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이 많은 시법(諡法, 謚法)과 익기(謚記): 동한 말기에 편찬된 풍속통의 황패(風俗通義 皇霸 )편에는 “謚; 웃을 익, 시호 시”라고도 읽는 예기익법(禮記謚法)란 문구가 삼황(三皇)과 삼왕(三王)에 적용된 이름으로 실려 있다 . 예기(禮記)와 풍속통의에 실린 내요의 공통점은 시(謚)자가 삼황오제(三皇 五帝)때 부터 있었다. 시/익(諡, 謚)자는 다. 익법(謚法)이란 백익(益)이 살아 있던 시대의 율법이고, 시기(謚記)란 율법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뜻이다. 시( 諡)자와 식초란 뜻의 초 혜(䤈)의 어간이 되는 “㿽;xī same as奚; xī xí / hei. 何也”자는 선진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고, 금나라 때 한도조 (金; 韓道昭)가 편집한 오음집운(五音集韻)에 작은 주발(小盆;…..
부여시조 동명왕이 백익 (伯益)의 후손: 단군왕검 백익 (伯益)에서 “동아줄 삭, 찾을 색, 구할 소색(索)자”를 징검다리로, 동명의 출생지 북리색리국 (北夷索離國)과 연결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백익 (伯益)의, 제왕 만이 자칭하던 이라는 뜻(𠍳作朕虞。𠍳,古益字。《應劭曰》𠍳,伯益也)이 있다 .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문에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고, 성은 이씨(伊氏) 휘가 익(諱益), 자는 토개(字隤敳)라 했다 . 사전에는 <저 늙은이 란 뜻의 이기(伊耆)는 옛 왕자의 호(古王者號)라 했다. 백익(伯益)이 납향제(臘享祭)를 시작 했다. 납형 사(蜡 )를 삭(索) 이라고도 한다 . 납향제는 겨울이 끝나는 시절, 즉 동지후 세번쩨 XX날에 천자가…..
산서성 역사 진세가(晉世家): 세 쩻 장: 산서성 사람들이 한글 어순을 썼다: 필자는 동양역사 연구방법으로 “사서에 의존 하기보다는 글자 풀이(解字)와 시경 (詩經)에 무개를 두어야 한다. 한자(漢字)에는 동양 상고사가 숨어 있다”고 역설 한다. 한자(漢字, 韓字)에는 동양 상고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한학을 하신 분들은 다 알고 있다. 시경(詩經)을 모시(毛詩)라고도 한다. 그 내면에는 “소가 우는 소리, 馬/牟; móu mù mào” 라고 기록 되여 오던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부르던 노래란 뜻이 있다. 목야 (牧野)전쟁터가 그러한 사람들이 살던 들판이란 뜻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이곳을 무야(坶野)라고 했다……
산서성 역사 진세가(晉世家): 첫 장: 부루무송백(附無松柏): 앞에서 중국 사료 속에서 는 논증을 했다. 퇴개(隤敳) 라고 부른 이름자에는 백익이 산서성 하동군에 살던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퇴성(穨城)이란 글자는 이란 뜻이라고 논증 했다 . 고조선의 핵심부 였던 산서성(晉)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이 공자 (孔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님 살던시대가 되는 춘추좌전 양공 (襄公 二十四年; 기원전549)편에 잘 나와 있다 . 춘추오패의 두 쩨 진문공(晋文公, ? ∼ 기원전 628년) 이후 남쪽에 있던 초장왕(楚 莊王, ? ~ 기원전 591년) 이 세번 쩨 패자로 등장…..
