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에 나타났던 공손씨(公孫氏)의 시말-교정본: 서론: 한-중 양국 문헌에 공손(公孫)씨가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공손(公孫)씨가 한나라가 점령 했던 요동(漢遼東)에서 현도군(玄菟郡)에 이르는 지역에서 활동 했다. 삼국지에는 공손도전(公孫度傳)이 있다[. 三國志 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子豹,年十八歲,早死。度少時名豹,又與琙子同年,琙見而親愛之,遣就師學,為取妻。後舉有道,除尚書郎,稍遷兾州刺史,以謠言免。同郡徐榮為董卓中郎將,薦度為遼東太守。度起玄菟小吏,為遼東郡所輕。先時,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度到官,收昭,笞殺於襄平市。郡中名豪大姓田韶等宿遇無恩,皆以法誅,所夷滅百餘家,郡中震慄。東伐高句驪,西擊烏丸,威行海外。 ]. 현토태수가 공손도(公孫度 ? ~ 204년)와 동갑이였던 아들을 잃고 공손도를 사랑하여 장가 까지 들려 주었다. 동이전에는 아들 공손강(公孫康, ? ~ 221년) 손자 공손연 3세에 걸처 요동에 군림하여 중원세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권을 유지 했다. 공손도는 동한 광무제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다. 그가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딸을 부인으로 택했다. 그의 아들이 공손강이고 손자가 공손연(公孫淵. 238년)이다. 부여 왕실이 공손연의…..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 옛적에 한글이 나타나기 전에 관아에서 일하던 이서(吏胥)들이 작성한 한자 표기의 문체를 이두문이라 부른다. 이두문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열여전 하희(列女傳 孽嬖 陳女夏姬)편 에는 시경 용풍 체(재)동“詩經 鄘風 蝃蝀”을 인용한 문구가 있다. 채동이란 편명는 <벌래(거미)가 먹이를 잡으려고 줄로 망를 처 (蝃, 螮)놓았던 덭에 벌래 (벌래 충)가 걸린 현상(蝀, 音東。 螮蝀,詳螮字註。音董)이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추어 뚜렸하게 나타난 상형을 묘사한 복합 글자다[1]. 시경 비풍 일월( 邶風日月)에도 보이는 내어지인혜 (乃如之人兮, 乃如之人也)란 문구가 있다. 이는 <너어(乃는 汝로. 汝也。奴亥切. 한국 지방어로 너를 니, you라고도…..
환인(桓因)이 옳은 글자: 삼국유사 서문 (三國遺事 校訂三國遺事敘、例言) 에서 옛 책이라 글자를 확하기 어려웠다고 몇몇 실예를 들었다. 그 하나가 인(因)자 라고 했다[1].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세웠다는 사료의 근거를 위서라 하고, 왕검의 선조에 관한 사연의 출처는 <古記에 이르기를 환인(桓因; 밝음의 기원,Origin of light-opposite of darkness, 天主, 昊天上帝), 즉 제석 (謂帝釋)의 아들 환웅>이라고 했다[2]. 문맥을 보면 어떤 특정 지역 “國” 을 뜻한 글자가 아니라, 개념적인 표현으로,환웅천왕의 혈통을 의인체로 표현했다. 인(因)자는 단군왕검 백익(伯翳)을 뜻한 글자 “이 彝”자와 같이 오랫적 부터 써오던…..
이괘(利簋)명문-4: 箕子의 행적을 추적하여 찾은 조선의 위치: 기원 전 1046년에 목야전(牧野之戰)에 패한 상(商)나라는 하북평원에서 수도를 여러번 옮겼다. 반경(盤庚)이 5번 쩨로 옮겼다는 마지막 수도가 은(殷) 이다[1]. 그곳에서 상나라는 번창 했다. 기자가 패허가 된 옛 성터를 지나면서 (過故殷虛) 맥수가(麥秀歌) 를 읊었다[2].은허는 하남성(河南省) 안양 시 서북쪽 안양현(安陽縣) 으로 확인 되어 그 곳에서 많은 갑골문이 발굴 되었다 기자가 조선에 갔다 돌아 와서 주 왕실에 참배 하고 나서 옛 궁터를 지났다. 주 왕실에 참배하고 배푼 연회를 읊은 시문이 시경 소아 록명 (詩經 小雅 鹿鳴)…..
