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이편 웅녀자(熊女者)의 뜻 . 사기 5제본기에 나온 유웅(有熊)이란 글자에서 왔다. 황제로부터 순임금과 우왕에 이르기 까지는 모두 성이 같고 국호는 다르다 (黃帝至舜、禹,皆同姓而異其國號). 황제가 유웅(黃帝為有熊)이고, 우왕은 하후란 별도의 성이 있다. 성은 사씨 (帝禹為夏后而別氏,姓姒氏)다[1]. 죽서기년에는 황제 즉위 원년에 관복제도를 실천하고 유웅에서 살았다[2]. 군서치요에는 황제의 성씨가 공손 (公孫)이고, 나라이름이 유웅국(有熊國),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했다. 천진-당산 일대에 군림했던 성씨다. 왜 우왕을 융우(戎禹)가 성씨가 둘 인가는 앞서 설명한 다제다능한 동이부락의 수령 (東夷部落的首領) 백익 (伯益) 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을 합리화 시킨 문구다. 성이 같다는…..
일차사료의 풀이에 모순-3: 삼국지에서. 서진(西晉, 265년-317년)의 진수(陳壽; 233년-297년)가 편수한 삼국지 또한 동진(東晉)의 배송지(裴松之372년- 451년)가 주를 달아 어디가 일차 사료인가를 구별 하기 어렵다. 더더군다나 그가 살 당시에도 <옛 경전에 실린 백여 만자 (百餘萬言)를 바꾸어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하는 학풍이 춘추필법에 힘입어 핵심이 되는 많은 글자를 은밀하게 기록 했다. 그러나 진수는 출처를 많이 밝혀 비교해 볼수있는 사료를 제공 했다. 그의 진술이라고 인식되는 일차사료를 몇몇 살펴 보기로 한다. 서문(序文)을 다른 사람이 썼다고 볼수는 없다. 동이전 서문에 선비(鮮卑, 朝鮮의 卑賤한 평민이란 뜻)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학술 토론을 하기에 앞서 우리민족의 첫 국가 이름 부터 확실히 밝혀야 마땅하다. 흔히들 부르는 단군조선이란 이름은 일차 사료에는 없다. 일연스님이 인용한 <위서 (魏書云)에는 (후에 나타난 위만조선 보다 옛적에 있었던 조선이라 하여) 고조선 즉 왕검조선 이다> 라고 밝혔다: 그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시경 <시간 (斯干)이 다스리던 부족과 같은 혈통을 한 사람들이 세운 옛 조선이 왕검조선이다. 신비스럽게 잉태하여 태어난 아들이 단군왕검>이라고 했다. 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제사장 왕검이란 뜻의 복합명사다. 왕검을 잃은 뒤에는 (이름을 알수가 없는) 제사장(壇君, 禮君, 慰禮)이 조선을 다스렸다…..
중국의 전사사(前四史)중에 사기와 삼국지가 일차 사료다. 사마천의 사기는 발표된 당시부터 어용학자들의 시비거리로 가필 수정이 많이 되었다. 다행이 사마천은 “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황제로부터 태초 까지 (太初; 前104年—前101年) 130편이라고 밝혔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의 사기 여러 곳에 저소손 (褚少孫)이 가필 했다(褚先生曰)는 증거가 나타나고 창해군 지역에 나타난 공손도의 혈통이 신흥유학파의 실천자 평준후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인식을 남긴열전 (平津侯主父列傳) 에는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 기원 후 32–92)가 이르기를 하는 문구가 있고, 사마천 이후 사람인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 의 이름도 실려 있다. 한무제는 진시황과 같이…..
일차사료의 풀이에 모순-1. 잘못 풀이 한 원인은 크게 3가지 좀더 구체적으로는 6가지 였다. 당대의 석학이 춘추필법으로 작성하여 일차 사료가 혼미 하다: 사음을 훈역으로 풀이: 어순을 잘못 풀이: 五胡十六國이란 고조선(東胡, 胡)의 후손이 15개 나라를 만들어 다투던 시절이란 뜻이다. 이 시대를 漢族으로 알려진 수문제가 통일 했다. 수나라 때 부터 북쪽 언어(胡)를 이해 하려는 음운사전을 만들고 그때 부터 옛 글자 풀이를 달리 했다. 남족이 만든 사전에 따라 북쪽 언어(胡)를 잘못 풀이 하여 인용: 띄어쓰기의 인식이 결여: 이를 이해 하려면 육서(六書)라고 하는…..
