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nshot-10: 결과: 단군조선의 발생지-2.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위(三危)는 구주 (九州.九疇)안에 있었다. 중국 고전에 삼위(三危) 기택(旣宅.既宅)이란 문구는 치수사업과 관계된 기록 여러 곳에 나옵니다 . 모두다 분수 연안과 그 서쪽에 보입니다. 북쪽에서 분수를 따라 내려온 사람들이 치수 사업에 성공 했습니다. 그 숨은 뜻이 [이미 기旣자] 속에 있습니다. 그 뜻을 숨기려고 [이미 기(旣)자를 모양이 비슷한 글자 기既자로 바꾸어] 현존 하는 상서에 나옵니다. 이미 기자는 횃불을 들고 허리에 비수(匕)를 지니고 살던 서쪽에서 온 유목민 이란 뜻을 겹쳐 만든 글자(旣: 皀,旡: 白,匕: 白:西方色也. 𤼽:古文白字) 입니다. 이를…..
魏書云.글쓴 당시부터 2000년전=與高同時=전국칠웅 403 BC에 산서성晉國被韓,趙,魏: 魏襄王墓,蓋魏國之史書내용.禹本紀.懷舊志 진수가 46세 때인 279년에 발굴. 費氏經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降於太伯山頂. 詩經 魏風 汾沮洳.汾王. 尚書禹貢:三危旣宅. 夏本紀: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 네. Video 준비가 완성 되기 전에. 제가 찾았다고 한 결과 부터 말씀 드리죠. 일연 스님이 남긴 삼국유사 내용이 진실로 밝혀 졌습니다. 스님은 출처를 밝혔습니다: 위서에 적혀 있기를 글쓴 당시부터 2000년전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여고동시(與高同時) 라, 즉 堯임금이다. 堯임금은 융우禹의 아버지가 치수를 잘못하여 처형 했다. 그 뒤 융우가 치수 사업을 성공했다죠. 그때 부터 2,000년 후에는 전국 시대가 됩니다. 전국칠웅에 魏나라가 있었습니다……
변진전에 나오는 염해국(冉奚國): 염해국이 있던 지역은 낭랑의 어원이 되는 갈석산 유역이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다어(多語)란 문구는 낭랑(樂浪)을 설명에 한번 나올 뿐이고,염(冄; 나아갈 염 冉과 同字)이 똑 같은 발음을 두번 계속 하는 말소리(言冄,言冄)이라고 했다. 다언(多言)이라 한다는 표현은 여러 글자에 적용했다. 글자 하나 읽는 소리를 언이라 하고 여러 사람들이 토의 하는 소리를 어(直言曰言,論難曰語)라 했다. 진의 여침(晉人呂忱撰)이 편찬 했다는 자림(字林)에서도 그와 같이 설명 했다[. 字林云直言曰言荅難曰語.說文解字:多語也。从言冄聲。樂浪有.:,多語也。从言冄聲。樂浪有邯縣.樂浪有東暆縣。讀若酏.詹:多言也。从言从八从厃. ]. 언어란 뜻은 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토론을 뜻했다.어(言)은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voice) 어(語)는 내 목소리(言,吾: my opinion)란 뜻이 잠겨…..
상서 우공편에 삼위(三危)란 글자: 위서에 이르기(魏書云)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고 가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했다[.三國遺事: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단군신화에 나오는 위(危)자는 사음자다. 설문해자에는 태위야(殆:危也)라 했다. 시경위풍에 나오는 올라가기 어려운 성벽“乘彼垝垣” 을 뜻한 글자라 했다[.詩經 國風 衛風 氓:氓之蚩蚩、抱布貿絲。匪來貿絲、來即我謀。送子涉淇、至于頓丘。 匪我愆期、子無良媒。將子無怒、秋以為期 乘彼垝垣、以望復關。不見復關、泣涕漣漣. ]. 이를 설명한 문구가 왕험성(王險城)이다. 험(險)자는 모든 사람들(僉)이 뽑은 지도자 검(儉)이 사는 곳을 뜻한 글자다. 중국 고전을 살펴 보면 위(危)자와 험(險)자는 단군왕검 백익을 뜻한 글자로 쓰이기도 했다[.危:〔古文〕說文》在高而懼也。从厃,人在厓上,自卪止之也。《徐曰》孝經,高而不危,《玉篇》不安貌。《廣韻》疾也。隤也,不正也。又《禮·儒行》有比黨而危之者。《註》危,欲毁害之也。又屋棟上也。《禮·喪大記》升自東榮,中屋履危。《疏》踐履屋棟高危處。又《韻會》宿名。三星。《左傳·襄二十八年註》書·禹貢》三危旣宅。《韻會》三峗,山名。通作危。史記 律書: 危,垝也. 說文解字:垝:毀垣也……
의문이 많은 사수(斯水)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건너온 강이 사수(淹●水一名盖斯水. 淹●水或云蓋斯水)라 했다. 동명(東明)에 관한 같은 내용이 후한서와 태평어람에도 실렸다. 사수(掩㴲音斯水)를 건넜다고 했다[.太平御覽 夫餘:東明奔走,南至掩㴲音斯。水,以弓擊水,魚鱉皆聚浮水上,東明乘之得度,因至夫餘而王之焉]. 삼국유사에는 주몽이 건너온 강이 어느강인지 모르겠다(於是蒙與烏伊等三人為友。行至淹水今未詳)고 했다. 사수(斯水)의 사(斯;sī/si1/siɛ)자는 사음자가 분명 하다. 같은 음을 “虒,媤 斯 絲,㴲”란 글자로도 기록 했다. 시경 등 각종 고전에 많이 나오는 글자다[. 斯:《爾雅·釋言》斯,離也。《註》齊呂覽·報更篇》趙宣孟見桑下餓人,與之脯一朐,曰斯食之。《註》斯,析也。又《爾雅·釋詁》斯,此也。《易·解卦》朋至斯孚。《詩·召南》何斯違期。又《詩·小雅》鹿斯之奔。《疏》此鹿斯與詩·小雅》有兔斯首。《箋》斯,白也。今俗語斯白之斯作鮮。 《詩·大雅》王赫斯怒。 《集韻》或作撕,亦作廝. ]. 그러한 연유로 사수(斯水)란 여울은 고조선 사람들(斯,白也。今俗語斯白之斯作鮮)이 살던 전역에 흐터져 나타났다. 수경주에 사수(斯水)란 이름이 36번 적혔다. 이를 종합해 보면 사수는 단군조선 발생지에서 부터 조선이란 글자가 지나온 태행산맥을 따라 하북에서…..
