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군에 얽힌 비밀-2: 부여 고구려 백제의 상호 관계:
동명성왕(東明)과 추무왕의 관계:
동북아시아 고대사 중고(古代史 中古, Mid-Antiquity)라 <부여, 고구려, 백제의 상호 관계가 모호 하다. 옛 말에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하는 질문을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실마리를 각국의 시조에 관한 기록에서 찾아 추리 했다.
동명성왕(東明)과 추무왕에 관한 기록:
동명성왕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고전기(古典記)를 인용 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동명이 추모왕의 라고 했고, 제 3대 태무신왕 3년(기원 후 29년) 에 동명왕조(立東明王廟)를 세웠다. 태무신왕은 수도를 동서 두 곳에 정하고 국토를 확장 했다. 동쪽으로는 요동 반도 옥저(沃沮) 지역에 있던 최리의 낭랑국을 정벌하고 서북쪽으로는 부여를 격파 했다. 서남 쪽으로는 후한 세력과 부디첬다(寇漢邊地)그의 아들 모본왕은 발해만 서북쪽 북평 상곡 태원 (漢北平, 漁陽、上谷、太原)일대를 점령 했다[1]. 대륙백제의 혈통을 밝힌 북사(北史)에는 의무려산 (醫巫閭山)을 뜻하는 려달 려해(閭達, 閭諧)란 이름으로 나온다[2]. 고구려가 처음에 세운 동명왕조는 태무신왕이7일 동안 사냥을 했다는 의무려산 (王田於箕山) 가까이, 즉 옛 현토군 고구려 현에 세웠다[3]. 그 후에는 동명조 란 예기가 없다.
백제에서는 보다 앞서 온조왕 원년(기원전 18년)에 동명왕조를 세워 계속하여 참배 했다. 삼국유사 또한 고전기(古典記, 一云)에 의하면 동명왕의 셋쩨 아들 온조라 했다[4]. 백제가 세운 동명왕조는 첫 수도 하남 위래성(慰禮城)에 있었다.
고전기(古典記, 一云)가 무슨 책인가를 알수 없다. 설화 내용을 보면 중국기록과 흡사 하다. 그 당시 흔히 알려진 통전에 부여 고구려 백제의 시조를 설명 했다.
통전 변방 1에 부여(夫餘)의 시초는 삼국지 부여전 내용을 인용하고 종말은 진서 (晉書[5])를 인용 하여, 서진 287년(至太康六年)에 18살 먹은 모용외 (慕容廆269년-333년)가 침략하여 부여왕이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保沃沮)에 도망 가서 살아 났다[6]. 통전 변방 2 (通典 邊防二 高句麗)에는 고구려를 설명 했다. 고구려의 선조를 주몽, 그의 어머니가 하백녀(河伯女)다.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보살수 (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至紇升骨城)에 이르러 살아 나라 이름을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높을 고자 고(高)씨라 했다[7].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하여 현토군 (玄菟郡) 에 속했다[8]. 우거왕의 경기지역에 고구려 현이 있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옛 문헌을 인용하여 <어린 동명이 고향을 떠나 큰 강물을 건너 도착한 곳에서 왕이 되였다는 설화(東明王説話)가 여러 곳에 실렸다[9]. 그가 떠난 고향을 논형(論衡)에는 고구려(高麗國), (방향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엄수(淹水)에 이르러 활을 쏘아…,도착지 이름은 실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논형 에는 고구려(高麗國)을 바꾸어 북방 탁리국(北夷橐離國)라 했다[10].
위요략(魏要略)에는 북방 탁리국(北方有橐離之國)에서 남쪽으로 도망가다 갑짜기 (奄)강물(南至奄水)에 이르러,…, 도착한 곳을 “東明因都王夫餘之地” 라 했다.
위략(魏略)에는 북방 고리국(昔北方有高離國) 방향을 알리지 않고, 엄수(至淹水) 에 이르러 도착한 곳을 “東明因都王夫餘之地也” 라 했다.