마땅한 반론 입니다. 저가 증거를 재시 하면 받아 주겠습니까? 아니 증거를 보아야 답을 하지….. 이렇게 시비는 합리적으로 시작 되어갑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어느 한 쪽도 양보 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기란 극히 어려운 문제 입니다. 하여 2년전(Oct 10, 2016 6:05pm)에 “발조선(發朝鮮)의 선조가 홍산-하가점하층 문화를 이루 었다.”라는 표제 로 짧은 글을 올렸습니다. 다음주에는 홍산문화레 관한 토의가 있다고 하니 다시 올려 드립니다. 발조선(發朝鮮)의 선조가 홍산-하가점하층 문화를 이루 었다. 저가 역사 인식론에서 한…..
앞으로 몇차례에 걸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창해군이 있던 발해만 서남쪽 천진 일대를 중심으로 해안에서 발생 했던 사건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필자의 계획은 그러나 우선 시대와 장소를 판가름 하기가 어렵게 문장을 작성 했다. 그 한 예가 진수의 한말(漢末)이란 표현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Goal the goalpost”란 술어가 유행이다. 같은 시대에 장소만 바꾸어도 풀이는 가능하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상고사 기록에는, 특히 고조선의 변천 과정을 밝히려는 사료를 찾아 보면 많은 경우에 시대와 장소 그리고 방향 마저 혼미하게 여러 글자와 문구로 그려 놓았다. 불행중 다행으로 글자…..
창해군에 얽힌 비밀-2: 부여 고구려 백제의 상호 관계: 동명성왕(東明)과 추무왕의 관계: 동북아시아 고대사 중고(古代史 中古, Mid-Antiquity)라 <부여, 고구려, 백제의 상호 관계가 모호 하다. 옛 말에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하는 질문을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실마리를 각국의 시조에 관한 기록에서 찾아 추리 했다. 동명성왕(東明)과 추무왕에 관한 기록: 동명성왕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고전기(古典記)를 인용 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동명이 추모왕의 라고 했고, 제 3대 태무신왕 3년(기원 후 29년) 에 동명왕조(立東明王廟)를 세웠다. 태무신왕은 수도를 동서 두 곳에 정하고 국토를…..
묻혀 있는 비밀을 앞으로 몇 차례에 걸처 발해연안부터 설명해 간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진시대의 역사 기록을 보면 발해만 서남쪽 해안이 한해 (翰海)의 관문이 였다. 사마천은 북해(北海)라고 했다. 그 곳에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오랫동안 살았다. 창해군(蒼海郡)에 관한 내용을 살펴 보면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나오는 창해지군(滄海之郡)이 원조다[1]. 이를 춘추번뇌에서 흐르는 물의 끝이 창해(流水之宗滄海)라 했다[2]. 그 지역으로 모든 강물 (海河, 黃河)가 흘러 들어 갔다. 발해만 서남쪽 연안이 분명 하다. 삼국지 동이전과, 오주전(吳主傳)에서 본바와 같이 그 유역에서 삼한의 후예들이 한해의 동서 해안으로 흐터져 나갔다……
중국기록에는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에 나오는 해모수 (解慕漱), 그의 아들 해부루(解夫婁), 그리고 금와(蛙, 蝸)란 이름이 없다 . 한서 지리지와 통전에 나온 개마(蓋馬: 蓋; gài gě hé音合; hé gě) 란 이름을 비교해 보면, 해모(解慕) 같은 뜻이 분명하다. 수(漱)자는 도망을 간 지도자 (澣)란 뜻으로, 현토군에 있던 서개마현의 지도자 해모수 (解慕漱)를 뜻했다 . 흑(黑; [hēi] hēi hè/흐어/해) 자 해(解)자가 모두 해(sun, sun-ray)를 사음한 글자(蓋音合)와 같은 사음자다. 고구려와 부여는 현토군에 있는 선비산(鮮卑山)으로 증명된 의무려산 (醫巫閭山)이 있던 곳에서 나타났다. 조양시 동쪽에서 북진시 서쪽에 있는 높은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