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서주 무왕의 목야전에 동참했던 백어(白魚)를 좀벌래(蟫; 蠹鱼, 衣鱼)라고 논증 했다[1]. 그가 깃발을 들고 선두 지휘 했던 단공(旜公, 壇公)이다. 단공(旜公, 壇公)이란 글자는 사서에 없다. 사기에는 그를 필공(畢公)이라 했다[2].
필(畢; bì / *bit)은 햇빛을 뜻한 글자다. 필공고(畢公髙)의 후손이 산서성(晉)에 살았다. 그 후손이 해,고, 위(解, 髙,魏,衛)씨다. 무왕이 출전에 앞서 친구 필공의 정원에서 필승을 기원하는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단공이 고조선의 수도 평양에서 무왕과 같이 가까이 지네던 시절을 읇은 시문이 시경 시간(詩經 小雅 祈父之什 斯干)이다.
같은 소아편에 실린 무양(無羊)은 단공이 지휘 하던 군사가 승전하여 돌아 오는 장면을 읊은 시문이다. 무(無)자는 목동을 뜻한 사음자다.
죽서기년을 보면 성왕이 시간의 수도를 빼았았다.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을 보면 주족은 해지연안 평양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못하고 밀려 강을 건너 양산을 지나 기산 밑에 정착 했다[3]. 평양은 누구나 원하는 지역이라 연 (宴,燕)이란 글자로 기록 하고 살기 좋응 큰 마을 평양을 안읍(安邑) 했다. 주족(周, Zhou clan)의 목적을 달성 했다하여 성강지치(成康之治) (기원전1017년-기원전961년)라 했다.
뚜짓을 하(何)라고 읽는 글자는 해를 숭상하던 부족(解, 奚)을 비하한 글자다.
해인사( 何人斯)는 친구 였던 두사람이 의리가 상해 떠나간 사정을 읊었다.
시경에는 “斯干, 何人斯, 螽斯” 하는 편명이 있고, <斯; 이 사, 천할 시>라고 읽는 글자가 많이 나타난다. 이 글자(斯) 풀이가 시대에 따라 점차 여러 뜻과 글자로 바뀌었다. 글자 “干을 于”으로 바꾸어 <斯干 또는 斯于라고 실렸다. 斯于를 사음대자 하여 斯於 으로도> 적었다. 시간(斯干)은 원주민이 세운 부족국가 부여 (扶餘, 蜉蝣) 또는 朝鮮의 지도자란 뜻이 있다[4]. 상주시대(商周)에는 귀족으로,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에는 평민에서 천민으로 풀이 했다.
시경 소아 작은 하늘이 읊은 열편의 시문(詩經 小雅 小旻之什)에 하인사 何人斯란 편명이 있고, 교묘하게 꾸며 대는 말이란 뜻의 교언(巧言)이란 시문에도 나오는 글자다. 모시정의는 하인사 何人斯란 편명을 소공이 폭악한 군주를 꾸짖은 시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공과 폭공은 서주 수도 가까이 있던 도시국가 (畿內國)라고 했다[5]. 시간(斯干) 등 “斯”자는 서주가 수도를 정했던 옛 단군조선의 경기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의미 했다. 부유 (蜉蝣)가 실린 조풍의 조(曹)라는 다라는 양산 일대에 있었다.
시설에는 국풍 주남 종사(周南 螽斯)편을 서주 왕실에 미남이 많다는 시문이라 했고, 모시정의에는 그들이 후비의 자손으로 종사를 잘못 모신다. 아어에는 종(蜤) 자는 시(蜤sī)와 같은 음이고 했다. 이를 중구 사전에는사종( 斯螽)과 같은 황충의 새끼 벌래라 했다[6].
하상주 초기 까지는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이 서주세력이 확립 되면서 몰락해 가는 과정이,<斯 이 사, 천할 시>라고 읽는 글자 속에 있다.
해지연안에 살던 원주민이 점차로 벌래 같은 존제로 묘사 되었다.
양자 방언에는; 떠났다는 뜻이 있는 사(斯)자를 조선 열수지간, 즉 천진-당산 일대에서는 움킬 국(掬) 이라 했다.
“斯、掬,離也。齊陳曰斯,燕之外郊朝鮮洌水之間曰掬”
떠난다는 사람을 두손으로 붙잡아 못가게 한다는 뜻인가? 두손 벌려 반가이 맏아 드린다는 뜻인가?
모시서에는 <斯,白也,> 당시 속어로 사백의 사자는 조선의 약자로 선(鮮)이라 했다. 산동성(齊魯之閒)에서 근사(近斯)란 음과 같다[7].