시경을 한국사람들이 풀어 보자. 요순 시절에 단군왕검이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건국 했다는 지역이 중국 산서성 해지 연안 이라고 논증 했다. 그 당시에 부르던 노래를 묶은 책이 유목민의 민요라 하여 毛詩라 했다. 시경 특히 국풍에는 고조선 역사가 많이 숨어 있다. 서주를 건국한 주족은 고조선 발생지에 살던 사름들과는 언어가 다르다고 시경에 실린 문구를 근거로 논증 했다. 언제인가는 시경을 한국사람들이 다시 풀이 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한학을 많이 하신분들 은 어떻게 생가 하시는지요? 협조를 바랍니다. 여기 하나 더…..
利簋-3: 利簋銘文은 어순이 다르다. 필자는 옛적에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은 한글 어순과 같은 언어를 썼다고 논증 했다. 그러나 利簋銘文은 어순이 다르다. [서주를 세운 부족은 함곡관 동서쪽 한수 (漢水沔水) 연안에서 들어온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었다는 증거다. 孟子 梁惠王下: 「昔者大王好色,愛厥妃。《詩》云:『古公亶甫,來朝走馬,率西水滸,至于岐下。 爰及姜女,聿來胥宇。』當是時也,內無怨女,外無曠夫。王如好色,與百姓同之,於王何有?」 added: 2024/3/02.] 함곡관 동쪽에서 옛 구주(九州)영역에 들어온 주 무왕의 아들 성왕의 지시에 따라 영백 (榮伯)이 그 지역에 살던 쟁인을 시켜 청동으로 괘를 만들었다[1]. 이를 만든 쟁인을 주 선왕 때는 산서성 지역 쟁인을 잡아다 노예로 궁정에서 금문을 색인 토록 했다. 강희 자전…..
利簋-2: 제터 단자를 박달나무 단자로: 선공(旜公)이라고 풀이한 글자는 https://ctext.org/zh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금석문 이나 갑골문에 없었다. 이 글자 “旜”를 강희자전 에는 주예(周禮)에 있다 하나 보이지 않고, 그 문구를 “通帛為旃”라 했다[1]. 깃발 전(旃)자를 “旜”자로 바꾸어 사용 했다. 그 글자에는 큰 붉은 빛(大赤)이란 뜻, 즉 떠오르는 아침 해를 그린 단(旦)자가 있다. 붉은 색을 서주를 상징 하는 색으로 사용했다. 중국사람들이 경사스러운 행사에 붉은 색을 즐기는 시원이 되었다고 본다. 목야전 당시에는 “旜”이란 상형 글자 가 없었다는 증거다. 이괘에 나타난 금석문자는 어느 누가…..
동북아시아 상고사를 연구에는 서주 무왕이 풀어 주었다는 기자(箕子)를 연구 해야 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처 무왕의 지시로 만들었다는 금석문 “利簋銘文”을 살펴 보고자 한다. 珷征商,隹甲子朝,歲鼎克昏,夙有商。辛未,王才闌啟,易又吏利金,用乍旜公寳尊彜-중국 필자의 글자 배열은 다음과 같다:끝에서 4번쩨 글자(旜公)가 단(壇)자다. 珷征商隹 甲子朝歲鼎, 克昏夙有商。辛未,王才闌啟易, 又吏利金用 乍旜公寳尊彜. February 16, 2019
시경 소남 추우 詩經 召南 騶虞: 추우(騶虞)는 명사수, 즉 활쏘는 사람의 웃사람, 또는 복수로 활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우차호(于嗟乎)는 옛 말로 감탄의 격려사다[1]. 우/어차(于嗟, 於嗟)잘했다는 뜻이다. 암퇘지 숫돼지(豵,豝)로 표시한 글자는 해지연안에 살던 원주민을 돼지(豕, 豚, 亥)들이라고 비하 해서 “遼東豕, 三豕涉河”란 문구가 나타 났다. 홍수가 범람 했던 옛 구주(九州)땅, 즉 고조선 지역에 들어와 성장 한 소위 서주의 성강지치(成康之治;기원전1017년-기원전961년)시절에 그 곳에 살던 원주민 소탕 (屠)작전을 찬미한 시문이 시경 벌단(伐檀)과 같이 소남 추우 (詩經 召南 騶虞)다[2]. 필자의 설명을 참고하여 원문을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彼茁者葭、壹發五豝。于嗟乎騶虞……
Etymology of Han Commanderies Abstract: The Four Commanderies of Han漢四郡 is one of the most bitter pills to swallow for the Korean. It is a manipulated name for the benefit of Han invasion and widely advertised names along with the Great Wall in the history of Northeast Asia. As of many other names written with Chinese logograms, scholars ought to please the Chinese Emperor under the Confucian value. They used derogatory names to their rivals. Any of the names of Four Commanderies weren’t provi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