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의 의사소통: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요순 시대에 글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가들이 인정 한다. 춘추시대까지는 여러 지역의 글자가 달라 진시황이 통일한 이후 글자 꼴 또한 하나로 통일 했다. 그러나 북쪽에 있던 고조선의 후예들은 옛 글자 꼴을 유지하고 발전 시켜 고조선 특유의 글자 꼴이 나타났다는 추론을 했다. 이편에서는 주로 언어 문제를 살펴 보기로 한다.
시경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살펴 보면, 산서성 사람들이 한글 어순으로 된 언어를 썼다. 삼국지 종회전(鍾會傳)에 <왕필(王弼, 226년- 249년)의 역주에는 여기저기에 고려언어(注易,往往有高麗言)가 있다고 했다 . 왕필이 도덕경과 주역에 주(注)를 달았다. 처음에 역서와 고문은 노예로 잡혀 왔던 관노가 작성(隸書) 했다 . 초씨역림에 실린 (순임금이 살다 죽었다는 해지연안) 는 문구가 한글 어순이다 :
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主君旄頭,立尊單于.
북쪽으로 도망 가서 큰 개를 대리고 사는 사람들이 (명조 지역의 지도자) 옆에서 보좌해 주던 자(左衽)를 지도자로 만들어 나라이름을 흉노라 했다. 부족장 모두 (旄頭)가 그를 세워 존경하여 제단 우(上, on top)에 모셨다.
모두 (旄頭, all together),단우 (單于)하는 낱말이 한국어다. 조선후 준(朝鮮侯準)의 아버지 조선왕 비(朝鮮王否), 즉 동호왕 비(東胡王 丕)를 죽인 흉노 추장 모둔(冒頓) 또한 “모두들의 선우”란 뜻이다[3]. 견융(犬戎)이란 글자가 춘추에 나오지만, 흉노(匈奴)란 이름은 가의 (賈誼, 200년- BC 168년)의 신서(新書)와 사마천의 사기, 유향(劉向; 77–6 BC)의 신서(新序), 전국책 등 전한 문헌에 처음 나온다. 건국 초기부터 서주를 괴롭히던 려산의 견융(驪山之國, 蓋狄) 이 서주를 함곡관 동쪽으로 쫓아 버렸다[4].
산서성 분수 계곡에서 태행산맥을 너머 해하 수계에 이르는 지역에 한국어와 같은 어순을 쓰던 사람들이 살았다. 그 곳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을 동호라 하고, 그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旄頭, 單于-鮮虞-鮮于, 準-凖, 丕-否] 을 여러 글자로 휘돌려 기록 했다.
산서성 사람들은 요순시대 부터 전한시대 까지도 한글 어순의 언어를 썼다는 증거다.
전한 시대 유향이 쓴 열선전 유백자(列仙傳 幼伯子)가 한글 어순 이다.
幼伯子者,周蘇氏客也。冬常著單衣,盛暑著襦,形貌穢異。後數十年更壯,時人莫知。世世來誡佑,蘇氏子孫得其福力也
홑 단자 단우(單于)는 제터 단(壇)를 사음한 글자다. 이 글자를 바꾸어 선(鮮)이라고 읽고 제단(祭壇)에서 기도드린다는 뜻을 선(禪; 礻示:單)자로 기록했다. 산해경 수경주등 여러 사서에는 선우(鮮于)라 했고, 춘추삼전등 다른 여러 사서에는 “鮮虞”란 글자를 썼다. 산서성에 있던 제후국 진이 선우를 벌(晉伐鮮虞)했다는 문구가 좌전에 있다. 산서성 역사를 기록한 국어 진어에는 선비와 부여가 서로 약속를 했다고 했다[5]. 선(鮮)자는 산서성에 있던 발조선(朝鮮)의 약자로 조선의 지도자는 우자를 붙여 선우(鮮于, 鮮虞)라 하고 조선의 평민 선비(鮮卑) 라고 했다. 선비족의 어원이다. 선비가 와전 되어 시배리아 가 되었다.
당시 산서성의 실권자였던 범선자(范宣子)가 그를 찾아온 손님에게 <산서성 사람들은 세록(世祿,가계의 혈통을 기록한 책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춘추의 내용이 세록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들의 기록이 태강 원년에 발굴된 급총죽간에 실려 이를 해/개위국 (蓋魏書)의 역사서 라고 했다[6]. 해국(解, 蓋)이 산해경에 나타난 남연과 왜 가까이“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 있었다. 이를 수서 (隋書)에는 대륙백제의 수도가 있던 맥국(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이라고 했다. 범(范)자는 홍범(洪範)의 범자를 사음한 글자다.
