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옛적 한국(汗國)의 풍속: 부여전에는, 현토군에서 나타나 공손도(公孫度, ? ~ 204년) 부터 공손연이 멸망하고 관구검이 고구려 국내성을 분탕치고 돌아간 시기 까지의 역사가 위서 30편 전반에 실려 있다. 부여(夫餘)란 이름이 사기와 한서에 나타나니 늦어도 후한서 동이전에는 부여의 역사가 실려 있어야 한다. 삼국지 부여전의 역사를 되풀이 하면서, 동명왕의 설화와 관련시켜 북이삭리국 (北夷索離國) 에서 나왔다고 했다 . 이 문제는 고구려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 편에서는 간단히 한국 풍속의 몇가지를 다루기로 한다. 고조선의 동쪽지역에 살던 사람들 한국(汗國)의 고대 풍속이 처음으로 전사사 (前四史)의 마지막이…..
서론-4:부여의 종말 (終末): 산서성 해지연안에 나탄났던 단군조선의 후예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만주 땅으로 옮겨 와서 새로 정착하고 사는 사람들을 부여전에는 쫓겨온 사람들(亡人) 이라 했고, 고구려 사람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亡人)는 의지에서 개천절을 (東盟)이라 했다 . 시경 한혁에 “그추그맥(其追其貊)을 모시정의에서는 한후의 선조들이 점차로 밀려 갔다”고 풀이 했다 . 중원 세력 북쪽에서 항거하며 밀려온 부족이다. 다른 한 줄기는 중원으로 내려가서 상나라에 깊히 관여했던 부족이 만주로 올라와 부여전에는 상나라를 뜻하는 은(殷正月祭,其國殷富)자가 나타 났다. 나라의 이름, 영역, 도착한 경로, 발생 시대, 부족이름 등등이 모두 여러가지로…..
부여(扶餘)의 어원: 전국시대 이전에도 사마천이 부여(夫餘)라고 불렀던 부족은 있었서야 한다. 이를 필자는 첫 영문본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Chapter 9. Trail of Gija Clan 箕子族” 에서 <상나라의 제23대 왕 무정(武丁, 高宗: 기원전 1250년 -기원전 1192년)이 산서성 해지 연안 부암(傅巖,不咸山)에서 노예로 성을 쌓던 사람을 찾은 즐거움이라 하여 그에게 부열(Buyuel傅說. 傅說 Fùyuè )이란 별명을 주었다. 그를 등용하여 상나라는 크게 번성했다. 부열의 후손들이 상나라 서울 근교에 살면서 높은 직책을 맡았다. 마지막 제상을 지냈던 부열의 후손이 기자(箕子) 였다. 상나라가 망하자 피난민들은 기자(箕子)를 따라서…..
부여전(夫餘傳)-1: 서론-1: 부여(夫餘)의 발생지와 영역: 사기 소진열전에 연 문공(燕文公;?-기원전 333년)이 연의 영역을 설명 했다: 고 했다. 전국책(戰國策 燕策)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같은 저자가 화식 열전에서는 고 밝혔다 : 같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흉노열전 에는 동호 호(東胡, 胡)라 했고 좀더 세분 하여 오제본기에서는 발 산융 숙신 (山戎、 發、息慎), 발해만 서쪽 해안에는 기조선(暨朝鮮)이라 했다. 그 곳을 관자에서는 발조선(發朝鮮), 그 지도자를 북주후 (北州侯)라 했다 . 이를 상서정의에서는 중원 구주 (九州) 밖이라 하여 여주(餘州, Extra-state) 라고도 했다 . 전국시대 까지는 부여(夫餘)란 이름이…..