이 설화를 후한서(後漢書)에는 부여전(夫餘)에 실었다. 부여 남쪽에 고구려가 있다. 북방 탁리국왕(北夷橐離國王) 시녀가 …, 동명이 남쪽 엄사수 “南至掩㴲音斯。水” 에 이르러…, “因至夫餘而王之焉”라 했다.
위략구지(魏略舊志)에는 “昔北方有橐離之國”을 떠나 “南至淹水”에 이르러…., 도착 한 곳“東明因都王夫餘之地”이라 했다.
동명이 어려서 떠났던 나라 고구려 현(高句麗縣) 이름을 여러 글자로 바꾸었다.
글자나 발음이 비슷한게 아니다. 고의적으로 은폐 했다.
신이경에 나오는 동명산 (東明山)에는 천지장남의 궁(天地長男之宮)이 있었던 곳에서 동명이 자리 잡고 부여왕이 되었다[11]. 이를 삼국유사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북부여다. 수도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이라고 했다.
앞서 부여“夫餘, 扶餘”의 어원을 설명 했다. 부여는 홍수가 범람하던 함곡관 서쪽에서 떠돌이 “蜉蝣,浮游, Vagabond” 또는 그 곳에 살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不與之國)는 표현으로 기록되었던 부족이다. 그들이 연산 산맥 동쪽으로 올라와 만주 전역에 흐터져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고구려는 구려(句麗)가 어근이다. 구려는구려 (九黎)가 구리 (九夷)로, 리/려(黎)를 려융(驪戎) 이라 했다. 치우천왕이 인솔 하던 여러 부족국가 구리(九黎)에서 왔다.
여씨 춘추에서는 작병 (作兵)이란 말을 ‘주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황제를 이겼다’고 풀이 했다 . 이 전쟁을 “구리지난; 九黎之亂”이라 부르기도 하고 치우 천왕을 “구리지군; 九黎之君” 또는 “구리치우; 九黎蚩尤”라고도 한다. 구리(九黎)는 여민 (黎民)의 여러 부족이란 뜻이다. 그 들을 그계 (其械)라 했다. 형틀 계 (械:xiè jiè/시애) 란 글자는 “契, 解”의 동음이자다. 탕병(蕩兵)이란 편명을 용병이라 하니 그 뜻이 뚜렸하다. 치우가 철기로 무장 (蚩尤造九冶, 鐵銕: 字林云鐵名)하여 “온 천하 사람들이 하나로 뭉쳤다,” ‘옛부터 현명한 왕은 의로운 병사가 있어 그들은 나태하지 않았다” 하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을 비문에는 추모왕의17세 손(十七世孫)이라 하여, 세대수가 삼국사기와 다르고 동명이란 글자가 없다. 부여국왕 시비(國王侍婢)를 비문에는 “河伯女郎”건너온 강물을 부여 땅에서 갑까기 나타난 날카로운 큰 강물 (夫餘奄利大水)이라고 했다. 치수사업을 하던 사람의 후손녀를 雓子(鷄子)가 하늘로 부터 내려와서 임신 시켰다. 강희자전에는 계자(鷄子)를 설명 했다[12]. 햇님의 후손이란 뜻이 있는 글자다. 계란의 커다란 노른자란 뜻으로 글자를 남겼다. 실종된 신라 때, 작자 및 연대 미상의 향가 여나산(余那山)과 관련이 있는 글자다. 추모왕이 비류수 상에 정착한 시기 부터를 고구려라고 했다[13]. 동명성왕은 의무려산 일대에 수도를 정했다. 졸본에 나타난 추모왕관 시대와 장소가 다르다.
이와 같이 사료를 분석해 보면 설화(東明王説話)의 출처는 위약과 논형이다.
부여를 떠나 부여 땅에서 왕이 되었고, 고구려를 떠나 고구려 왕이 되었다. 고구려와 부여는 만주 넓은 땅에 흐터져 있던 부족 연맹체였다. 의무려산 일대에 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나타났다. 삼국유사에는 졸본부여는 북부여의 별도 (別都) 라고 했다. 그래서 부여 왕이라 했고 성씨 또한 고구려와 같다[14].
