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8: 평양 (平壤)은 동천왕(東川王)의 임시 수도: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이 주살 당한 이후247년에 관구검 (毋丘儉; ?- 255)이 침략 하여 패허가 되였다. 환도성을 수리하는 동안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248년)은 옛 숙신씨가 쓰던 졸본부여에 있는 선인 왕검이 살던 평양성(平壤城, 都王儉)을 수리하고248년부터 그 곳에서 살았다 . 서남쪽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곧 그 곳을 떠나 광개토대왕 시대 402년 까지 환도성(丸都城) 에서 수비를 했다. 미천왕이 대군을 인솔하여 302년에 현토군에서 포로 8,000명을 잡아다 평양에 살게 했다. 그 많은 포로를 수도에 살게 했다고 볼수는 없다. 평양이 수도가 아니라…..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7 선인 왕검이 살던 곳 평양(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이 어디인가? 제야 사학계에서는 흔히들 고 한다. 이는 필자가 한 논지와 일치 한다. 필자는 요사 지리지에 나오는 양평현(平陽縣)이 한서 지리지 현토군에 속했던 고구려현의 수도라고 본다. 그 현의 장소는 요사(遼史)와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내용을 분석하여 오늘의 북진시 일대였다고 밝혔다. According to the Tang era encyclopedia, this region had been a part of Bian Zhin (弁辰韓) and produced salt. The “Salt Prefecture鹽縣” was the “Dunyu Prefectures屯有縣” and one of the prefectures in the Han era Liaodong (遼東) County. It…..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6 공손(公孫)씨가 어떻게 양평성(襄平城)을 점령 했나? 고조선 지역의 통치 형태를 감안 하여 한마디로 표현 하면, 부여(扶餘, 夫餘)를 다리(connecting bridge)로 고구려와 백제, 왜(倭, 汗, 韓)를 혼용 했다. 뚜렸한 자치주였던 졸본주 (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라고도 알려진 삼국사기와 삼국지에 나타난 가구 수를 감안하면 고 풀이 함이 합당 하다 : 부여의 총 인구가 8만호(戶八萬), 고구려가 3만호 (戶三萬) 예전에 2만호 (濊傳:戶二萬)였다. 한전(韓傳)에는 50여국이 있다. 큰 나라가 1만 여가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에 총인구가 10만여호 (總十餘萬戶)였다. 발해만 서쪽으로 판명된 변진전에는 큰 나라가 4- 5천가구(四五千家), 작은 나라는 6-7백 가구(六七百家), 총…..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5 고조선 지역의 통치 형태: 통치형태와 체제의 운영에 관해서는 옛부터 깊히 다루어 왔지만 아직 정답을 찾지 못한 어려운 문제다. 이러한 심오한 문제는 주어진 시대와 장소 여건에 따라 그에 합당안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당연한 명제 (命題)다. 이 어려운 문제를 주 무왕이 기자에게 물었다 . 후위성제(後魏成帝)는 이윤유서(彝倫攸敘)란 뜻이 누구나 이해 할수 있는 상식적 판단(Situation ethics, Common sense ethics)이라고 풀이 했다. 누구나 실천 해야하는 명제를 동양에서는 병법(兵法)으로 다루었다. 손자벙법 번역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서양에서는 미학 (美學, Art)의 범주로 인식 했다. 이성과 감정이 결부…..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4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을 공손도가 사용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본기(新羅本紀第一, 二, 三)에만 금성(金城)이 나온다. 공손씨가 대륙백제를 업고 한해(북해, 발해- 요동만)연안에서 번창 할 때는 금성(金城)이란 글자가 사라졌다가, 삼한의 후예들이 옛 땅을 되찾으려는 시대부터 다시 나타난다. 금성(金城)은 옛 진시황의 선조들이 자리 잡았던 감숙성 통로에 있던 요새였다 . 오랫 동안 가한의 철옹성(金城諸韓)이였다 . 한무제가 영토를 넓힌 이후에는 방어에 좋은 지리지형에 진을 첬다는 뜻에서 금성지고 (金城之固)란 숙어가 나왔다. 공손도의 뒤를 이은 공손연은 신라(新羅)수도 금성(金城)을 본거지로 연왕 (燕王) 이라고 자칭 했다. 그를 처벌하려는 계획을 토의하면서…..
