乏食,復遇疾疫。
[7].渝:變汙也。从水俞聲。一曰渝水,在遼西臨俞,東出塞.說文》渝水,在遼西臨渝,東出塞。又水名。水經注:宕渠郡,蓋古賨國,今賨城縣有渝水。〈書〉借指北方邊塞。有詔進公都督瓜州諸軍事、瓜州刺史。是以名馳梓嶺,聲振渝關(北周‧庾信〈周柱國大將軍大都督同州刺史爾綿永神道碑
[8].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 嬰陽王一云平陽。諱元一云大元。平原王長子也。風神俊爽,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立為太子。三十二年,王薨,太子卽位。隋文帝遣使拜王,為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賜衣一襲
[9].隋書 卷四帝紀第四 煬帝下: 八年春正月辛巳,大軍集於涿郡. 崇聚勃碣之間. 侵軼遼西。又青丘之表. 。曾不懷恩,翻為長惡,乃兼契丹之黨,虔劉海戍,習靺鞨之服,侵軼遼西。又青丘之表,咸修職貢,碧海之濱,同稟正朔,遂復奪攘琛」 三國史記: 煬帝下詔,討高句麗。夏四月,車蓋至●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郡. 帝下詔曰:”高句麗小醜,迷昏不恭,崇聚勃渤、碣之間,●食遼、濊之境
[10].舊唐書 :李密,字玄邃,本遼東襄平人。魏司徒弼曾孫,後周賜弼姓徒何氏。祖曜,周太保、魏國公 .北史:
李弼曾孙密宇文贵子忻恺侯莫陈崇子颖崇兄顺王雄子谦李弼,字景和,陇西成纪人。六世祖振,慕容垂黄门郎.
周書 :李弼字景和,遼東襄平人也。六世祖根,慕容垂黃門侍郎。祖貴醜,平州刺史。父永,太中大夫,贈涼州刺史
[11].其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
明年,帝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渡百濟,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
[12].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倭國,。建元元年,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13].文武王 十年 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為名. 舊唐書: 高麗百濟新羅倭國日本.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故中國疑焉。通典:倭國一名日本,在中國直東;扶桑國復在倭國之東,約去中國三萬里,蓋近於日出處
[14].舊唐書 : 高麗百濟新羅倭國日本.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
[15].隋書: 魏明帝景初二年,司馬宣王之平公孫氏也,倭女王始遣大夫詣京都貢獻。魏以為親魏倭王,假金印紫綬。倭國,
在百濟、新羅東南,水陸三千里,於大海之中依山島而居。魏時譯通中國。三十餘國,皆自稱王.漢光武時,
遣使入朝,自稱大夫。安帝時,又遣使朝貢,謂之倭奴國。桓、靈之間,其國大亂,遞相攻伐,歷年無主。有女子名卑彌呼,能以鬼道惑眾,於是.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
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雲委我弟。
[16].舊唐書 : 高麗百濟新羅倭國日本.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