천애의 방어선 요하 동쪽 요택에 자리잡고 번창했던 예맥족의 경기지역 (卒本扶餘)
은 중원 문화권이 직접 교류 하지는 못하여 기록이 혼미 하다. 중원 세력과는 후한 말기 공손연세력이 멸망한 후에 중원을 찾아갔던 때에 처음으로 개통되여 현지인 (今使譯所)의 증언을 간추려 그전에 작성된 위략(魏畧)의 내용을 첨부 하여 삼국지 동이전을 편찬 했다.
동면왕설화(東明王説話)의 출처:
논형의 저자 왕충(王充, 27년 ~ ?)은 후한 초기의 신분이 낮은 집안 출생으로 반고 (班固, 32년-92년)의 아버지인 반표(班彪)에게 배웠다. 당시의 어용학자와는 사상적으로 거리가 먼 철학자인 동시에 (동양 최초?)자연 과학의 개척자 였다.
위약과 위략구지(魏略舊志)에 실린 내용은 비슷 하다.
위약은 태강원년 (太康元年, 279년)에 발굴된 급총죽간 (汲冢竹簡)이 옛부터 전해 오던 우본기(禹本紀) 내용이 실려 이를 해/개위국 (蓋魏書)의 역사서 라고 했다 . 이를 근거로 박사 고흥(高興)이 백제의 역사서 서기 (書記)를 저술했다.
위서(魏書)는 대륙북제(北齊, 550년-577년)의 위수(魏收)가 편찬한 북위의
정사이다. 비류의 후손이 북위로 부터 옥새를 물러 받아 대륙백제를 세웠다. 대륙백제의 존제를 은패하던 중원 사람들은 위서를 더러운 역사서 예사(穢史)라 했다. 예맥족의 역사서(濊貊 史書)란 뜻이 틀림 없다. 그들이 햇님의 후손이라 자칭 하던 부족이라 해(解, 蓋)를 성씨로 했다. 해국(解, 蓋)이 산해경에 나타난 남연과 왜 가까이“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있었다.
위징魏徵, 580년 – 643년)의 수서 (隋書)에는 대륙백제의 수도가 있던 맥국 (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이라고 했다.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 해안이 삼한의 후예들이 바다, 즉 한해(翰海)로 진출하던 관문이었다.
급총죽간 내용은 풀이가 난해 했다. 발굴 이후에는 그 내용을 인용한 햇님의 후손이라 자칭하던 여러종의 위나라의 역사서(魏略)가 나타났다. 이렇게 중국문헌을 살펴 보면, 급총죽간 내용 속에 는 단군왕검과 동명성왕에 관한 기록이 있었고, 추모왕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끝
[1].慕本王,諱解憂一云解愛婁。,大武神王元子.二年,春,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祭●,以恩信待之,乃復和親。
[2]. 太平御覽 高句麗:《北史》曰:朱蒙,在夫餘時,其妻懷孕,朱蒙逃后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王,即與母亡歸之,名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至孫莫來立,乃并夫餘。漢武帝元封四年,滅朝鮮,置玄菟郡,以高句麗為縣以屬之。
[3]. 廣韻 齊 奚: 奚:何也。《說文》曰:大腹也,又東北夷名亦姓夏車正奚仲又虜複姓後魏書有達奚薄奚統奚吐奚等四氏。
胡雞切. 豯:豕生三月. 㜎:女奴.太玄經 傒:陽氣有傒,可以進而進,物咸得其願.傒後時。測曰,「傒」而「後」之、解也.
