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논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魏志) 30은 중원 북쪽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의 후예를 다루었다. 앞에서는 이를 멀리서 관찰 하여하는 제하에 고조선의 후예를 다루었다.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였던 우리 민족의 조상이 동북아시아에 이르러서는 지리지형과 문물 교류의 차이로 대흥안령을 경계로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기마유목민족의 특성을 유지하였고, 해안지대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교류의 수단이 배로 바뀌어 한해의 총치권을 잡게 되였다. 먼 훗날 한반도에 정착하여서는 를 정했다. 서쪽 사촌 기마유목 민족의 역사는 서양 사학계에서도 다루어 졌다. 그러나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역사는…..
요동태수 공손연의 지시로 233년 9월 달에 조위장수 전예(田豫)가 밀사로 온 오나라 장군 주가(周賀)를 죽였다 . 바로 다음 달 10월에는 사신을 오나라에 보내 아뢰기를 “요동태수 공손연이 손권의 번신이라 한다” 면서 중원사람들이 보물로 취급하던 남만주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오왕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공손연에게 작위를 더해 주고, 다음 해에는 공손연을 청주목 요동태수연왕 (青州牧遼東太守燕王)이란 칭호를 인정 했다 . 공손연이 받은 칭호에는 그의 영향력이 산동성 북쪽 해안(靑州)에서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남만주 요동만에 이르는 지역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이 지역이 대륙백제가 성장하던 시기의 영역이다. 이…..
공손도(公孫度)의 최후: 진수는 공손도(公孫度)가 자라온 과정을 은미하게 기술 하고, 그가 글을 쓸 당시에 사라진 공손도의 최후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필자가 가공인물이라고 보는 공손강은 출생과 사망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공손도와 간웅 조조는 같은 시대 사람이다. 삼국지 무제기에는 공손도 (公孫度)란 이름이 없고 공손강으로 나타난다. 건안 18년에는 공손양(公孫陽)을 생포하여 돌아 왔다 . 공손도(公孫度)의 최후를 공손양(公孫陽)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쪽에서 잡혔다고 연막을 친듯하다. 건안 18년(建安十八年, 213년)에는 백낭산(白狼山)에 숨었던 원소(袁紹, 153년-207년)의 두 아들 원상(袁尙,? ~ 207년 11월) 원희(袁熙, ? ~ 207년 11월) 형제가 공손강 영역으로…..
중국기록에서 찾아본 공손도의 혈통: 대방의 어원에서: 앞에서 산해관 북쪽에 있던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荷知)가 한무제 원년 (建元元年)인 기원전 479년에 사절단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이지역을 광개토대왕 비문 2면에; “왜를 뒤 쫓아 임나가라 (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 에까지 이르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한 곳이다. 대륙백제와 가야연맹, 왜의 출생지가 발해만 서쪽 연안에 있던 낙랑 대방 일대에서 나타 났다는 증거다. 백제왕 우구대가 그 곳 태수 공손도의 딸을 부인 으로 맞아 (공손도와 같이)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다 . 이곳에 살던 여러 한(可汗, 汗, 干,…..
대륙백제를 등에 업고 급성장 했던 공손씨 (公孫氏)의 시말-1: 삼국사기에는 공손도(公孫度)란 이름이 현도군(玄菟郡)에 처음 나타났다. 그 지역에 “고구려(高句驪) 상은대(上殷台) 서개마 (西蓋馬) 세개의 현”을 두었다. 상은대(上殷台)에 살던 주민을 상나라 유민촌으로 부여(夫餘)라고 기록된 곳이다. 그의 후손 구대(仇台)가 발해만 서남쪽 천진 일대에서 도망온 공손도의 딸을 부인으로 받아드렸다 . 공손도(公孫度) 다음 세대는 남만주 발해 요동만연안을 통치하는 연왕(燕王)이라 칭하다 몇달 후에 일당이 주살 당했다. 구대의 후손이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는 기록에고 불구하고, 진수는 공손씨가 한해(韓/汗/翰海)를 통치 했다고 기록 했다. 공손씨의 등이 의문에 싸여 있다. 공손도(公孫度,?-204年,字升濟,一作叔濟)에서 부터 공손연(公孫淵,…..