고구려 부여 숙신씨, 현도씨등 단군조선을 이루었던 여러 부족이 산서성에 살았다. 그들이 한글 어순과 같은 언어를 썼다. 이를 퉁구스어, 부여어, 고려어”라고 했다. 이들이 쓰던 언어가 만주를 거처 한해를 따라 멀리 퍼져 나갔다.
태강원년 (太康元年, 279년)에 발굴된 급총죽간 (汲冢竹簡)이 옛부터 전해 오던 우본기(禹本紀) 내용이 실렸다. 이를 왕충은 사마천의 의견에 따라 전설이라는 뜻에서 옛 기록 (舊志又言)이라고 했다. 예맥족은 옛부터 글자를 남겼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실렸다. 장병린(章炳麟, 1868년~1936년)이 남긴 구서 (訄書)에는 전욱 고양씨부터 서주의 수도를 설명 하면서 <순우의 도읍지는 하동 땅(河東地) 이고, 西周의 수도에는 의문이 많으나 주(周)족은 려왕공(麗王公)의 서쪽에 있었다>고 했다[7]. 그들이 쓰던 언어를 삼국지에서 고려언(高麗言) 이라고 했다. 려왕공(麗王公)은 고구려 (驪山 戎國)의 선조, 즉 려희(驪姬)와 같은 부족의 지도자를 간략한 글자다. 그의 후손이 무왕의 배에 올라 탔던 백어(白魚)다.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썼다. 그러나 지도자 백익 (伯益, 伯夷)을 잃는 고조선 사람들을 <떠돌이 방랑객 이란 뜻>에서 여러 글자로 표현 했다. 그 들이 흐터저 옛 고조선 영역에 넓리 흐터저 살았다. 호부여지국 (胡不與之國)을 간략히 불/부여(不與) 또는 여(與)자로 기록 하여 번역에 혼란을 겪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其人形似夫餘,言語不與夫餘,句麗同”.“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絕滅”.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言語不與韓同,皆髠頭如鮮卑”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 “至王莽末,並與匈奴為寇. 鮮卑亦東胡之餘也,
別保鮮卑山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丸同,是後或反或降,或與匈奴、烏丸相攻擊”
위에 인용한 문구의 불여(不與)는 선비산(鮮卑山) 즉 의무려산 서쪽에 있던 부여(扶餘)족을 뜻했다. 그들이 선비씨((鮮卑氏)와 같은 고조선 사람 (東胡)다. 이들이 한해를 따라 강화도(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를 지나 제주도와 멀리 유구에 까지 이르렀다. 함경도 방언에 아바이(父, father) 이란 뜻이 글안의 태조(遼 太祖, 재위: 907년- 926년) 이름이라고 알려진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 Abaoji of Liao)다. 북한에서는 한 때 “위대한 수령님 아바이 동무”라 했다.
글안국지(契丹國志)에는 한국 풍속 놀이에 나오는 생륙을 쌍륙(雙陸, 雙六)이라고 했다. 또한 글안의 초대 황제를 설명 하면서 <論曰:前史稱一秦既亡,一秦複生。天祚之阿骨打,即唐季之阿保機也>라 했다.
진시황이 죽었다더니 다시 태어났다. 그가 아골타 아버지다. 같은 혈통을 한 부족이 함곡관 서쪽에서 대흥안령을 타고 만주로 들어 왔다는 증거다.
왜인전에는 <그들의 풍속과 언어가 중국(하북평원)과 같다. 부여 동부선우와 같다> 했고, 진한전에는 부여 마한과 같다(其言語不與馬韓)고 했다[8].
수서(隋書)에 신라는 문자와 갑병이 중국과 같다(其文字、甲兵同於中國)고 했다.
왜왕의 성씨가 아마이(阿每) 호가 아배계미 (阿輩雞彌)라고 했다. 아버지란 뜻이다. 당시 왜에는 문자가 없서 나무에 칼로 세기고 매듭(無文字, 唯刻木結繩) 으로 의사를 전달 했다. 백제로 부터 불경을 구해서 문자를 쓰기 시작 했고 점괴를 알았다[9]. 또한 수서에는 불교전래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 했다. 끝에는 도교와 불교는 방외지교(方外之教)라 했다[10]. 단군조선의 지도자를 선인 이라 했스니, 단군조선 사람들을 외국으로 취급 했다는 뜻이다. 하여 관자에는 북쪽에는 중원에 속하지 않는 나라 여주( 餘州, extra state)가 있다고 했다.