傒:東北夷名. 何:唐韻》胡歌切 。曷也,奚也,孰也,詰詞也。《書·臯陶謨》禹曰何。詩·小雅: 夜如何其. 孟康曰: 解,
脫也.《隋書》西域有何國. 同荷。儋也,負也。嶰谷,谷名。《前漢·律歷志》取竹之解谷。。一說昆侖之北谷名也。
[4]. 三國遺事 “古典記”: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解為氏。後至聖王。移都於泗泚。
今扶餘郡彌雛忽。仁州。慰禮。今稷山按古典記云。東明王第三子溫祚。
[5].通典 邊防一 夫餘:夫餘國,後漢通焉。初,北夷橐離國王按後漢、魏二史皆云:夫餘國在高句麗北。又案:後魏及隋史,
高句麗在夫餘國南。而隋史云百濟出於夫餘,夫餘出於高句麗國王子東明之後也。又謂橐離國即高麗國,乃夫餘國當在句麗之南矣。若詳考諸家所說,疑橐離在夫餘之北,別是一國。然未詳孰是。有子曰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而欲殺之。東明奔走,南渡掩箫水,因至夫餘而王之。順帝永和初,其王始來朝。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夫餘本屬玄菟,至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其王始死,子尉仇台立,更屬遼東。時句麗、鮮卑強,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至孫位居嗣立
[6]. 通典 夫餘:至太康六年,為慕容廆所襲破。廆,呼罪反。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武帝以何龕為護東夷校尉。
明年,夫餘後王依羅遣使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龕遣督郵賈沈以兵送之。爾後每為廆掠其種人,賣於中國,帝又以官物贖還,禁市夫餘之口。自後無聞。
[7].我是天帝子河伯孫。今日逃遁。追者垂及。奈何。於是魚鱉成橋。得渡而橋解。追騎不得渡。至卒本州玄葂郡之界遂都焉。未遑作宮室。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本姓解也.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故自以高為氏
[8].通典 邊防二 高句麗:高句麗,後漢朝貢,云本出於夫餘先祖朱蒙。朱蒙母河伯女,為夫餘王妻,為日所照,遂有孕而生。
及長,名曰朱蒙,俗言善射也。國人欲殺之,朱蒙棄夫餘,東南走渡普述水,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句麗,以高為氏。及漢武滅朝鮮,以高句麗為縣,屬玄菟郡。
[9]. 三國志 公孫度傳: 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10].太平御覽 地部三十八 橋: 王充《論衡》曰:高麗國侍婢有氣如雞子來下之有娠,生子名東明。東明善射,王恐其害國,
欲殺之。東明走至淹水,以弓擊水,魚鱉為梁,既度而魚鱉解散。因都王夫餘 命當都王夫餘.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11].神異經:東方外有東明山,有宮焉,左右有闕而立,其高百尺,畫以五色,青石為墻。高三仞,門有銀榜,以青石碧鏤,
題曰「天地長男之宮」。
[12]. 三國志 魏書三十 夫餘傳:「有氣如鷄子來下,我故有身。」婢對曰:「有氣大如雞子,從天而下,我故有娠。」
《康熙字典·隹部·七》雓:《廣韻》《韻會》羊諸切,𠀤音余。《玉篇》雞子也。《爾雅·釋鳥》雞大者蜀,蜀子雓
[13].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一云:朱蒙至卒本扶餘,王無子,見朱蒙知非常人,以其女妻之,王薨,朱蒙嗣位
[14].三國遺事: 卒本州在遼東界。國史高麗本記云。始祖東明聖帝姓言氏諱朱蒙。先是北扶餘王解夫婁。既避地於東扶餘. 即東明帝為卒本扶餘王之謂也。此卒本扶餘。亦是北扶餘。之別都。故云扶餘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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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고전기(古典記)를 인용 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동명이 추모왕의 라고 했고, 제 3대 태무신왕 3년(기원 후 29년)에 동명왕조(立東明王廟)를 세웠다. 그 후에는 동명조 란 예기가 없다. 백제에서는 그 보다 앞서 온조왕 원년(기원전 18년)에 동명왕조를 세워 계속하여 참배 했다. 삼국유사 또한 고전기(古典記, 一云)에 의하면 동명왕의 셋쩨 아들 온조라 했다[1].