모시정의에서 인용한 주공의 주소씨周蘇氏란 글자가 열선전 유백아 (列仙傳 幼伯子)에 나온다. 첫 구절이 한글 어순이다:
“幼伯子者,周蘇氏 客也。冬常著單衣,盛暑著襦,形貌穢異 ”
<유백자는 주 소씨의 객이였다. 겨울에도 늘 걸친 것은 홋옷(單衣) 뿐이요, 한창 더울 때도 걸친 것은 짧은 팔적삼이어서 형모가 (그 곳에 살던 예맥) 평범한 사람들 과는 달랐다>하는 뜻이다.
사마천이 산서성에 올라가 그곳 노인들로 부터 들었다는 기자 箕子가 남긴 한마디, 흉노열전의 첫 한문장이 모두 한글 어순이다.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은 춘추전국 시대에도 한글과 같은 어순을 썼다. 연산 산맥을 포함한 넓은 지역에 있었던 제후국 진(晉)나라는 단군조선 (壇君朝鮮) 사람들이 살던 땅에 세운 나라가 분명하다.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 있었다. 말을 바꾸어 북주 北州 또는 여주(餘州, extra state)라고 했다. 그 곳은“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여 오던 기마유목민족의 지도자를 북주후모(北州侯莫)라고 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모두 연산 산맥을 본거지로 한 사람들이 남만주로 들어 왔다는 기록을 남겼다[8]. 신라는 진나라 사람들과 말이유사했다는 실례를 들었고, 6부촌을 <ㅁㅁ涿이라한 어원은 탁수(탁록)에서 왔다>고 했다[9].
August 30, 2018
[1]. 論語注疏 《泰誓》言:「武王伐紂,而白魚入於王舟。」三國志 文帝紀: 武王伐殷,白魚升舟. 爾雅:蟫,白魚
[2]. 史記 周本紀: 武王即位,太公望為師,周公旦為輔,召公、畢公之徒左右王,師修文王緒業. 武王上祭于畢。東觀兵,至于盟津。為文王木主,載以車,中軍。武王自稱太子發.
[3].孟子 梁惠王下: 孟子對曰:「昔者大王居邠,狄人侵之。事之以皮幣,不得免焉;事之以犬馬,不得免焉;事之以珠玉,
不得免焉。乃屬其耆老而告之曰:『狄人之所欲者,吾土地也。吾聞之也:君子不以其所以養人者害人。二三子何患乎無君?我將去之。』去邠,踰梁山,邑于岐山之下居焉。邠人曰:『仁人也,不可失也。』從之者如歸市。或曰:『世守也,非身之所能為也。效死勿去。』君請擇於斯二者。」
[4]. 詩經 曹風 蜉蝣: 蜉蝣之羽、衣裳楚楚.斯:〔古文〕𣂕《說文》析也。《爾雅·釋言》斯,離也。《註》齊𨻰曰斯。
《詩·𨻰風》墓門有棘,斧以斯之。《箋》維斧可以開析之。《呂覽·報更篇》趙宣孟見桑下餓人,與之脯一朐,曰斯食之。《註》斯,析也。又《爾雅·釋詁》斯,此也。《易·解卦》朋至斯孚。《詩·召南》何斯違期。又《詩·小雅》鹿斯之奔。《疏》此鹿斯與𩦡斯柳斯,斯皆辭也。又《禮·玉藻》二爵而言言斯。《註》斯,猶耳也 .書·金縢》大木斯拔。又賤也又《正字通》雞斯,馬名。商王拘西伯於羑里。太公得犬戎雞斯之乗,以獻。又波斯,國名。蔡邕·短人賦》熱地蝗兮蘆卽且,蒲中蛹兮蠶蠕須,視短人兮形若斯。《集韻》或作撕,亦作廝
[5].正義曰:《何人斯》者,蘇公所作以刺暴公也。暴公為王卿士,而於王所讒譖蘇公,令使獲譴焉,故蘇公作是《何人斯》之詩以絕之。言暴公不復與交也
[6].詩經 國風 周南:《螽斯》:美周室多男之詩,興也:《螽斯》,後妃子孫眾多也。言若螽斯不妒忌,則子孫眾多也。
忌,有所諱惡於人。○螽音終,《爾雅》作「蜤」,音同。惡,烏路反。〔~螽(zhōng)〕同“”,一种蝗虫
[7].詩·小雅:有兔斯首。《箋》斯,白也。今俗語斯白之斯作鮮。齊魯之閒聲近斯。又與纚同
[8].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 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古史曰:」百濟與高句麗,同出扶餘。「又云:」秦、漢亂離之時,中國人多竄海東。”則三國祖先
[9].三國遺事 “涿”:有似秦語。故或名之為秦韓。有十二小國。各萬戶。稱國。又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故取涿水之名。稱所居之邑里。雲沙涿。漸涿等羅人方言。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