무왕은 백익의 후손-숙진(肅慎)씨을 위해. 백어(白魚),필공이 양때 같이 이끌고 참전한 장면을 그린 “麾之以肱、畢來既升”란 시귀가 무양(祈父之什 無羊)편에 실렸다. 고조선의 발생지에 들어와 그곳 사람들을 사용하여 금석문을 만들었다.篆,掾書,隷書. 이괘(利簋)에 나타난 글자는 籒文-韓穢字
단군조선이 산서성에서 나타났다는 확증.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일연(一然)스님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남긴 삼국유사에 단군조선의 건국신화가 있다. 다행히도 출처를 위서(魏書)라고 했다(*[. 三國遺事: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堯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 三危太伯. ]) 단군신화를 기록한 사람이 살던 시대 부터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에 수도를 정했다. 요임금과 같은 시절(與高同時)이라 했다. 스님이 읽었던 위서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타난 전국칠웅의 하나였던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나라의 역사서가 분명 하다. 사기 위세가(史記 魏世家)에는 필공 고의 후손(畢公高之後)이다.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고를 필에 봉했다(而高封於畢) 하여 필을 성씨로 했다. 그 후에 서인이 되어 중국에 동화 되거나…..
삼위태백(三危太伯)의 삼위(三危)란 글자: 위서에 이르기(魏書云)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고 가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했다[. 三國遺事: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단군신화에 나오는 위(危)자는 사음자다. 설문해자에는 위태롭다(殆:危也).시경위풍에 나오는 올라가기 어려운 성벽“乘彼垝垣” 을 뜻한 글자라 했다. 중국 고전을 살펴 보면 후에는 단군왕검 백익을 뜻한 글자로 쓰이기도 했다[. 詩經 國風 衛風 氓:氓之蚩蚩、抱布貿絲。匪來貿絲、來即我謀。送子涉淇、至于頓丘。 匪我愆期、子無良媒。將子無怒、秋以為期 乘彼垝垣、以望復關。不見復關、泣涕漣漣.]. 한민족의 선조가 우랄 알타이산 남쪽에 있는 칸 탱그리(Khan Tengri Mountain) 일대에서 왔다는 증거다. 삼위(三危)란 글자는 상서 우서 순전(尚書 虞書 舜典)에…..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 앞서 한해(翰海)를 언제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나를 살펴 보았다. 중국 기록에 신라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를 다스렸다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를 찾아 보기로 한다. 진서(晉書)에는 공손연이 숨었다 잡혔던 옛 졸본주 양평성 일대를 동왜(東倭)라고 했다(*[.晉書 帝紀第一: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脩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至是皆奏罷之,節用務農,天下欣賴焉.]). 남제의 심약(沈約:441~513年)이 편술한 유송(劉宋:420년 ~ 479년) 역사서(宋書 夷蠻)에는 당시 유송의 해안선에 있던 여러 부족과 국가를 설명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왜는 바닷속 섬에 산다. 외국 여러 족속은 이수를 몰라 믿기가 어럽다. 흔히 3-천리 먼곳은 2-3만리를 배를 타고(乘舶舉帆)가는 길이라 거리(里數)를 자세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의 세로운 고찰-2: 의문의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란 문구: 동북아시아 상고사에는 왜왕(倭王,倭國王)이란 글자가 여러 시대와 장소에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國,倭人)자가 많이 나온다. 백제 본기에는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년~392년) 때에 왜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 가야제국이 모두 한해 서북쪽에서 나타난던 시절이다. 일본 구주후쿠오카 시(福岡市) 해안에서는 왜왕인(委奴國王)이 발견 되었다. 일본에서 국보로 다루는 옥새의 글자를 중국에서는 왜소 왜(倭)자로 바꾸어 “漢倭奴國王印”라 한다. 또 다른 왜왕이 다스리던 땅이 한해 동남쪽 연안(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 오늘의 구주 남쪽과 유구 열도에도 있었다. 이지역 사람들이 키가 삼사척 이라 작다(人長三四尺)하여 왜(倭)자를 형용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