고전기(古典記, 一云)가 무슨 책인가를 알수 없다. 설화 내용을 보면 중국기록과 흡사 하다. 그 당시 흔히 알려진 통전에 부여 고구려 백제의 시조를 설명 했다.
통전 변방 1에 부여(夫餘)의 시초는 삼국지 부여전 내용을 인용하고 종말은 진서 (晉書[2])를 인용 하여, 서진 287년(至太康六年)에 18살 먹은 모용외 (慕容廆269년-333년)가 침략하여 부여왕이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保沃沮)에 도망 가서 살아 났다[3]. 통전 변방 2 (通典 邊防二 高句麗)에는 고구려를 설명 했다. 고구려의 선조를 주몽, 그의 어머니가 하백녀(河伯女)다.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보살수 (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至紇升骨城)에 이르러 살아 나라 이름을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높을 고자 고(高)씨라 했다[4].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하여 현토군 (玄菟郡) 에 속했다[5]. 우거왕의 경기지역에 고구려 현이 있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옛 문헌을 인용하여 <어린 동명이 고향을 떠나 큰 강물을 건너 도착한 곳에서 왕이 되였다는 설화(東明王説話)가 여러 곳에 실렸다[6]. 그가 떠난 고향을 논형(論衡)에는 고구려(高麗國), (방향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엄수(淹水)에 이르러 활을 쏘아…,도착지 이름은 실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논형에는 고구려(高麗國)을 바꾸어 북방 탁리국(北夷橐離國)라 했다[7].
위요략(魏要略)에는 북방 탁리국(北方有橐離之國)에서 남쪽으로 도망가다 갑짜기 (奄)강물(南至奄水)에 이르러,…, 도착한 곳을 “東明因都王夫餘之地” 라 했다.
위략(魏略)에는 북방 고리국(昔北方有高離國) 방향을 알리지 않고, 엄수(至淹水) 에 이르러 도착한 곳을 “東明因都王夫餘之地也” 라 했다.
이 설화를 후한서(後漢書)에는 부여전(夫餘)에 실었다. 부여 남쪽에 고구려가 있다. 북방 탁리국왕(北夷橐離國王) 시녀가 …, 동명이 남쪽 엄사수 “南至掩㴲音斯。水”에 이르러…, “因至夫餘而王之焉”라 했다.
위략구지(魏略舊志)에는 “昔北方有橐離之國”을 떠나 “南至淹水”에 이르러…., 도착 한 곳“東明因都王夫餘之地”이라 했다.
동명이 어려서 떠났던 나라 고구려 현(高句麗縣) 이름을 여러 글자로 바꾸었다.
글자나 발음이 비슷한게 아니다. 고의적으로 은폐 했다.
신이경에 나오는 동명산 (東明山)에는 천지장남의 궁(天地長男之宮)이 있었던 곳에서 동명이 자리 잡고 부여왕이 되었다[8]. 이를 삼국유사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북부여다. 수도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이라고 했다
앞서 부여“夫餘, 扶餘”의 어원을 설명 했다. 부여는 홍수가 범람하던 함곡관 서쪽에서 떠돌이 “蜉蝣,浮游, Vagabond” 또는 그 곳에 살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不與之國)는 표현으로 기록되었던 부족이다. 그들이 연산 산맥 동쪽으로 올라와 만주 전역에 여러 부족국가로 흐터져 살고 있었다.
고구려는 구려(句麗)가 어근이다. 구려는구려 (九黎)가 구리 (九夷)로, 리/려(黎)를 려융(驪戎) 이라 했다. 치우천왕이 인솔 하던 여러 부족국가 구리(九黎)에서 왔다.