단군조선의 첫쩨 임금 백익(伯益)-3 보충 했습니다. 상서에는 마땅히 백익(伯益)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없다. 백익(伯益)을 음이 같은 익을 이로 바꾸어 썼다. 상서 순전에 사제권을 일임 받은 나오는 백이(伯夷)이 백익(伯益)이다. 帝曰:「咨!四岳,有能典朕三禮?」僉曰:「伯夷!」帝曰:「俞,咨!伯,汝作秩宗。 앞장에서는 백익(伯益)이 제우하후씨(帝禹夏后氏)로 부터 합법적으로 지도권을 인수 받았다고 밝혔다. 하우씨의 후손이 중원에 위국(魏國)을 세웠다고 논증 했다. 사기 진세가에는 그들이 순임금의 후예였다가 우왕의 후손을 받아 드려 하우씨의 후예라고도 한다. 그 밖에도 여러 지도자의 후손과 인척 관계를 맺아 살았다. 서쪽에서 온 유목민이 양자강 이북 중원 일대에서 북으로는 외몽고 만주 일대로 퍼졌다는 뜻이다 ……
단군조선의 첫 왕검 백익(伯益) 중국기록에 따르면 요순 시절에 나타나는 여러명의 공신 중 한 사람인 익 (益)이 舜 임금으로 부터 사제권을 위임 받은 백익(伯益)이다.[1] 사마천의 대완열전에 따르면 “우본기(禹本紀) 를” 읽었다. 높은 하늘에 있는 “빛을 숭산하던 사람들이 서쪽 곤륜구 (崑崙丘)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왔다.[2] 신흥 유가의 지침에 따라 편찬된 사기 하본기에는 백익(伯益)이 정치적 지도권을 이양 받아 우의 삼년상을 치루고 지도력이 약하여 제후들이 떠나 왕위를 우의 아들 계(啟)에게 선양하고 기산에 은거 했다.[3] 그러나 묵자(墨子)에 따르면 백익이 국토의 북쪽지역에 자리를 잡고 구주를 완성 시켰다 ……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11 끝: 금조선(今朝鮮)의 종말: 앞에서는 <급총주서가 발굴된 해에 숙신씨가 효시(肅慎來獻楛矢石砮)를 바쳤다. 고구려 제13대 서천왕(西川王)이 재위 (270년~292년) 하던 때다. 숙신씨가 반발하여 동생 달가 (達賈)를 시켜 숙신씨의 본거지인 단로성(檀盧城)을 점령했다. 졸본부여가 있던 지역을 금조선(今朝鮮)이라 했다 . 이 곳이 친위왜왕비미호 (親魏倭王卑彌呼)가 살던 곳이다 . 이를 통전에는 한말 공손도 덕택에 위진 시대에 그 땅을 얻었다고 했다 . 삼국의 뒤를 이은 서진 역사책(晉書)에 나어는 조선(朝鮮)은 발해만 서쪽 갈석산 일대를 의미 했다. 오호십육국시대 전연(前燕)의 제1대(초대) 황제가 된 모용황 (慕容皝, 297년 ~ 348년)을 조선공(朝鮮公)으로 봉했다 . 모용씨…..
한국 상고사를 다루시는 분들 께서;는 필자의 논지를 설명 하기에 앞서, 그 뒷 배경을 간단히 전해 드림니다. 다음은 봄에 얼렸던 입니다. 한무제가 조선을 친입 하여 사마천이 조선 열전을 편찬 했고, 그 다음 후한 말기에 진수(陳壽, 233-297년)가 옛적 뭔 낙원 땅(遼寧)이라 하던 남만주 땅에 들어가 현지 답사를 하고 삼국지 위지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편찬 했다 . 이유가 뚜렸치는 않으나 현존하는 삼국지에 실린 글자 수의 반 이상이 동진(東晉) 말 -북송(北宋)의 배송지(裴松之, 372년-451년)가 주(注)를 단 글자다. 특히 열전에는 보인다 . 그러나 이 두 사서가…..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10: 금조선(今朝鮮)을 찾아-1: 중국 전사사(中國 前四史書)를 읽다 보면, 여기 저기에 조선(朝鮮)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산해경 해내경 (山海經 海內經)에 실린 조선(朝鮮)은 산서성 해지 연안이라고 밝혔다. 해내북경 (海內北經)에 실린 조선은 정확한 위치와 시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발해만 서쪽 연안이라고 본다. 삼국지(三國志)에는 “오늘의 조선今朝鮮” 하는 구절이 있다 . 당나라 때 요사렴(姚思廉)이 부친의 유명에 따라 양서(梁書)는 중국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 시대의 역사를 기록 하면서 “魏時,朝鮮以東馬韓、辰韓之屬,世通中國”는 문구를 남겼다. 그 시절에는 조선, 마한, 진한 하는 이름이 없었다. 조위 시대(魏時) 진수가 말한 금조선 동쪽 한 반도…..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9: 고구려의 전성기-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 전투: 진수는 동이의 최 강국으로 고구려보다 우세 했던 대륙백제는 존제성 마저 부정하려 노력 했다. 그러한 의도에서 후세 사가들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과대 평가 했다. 장수왕이 남만주를 통일하고 손자 나운(羅雲)이 뒤를 이어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 491년- 519년) 부터가 고구려의 전성시대다. 그 뒤를 이은 고구려 왕들은, 수 문제 양견(隋文皇帝 楊堅, 제위:541년- 604년) 이 589년에 5호 16국 시대를 평정 하고 중원을 하나로 묶을 때까지, 오합지졸에 빠진 중원의 북부로 진출하여 동북아시아 최대의 강국을 이루었다. 24대 양원왕 (陽原王, 재위 : 54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