가야의 시말 소고(始末少考):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가야를 아래와 같은 한자로 기록 했다:伽倻國: 伽倻, 加耶, 伽耶, 駕洛, 加洛, 加羅, 伽羅, 迦羅, 임나(任那), 가량(加良), 구야(狗耶)가 있다. 그 곳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이다. 옛 창해군(滄海郡)이 가야의 탄생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김수로왕(首露王)이 신라 초기에 나타났다. 가락국(伽落國,伽耶)은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만주 해안선에 흐터저 이를 삼한이라고 부르던 동서 양한 교차기에 나타 났다 . 광개토대왕비문에 색인된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발해만 서남쪽 해안선에 있었다고 풀이 했다 . 역사의 흐름을 감안하면; 다. 그를 뒷바침 할수 있는 사료가 삼국지 오환전과 관구검전에 실려 있다…..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4: 한해(翰海)의 동서쪽-2: 한해의 서쪽 해안: 한해의 서쪽 통로인 중국 동해안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동오(東吳)수장 손권이 호위 (胡衛)를 특사로 조위를 치려는 계획을 상의 하려는 목적으로 236년 봄에 만주에 있던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十年, 재위: 227년– 248년) 에게 보냈다[1]. 이 사건을 진수는 위약에서 인용 했다고 밝히 면서 고구려가 아니라 238년에 공손연 (公孫淵) 에게 <장미(張彌)와 허안(許晏)등을> 보냈다[2].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공손연이 점유하고 있던 곳에 비미호(卑彌呼) 가 있었고, 그 곳이 비류수 연안으로 고구려에 속했던 땅>이라 한중 사서에 엇갈린 표현이 실렸다. 강남에 있던…..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3: 왜 왕실의 역사-4: 요동만에서 일본 구주로: 하/해왜왕 (假倭王) 비미호가 어떻게 하여 요동만 일대에서 일본 구주로 옮겨 졌나를 살펴 보기로 한다. 진수는 첫번쩨 비미호(卑彌呼)에 관한 예기를 사절 (Section 4) 에서 모두 마치고, 다음절 (section 5)에는 다시 한해(瀚海) 탐험에 관해서 들은 예기를 실었다 : 그가 앞에서 하우씨의 후손이 유구열도에 나타난 사연을 오태백의 후손이라고 잘못 풀이 하였드시, 선진시대 문헌에 나오는 흑치(黑齒)라는 해을 숭상 하던 사람들(解, 奚)이 새운 사라를 이가 까만 사람(person with Black teeth)으로 인식 시켜 놓았다. 여기에 나타나는 왜(倭)자는 뜻글자(Semantic…..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3: 왜 왕실의 역사-3: 가왜왕 (假倭王)의 뜻 먼 하늘 나라란 하(假 ;jiǎ jià xiá)자를 거짓 가(假)자로 잘못 읽었다: 하왜왕 (假倭王)이 국왕송양(國王松讓), 비류수상, 졸본부여, 비류국(沸流國), 비류왕(沸流王), 전라 남도 흑산도 (黑山島)와 다물도(多勿島):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지 왜인전에는 <비미호 (卑彌呼)란 이름이 여왕 뿐만 아니라 남자 왕에게도 쓰이였고, 시대적으로도 몇차래 나타 났다. 북송대 (北宋: 977년-984년)에 편찬된 태평어람(太平御覽)은 후한서(後漢書) 위지 (魏志) 남사 (南史) 북사(北史) 당서(唐書)에 실린 왜국(倭國)에 관한 사료를 종합하여 설명 했다. 그 중에 진수가 남긴 내용을 인용하면서 첫번쩨 거론된 비미호 (卑彌呼)를 한영제…..
비미호 (卑彌呼)가 살던 남만주 땅이 일본 구주로 뒤바꼈다. 왜 그렇게 되였나 하는 연유를 찾아 본다. 왜와 조위는238년(景初二年) 6월에 처음으로 사신이 왕래 했다. 조위는 그해 12 월(其年十二月)에 친위왜왕비미호(親魏倭王卑彌呼)에게 극진한 답례를 했다 . 2년후 (正始元年, 240년)에는 태수궁전 (太守弓遵)이 건중교위 제준(梯儁)을 통해서 귀한 상품과 위상을 높혀 왜는 (자세한 내용 없이 조위에)보답 했다 . 그로 부터4년 후가 되는243년(正始四年)에는 왜왕이 다시 조위에 사신을 보냈다 . 뒤에 같은 내용을 인용한 사서에는 진수가 남긴 사신들의 이름(伊聲耆、掖邪狗)이 보이지 않는다. 진수만이사용 했던 이름이다. 특히 제준(梯儁)이란 이름자는 권력 직계 후손이란…..
비미호(卑彌呼)와 비미국(卑彌國)은 남만주에 있었다. 왜인전 사절 (Sectin 4 부터 8) 까지는 왜왕실의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 했다. 이편에서는 금년 초(January 23, 2017)에 운만 띄워 올린 “왜여왕 히미/매꼬(卑彌呼) 는 백제왕이 였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 배경을 좀더 설명 한다. 신라 본기에는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54년~184년) 20년 (173년)에 왜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통해 예물을 가지고 았다는 기록이 있다 . 삼국지에는 발음이 같은 비미호(卑彌呼)가 왜여왕이다. 가까이에는 남자왕 비미궁호소(卑彌弓呼素)가 다스리던 구노국(狗奴國)이 있었다 . 한전에는 비미국 (卑彌國) 백제(伯濟國) 비리국(卑離國)등 비미(卑彌)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여러 국가 이름이 실렸다. 이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