여씨 춘추에서는 작병 (作兵)이란 말을 ‘주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황제를 이겼다’고 풀이 했다 . 이 전쟁을 “구리지난; 九黎之亂”이라 부르기도 하고 치우 천왕을 “구리지군; 九黎之君” 또는 “구리치우; 九黎蚩尤”라고도 한다. 구리(九黎)는 여민 (黎民)의 여러 부족이란 뜻이다. 그 들을 그계 (其械)라 했다. 형틀 계 (械:xiè jiè/시애) 란 글자는 “契, 解”의 동음이자다. 탕병(蕩兵)이란 편명을 용병이라 하니 그 뜻이 뚜렸하다. 치우가 철기로 무장 (蚩尤造九冶, 鐵銕: 字林云鐵名)하여 “온 천하 사람들이 하나로 뭉쳤다,” ‘옛부터 현명한 왕은 의로운 병사가 있어 그들은 나태하지 않았다” 하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을 비문에는 추모왕의17세 손(十七世孫)이라 하여, 세대수가 삼국사기와 다르고 동명이란 글자가 없다. 부여국왕 시비(國王侍婢)를 비문에는 “河伯女郎”건너온 강물을 부여 엄리대수 (夫餘奄利大水)라고 했다. 치수사업을 하던 사람의 후손녀를 雓子(鷄子)가 하늘로 부터 내려와서 임신 시켰다. 강희자전에는 계자(鷄子)를 설명 했다[9]. 햇님의 후손이란 뜻이 있는 글자다. 계란의 커다란 노른자란 뜻으로 글자를 남겼다. 실종된 신라 때, 작자 및 연대 미상의 향가 여나산(余那山)과 관련이 있는 글자다. 추모왕이 비류수 상에 정착한 시기 부터를 고구려라고 했다[10]. 동명성왕과 추모왕은 시대와 장소가 다르다.
이와 같이 사료를 분석해 보면 설화(東明王説話)의 출처는 위약과 논형이다.
부여를 떠나 부여 땅에서 왕이 되었고, 고구려를 떠나 고구려 왕이 되었다. 고구려와 부여는 만주 넓은 땅에 흐터져 있던 부족 연맹였다. 고구려가 의무려산 일대에 있던 시절에 탄생하여 부여와 같은 집단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 했다. 삼국유사에는 졸본부여는 북부여의 별도 (別都)였다. 그래서 부여 왕이라 했다[11].
천애의 방어선 요하 동쪽 요택에 자리잡고 번창했던 예맥족의 경기지역 (卒本扶餘)
은 중원 문화권이 직접 교류 하지는 못하여 기록이 혼미 하다. 중원 세력과는 후한 말기 공손연세력이 멸망한 후에 중원을 찾아갔던 때에 처음으로 개통되여 현지인 (今使譯所)의 증언을 간추려 그전에 작성된 위략(魏畧)의 내용을 첨부 하여 삼국지 동이전을 편찬 했다.
동면왕설화(東明王説話)의 출처:
논형의 저자 왕충(王充, 27년 ~ ?)은 후한 초기의 신분이 낮은 집안 출생으로 반고 (班固, 32년-92년)의 아버지인 반표(班彪)에게 배웠다. 당시의 어용학자와는 사상적으로 거리가 먼 철학자인 동시에 (동양 최초?)자연 과학의 개척자 였다.
위약과 위략구지(魏略舊志)에 실린 내용은 비슷 하다.
위약은 태강원년 (太康元年, 279년)에 발굴된 급총죽간 (汲冢竹簡)이 옛부터 전해 오던 우본기(禹本紀) 내용이 실려 이를 해/개위국 (蓋魏書)의 역사서 라고 했다 . 이를 근거로 박사 고흥(高興)이 백제의 역사서 서기 (書記)를 저술했다.
위서(魏書)는 대륙북제(北齊, 550년-577년)의 위수(魏收)가 편찬한 북위의
정사이다. 비류의 후손이 북위로 부터 옥새를 물러 받아 대륙백제를 세웠다. 대륙백제의 존제를 은패하던 중원 사람들은 위서를 더러운 역사서 예사(穢史)라 했다. 틀림 없는 예맥족의 역사서(濊貊 史書)다. 그들이 햇님의 후손이라 자칭 하던 부족이라 해(解, 蓋)를 성씨로 했다. 해국(解, 蓋)이 산해경에 나타난 남연과 왜 가까이“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있었다. 위징魏徵, 580년 – 643년)의 수서 (隋書)에는 대륙백제의 수도가 있던 맥국(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이라고 했다.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 해안이 삼한의 후예들이 바다, 즉 한해(翰海)로 진출하던 관문이었다.