남쪽 사람들은 간웅 조조의 후손을 삼국의 종주국으로 기록한 삼국지에 불만을 품었다. 명나라 나관중(羅貫中, 1320년-1400년)은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를 역어 종주국을 촉한(蜀漢, 221년 -263년) 으로 바꾸었다. 고조선 영역의 서쪽에서 활동 하던 세력은 남쪽 세력과 서로 견제하며 기록을 수정했지만, 바다로 퍼저 나갔던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기록은 아무도 이론을 제기한 사람이 없고, 그들이 남겼던 기록마저 소멸 되였다 . 옛 부터 중원에서는 “하우시(夏禹氏)의 후손이 새운 나라를 높다, 천손의 후예라는 뜻을 나라 이름”으로 했다. 하우시(夏禹氏)의 후손이 하북평원에 살면서 발음이 비슷한…..
홍익 인간(弘益人間)과 홍범구주 (洪範九疇) 필자가 한국 상고사를 연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가까운 사람들이 저에게 “홍익 인간(弘益人間)이란 문구”를 중국 문헌에서 찾았느냐고들 묻는다. 필자가 알아본 한국과 중국 문헌을 토대로 “홍익 인간(弘益人間)의 기원”을 설명한다. 우 (禹)가 치수사업을 하다 밀려나 동이 수령 백익 (伯益)이 완성 시켰다 : 단군왕검(壇君王儉)이란 글자는 중국문헌에 없다. 어버지 곤의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 보았던 왕 (禹) 는 서쪽에서 온 융족(戎禹)으로 모계 혈통(성) 이 시(姒,si xi, xie)라 한다 . 사기에는 흉노(匈奴)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 순유(淳維)라는 사람이다. 당우(唐虞) 이북에 산융 험윤 훈육(山戎, 獫狁、葷粥)이 야만인으로…..
두 달전 (January 23, 2017)에 운만 띄워 올린 “왜여왕 히미/매꼬(卑彌呼)는 백제왕이 였다”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그 배경을 간단히 설명해 드립니다. 비미호(卑彌呼)와 비미호(卑彌乎) 비미국(卑彌國) 신라 본기에는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54년~184년) 20년 (173년)에 왜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통해 예물을 가지고 았다는 기록이 있다 . 삼국지에는 발음이 같은 비미호(卑彌呼)가 왜여왕이다, 한전에는 비미국(卑彌國) 백제(伯濟國) 비리국(卑離國)등 비미(卑彌)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여러 국가이름이 실렸다. 이들이 지역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본다. 낙랑 본통 한국 (樂浪本統韓國)이라는 곳이 요동 반도에 있던 최리왕 영역으로 밝혀졌다. 그 곳에서 난리(亂離)가 나서 대방 태수 궁존(太守弓遵,…..
낙랑 본통 한국 (樂浪本統韓國)이라는 곳에서 폭동이 났다. 염사치 사건과 같이 이 난리(亂離)도 한국 기록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다른 글자로 실렸다고 본다. 시대와 장소 (攻帶方郡崎離營)가 기록 되였다. 이 문구를 분석하여 현제 지명으로 언제 어디서 발생했나를 밝히려 한다. 발생 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왜가 모두 발해만 연안에 있었던 시대다. 위진 시대는 조위(魏, 220년 ~ 265년) 46년과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의 52년을 더한 108년을 의미 한다. 경초(景初)란 년호는 조위 명제 치세중“237년 – 239년”에 썼다. 공손연(公孫淵 , ?198-238)을 정벌 하던 시기다.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에…..
동백제 (東百濟)-1: 평양일대 낙랑(平壤 樂浪)유적지가 백제의 수도였다: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한 뒤에 편찬된 통전 (通典) 백제편은 대륙 백제(大陸百濟) 와 동백제(東百濟)를 섞어 기록 했다. 백제의 멸망 과정에는 대륙과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는 증거를 남겼다 . 대륙 백제(大陸百濟)는 북위 효문제(北魏 孝文帝, 471년-499년) 시절에 밀려 났고, 동백제(東百濟)는 고구려가 백제의 제24대 동성왕 모대(東城王牟大 : 479년-501년)의 수도를 격파 하여 약해저서 한반도 남쪽으로 옮겨 살았다. 동성왕 모대가 살해당하여 그의 두쩨 아들 융/사마()가 왕이 되였다.백제는 제24대 동성왕 때에 국력이 몹시 약해지고 천도를 “동백제의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겼다는 뜻이 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