중원 사람들은 수나라 초기에 처음으로 한해를 건너다 전함이 탐라도에 표류 했다. 그 때에 유구(流求國)를 점령 하고 자세하게 설명 했다[11]. 유구에 가보니 <왕의 성이 환사씨(歡斯氏) 이름은 갈라도(渴剌兜), 눈이 깊고 코가 큰 사람이 고조선 사람 (胡)과 비슷하고 또한 작고 빠릿빠릿한 사람도 있더라 (人深目長鼻,頗類於胡,亦有小慧).
말이 통하지 않아 곤륜인(有昆侖人頗解其語 )을 시켰드니 약간 말이 통하더라[12]. 남녀 모두 흰색 목도리?를 했고 (白糸寧繩纏發), 남자는 (해유관 같이) 새 깃을 꽂은 관( 其男子用鳥羽為冠)을 썼다. 부인은 손에 검은 색으로 부적 같은 글자를 그렸다(婦人以墨黥手,為蟲蛇之文). 새를 조각해 올려 놓은 장승이 있었다. 풍속은 돌궐과 비슷하고(頗同突厥) 문자는 없더라.
진수가 왜인전에 동이의 이동 경로를 밝힌 데로 <산서성 해지-분수 일대에서 나타난 단군 조선의 후예들이 한해(翰海)를 통하여 한반도를 지나 유구에 까지 흘러 갔다는 몇몇 사료를 선 보였다. 방대한 지역에 흐터저 살아 방언이 나타나게 되었고, 저나름 대로의 암호 문자(鄕札)를 나무쪽에 긁어 증거로 사용 하면서도 다른 나라와의 교류에서는, 서양에서 로마글자를 공용문서에 쓰듯, 진시황이 통일한 문자를 썼다.
끝.
September 21, 2018
[1].三國志 魏書二十八 鍾會傳: 會常論易無玄體、才性同異。著道畧論,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病老、莊,
常云:「見弼易注,所悟者多。」
[2].焦氏易林: 鳴條之郊,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3]. 史記 匈奴列傳:單于有太子名冒頓。後有所愛閼氏,生少子,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乃使冒頓質於月氏。
冒頓既質於月氏,而頭曼急擊月氏.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擊東胡。東胡初輕冒頓,不為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既歸,西擊走月氏
[4].春秋公羊傳: 蓋狄滅之. 水經注 㶟水: 桑乾水自源東南流,右會馬邑川水,水出馬邑西川,俗謂之磨川矣。
蓋狄語音訛,馬、磨聲相近故爾。其水東逕馬邑縣故城南
[5]. 國語 晉語八: 魯襄公使叔孫穆子來聘,范宣子問焉.置茅蕝,設望表,與鮮卑守燎,故不與盟。今將與狎主諸侯之盟
[6].晉書: 汲郡人不準掘魏襄王塚,得竹簡小篆古書十餘萬言,藏于秘府。蓋魏國之史書.
[7].訄書:《傳》顓頊都衛,舜虞邑實河東地,禹父曰崇伯鯀,後為夏室,在陽城中嶽下。是五都皆偏東,亦其征伐所至,則留戍之,而帝者因以為宅。若周作雒邑以為天下大湊,非其本都。察其本都,奧區阻深,以麗王公,西方之人歟?
[8].倭人傳: 其俗,語不與中國同,及羌雜胡同,各自有姓,姓如中國之姓矣。部落稍多,有數萬,
不與東部鮮卑同也。其種非一,有大胡,有丁令,或頗有羌雜處,由本亡奴婢故也。當漢、魏之際,其大人有檀柘,
[9].隋書: 倭王姓阿每,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
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雲委我弟. 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10].隋書: 道、佛者,方外之教,聖人之遠致也。俗士為之,不通其指,多離以迂怪,假托變幻亂於世,斯所以為弊也。
故中庸之教,是所罕言,然亦不可誣也。
[11].隋書:流求國,居海島之中,當建安郡東,水行五日而至。土多山洞。其王姓歡斯氏,名渴剌兜,不知其由來有國代數也。彼土人呼之為可老羊,妻曰多拔荼。所居曰波羅檀洞,塹柵三重,環以流水,樹棘為籓。王所居舍,雕刻禽獸
[12]. 隋書:帝遣武賁郎將陳棱、朝請大夫張鎮州率兵自義安浮海擊之。至高華嶼,又東行二日至郤鼊嶼,又一日便至流求。初,棱將南方諸國人從軍,有昆侖人頗解其語,遣人慰諭之,流求不從,拒逆官軍。棱擊走之,進至其都,頻戰皆敗,焚其宮室,虜其男女數千人,載軍實而還。自爾遂絕。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