이서국(伊西國) 이씨(伊氏)의 원조가 단군 왕검 백익(伯益)의 성으로 밝혀저, “August 5, 2017”에 올렸던 글을 보충 하여 다시 올립니다. 위키백과에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발표에 따라 여기 까지는 필자가 살펴본 내용과 일치 한다. 그러나 다음에 따라 붙은; 는 문구는 이해 할수가 없다. 일연 스님은 출처를 밝혔지만 이서국이 있던 곳을 잘못 풀이 했다. 첫쩨: 시대 판별에 혼란이 왔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제 3대 노례왕 14년(弩禮王樸弩禮尼叱今一作儒禮; 제위 24년-57년)인 38년에 이서국 사람들 (伊西國人)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 스님은 시조 박혁거세 부터 3대 노례왕까지의 내력을 했다. 건국초기라 고란(苦難)이 많았다……
남만주의역사-2 주몽이 떠나서 도착한 곳이 현제 지도에서 확인 되였다. 그가 오이 마리 협부 (鳥伊,烏伊、摩離、陜父)등 세 친구와 같이 요하를 건너 심양-요양 일대에 정착 했다 .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벌써 먼저온 사람들이 부여란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주몽이 (졸본에서)부여의 통치권을 계승 했다 . 주몽의 친구는 상서에 여러 글자로 나오는 사리(四夷; 嵎夷. 鳥夷, 烏夷, 牟夷)의 사음 대자다 . 이러한 추리는 후대에 나타나는 전쟁 기록이 학인해 준다. 앞에서 거론한 요하를 하는 여러 사료가 증거다 . 이러한 기록은 는 증거다. 동북 아시아에 관해 뚜렸한 기록에 없다…..
낭랑(樂浪)에 얽힌 사연 (事緣)들-추가 어떤 연유로 낙랑이란 이름이 난하(滦河) 유역에서 나타났나? 상고사를 여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갖게되는 질문이다. 아랫글은 지난을 보충 설명한 글이다. 결론부터 예기하면; 옛적 요수(樂水)를 요수(樂水)로 바꾸어 낙랑이란 이름이 오늘의 난하(滦河) 유역에서 나타났다. 유가에는 명석한 사람(知者)과 어진 사람(仁者)을 비교 설명 할때 요산 요수(樂山 遼水)란 표현을 자주 써왔다. 공자님이 제자 옹(雍, 冉雍,字仲弓) 에게 답한 논어 (論語 雍也)에 실린 한 문구다 . 옥편에는“樂”를 흔히들 이라 훈독하는데, 이 문구에서는 로 읽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고구려의 천도(遷都):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삼국지 동이전은 남만주 수계(水界,Watershed)에 국한된 지역을 다루었다. 하여 고구려와 부여 왜에 관한 역사를 설명하면서 남만주의 역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고구려의 첫 수도가 있던 졸본부여는 오늘의 심양-요양일대 라고 밝혔다. 나당 연합군에 함락 당했던 마지막 수도 평양성(平壤城)이 어디였나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졸본(卒本)이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홀본(忽本)으로 나온다. 이곳을 흘승골성(Citadel in the Holseunggol, 訖升骨城) 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이름자들이 모두 원음을 일저리 두섞은 한자로 기록 (假借轉注, PLCs and PSMCs)하여 정확한 뜻과 음을 찾기 어렵게 되였다. 옛적에는…..
서론-1: 고구려(高句麗)의 어원과 발생지 고구려(高句麗)의 어원: 앞에서 여러차례 밝힌 바와 같이 만주에 살던 사람들의 선조는 황하문명의 발생지인 산서성 해지-분수 일대에서 옮겨 왔다는 사료를 찾았다. 문헌을 살펴 보며, 고구려는 이다. 한때 전한(前漢)의 외척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기원후 25년)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 8년 ~ 23년)나라를 세웠던 왕망(王莽) 은 높다는 뜻을 아래 하(下)자로 바꾸기도 했다 . 구려(句麗)와 같은 부족을 음이 같은 여러 글자로 기록 하기도 하고,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 오늘 <려(麗)라고 읽는 글자는 옛적에는, 검을 려, 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