급총죽간 내용이 풀이가 난해 했다. 발굴 이후에는 그 내용을 인용한 여러종의 위나라의 역사서가 나타났다. 이렇게 중국문헌을 살펴 보면, 급총죽간 내용 속에 는 단군왕검과 동명성왕에 관한 기록이 있었고, 추모왕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끝
[1]. 三國遺事 “古典記”: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解為氏。後至聖王。移都於泗泚。
今扶餘郡彌雛忽。仁州。慰禮。今稷山按古典記云。東明王第三子溫祚。
[2].通典 邊防一 夫餘:夫餘國,後漢通焉。初,北夷橐離國王按後漢、魏二史皆云:夫餘國在高句麗北。又案:後魏及隋史,
高句麗在夫餘國南。而隋史云百濟出於夫餘,夫餘出於高句麗國王子東明之後也。又謂橐離國即高麗國,乃夫餘國當在句麗之南矣。若詳考諸家所說,疑橐離在夫餘之北,別是一國。然未詳孰是。有子曰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而欲殺之。東明奔走,南渡掩箫水,因至夫餘而王之。順帝永和初,其王始來朝。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夫餘本屬玄菟,至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其王始死,子尉仇台立,更屬遼東。時句麗、鮮卑強,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至孫位居嗣立
[3]. 通典 夫餘:至太康六年,為慕容廆所襲破。廆,呼罪反。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武帝以何龕為護東夷校尉。
明年,夫餘後王依羅遣使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龕遣督郵賈沈以兵送之。爾後每為廆掠其種人,賣於中國,帝又以官物贖還,禁市夫餘之口。自後無聞。
[4].我是天帝子河伯孫。今日逃遁。追者垂及。奈何。於是魚鱉成橋。得渡而橋解。追騎不得渡。至卒本州玄葂郡之界遂都焉。未遑作宮室。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本姓解也.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故自以高為氏
[5].通典 邊防二 高句麗:高句麗,後漢朝貢,云本出於夫餘先祖朱蒙。朱蒙母河伯女,為夫餘王妻,為日所照,遂有孕而生。
及長,名曰朱蒙,俗言善射也。國人欲殺之,朱蒙棄夫餘,東南走渡普述水,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句麗,以高為氏。及漢武滅朝鮮,以高句麗為縣,屬玄菟郡。
[6]. 三國志 公孫度傳: 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7].太平御覽 地部三十八 橋: 王充《論衡》曰:高麗國侍婢有氣如雞子來下之有娠,生子名東明。東明善射,王恐其害國,
欲殺之。東明走至淹水,以弓擊水,魚鱉為梁,既度而魚鱉解散。因都王夫餘 命當都王夫餘.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8].神異經:東方外有東明山,有宮焉,左右有闕而立,其高百尺,畫以五色,青石為墻。高三仞,門有銀榜,以青石碧鏤,
題曰「天地長男之宮」。
[9]. 三國志 魏書三十 夫餘傳:「有氣如鷄子來下,我故有身。」婢對曰:「有氣大如雞子,從天而下,我故有娠。」
《康熙字典·隹部·七》雓:《廣韻》《韻會》羊諸切,𠀤音余。《玉篇》雞子也。《爾雅·釋鳥》雞大者蜀,蜀子雓
[10].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一云:朱蒙至卒本扶餘,王無子,見朱蒙知非常人,以其女妻之,王薨,朱蒙嗣位
[11].三國遺事: 卒本州在遼東界。國史高麗本記云。始祖東明聖帝姓言氏諱朱蒙。先是北扶餘王解夫婁。既避地於東扶餘. 即東明帝為卒本扶餘王之謂也。此卒本扶餘。亦是北扶餘。之別都。故云扶餘王也。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