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靑丘)땅을 한반도로 인식:
고구려 땅에 속해 있던 지역이라 고구려 초기 역사 기록에 실려 있어야 할터인데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입할때 “XX를 청구도행군 대총관 (為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xx는 요동도행군 총관(遼東道行軍大摠)으로 하고 수군은 (산동성 발해만 북쪽 해안에 있던) 래주(萊州)에서 떠나”하는 문구가 있지만, 고구려의 수도가 오늘의 평양이라고 인식했던 터라 청구란 지명이 어디를 뜻하는지를 몰랐다고 본다 . 삼국유사에는 청구(靑丘)란 글자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나 한반도 남단을 의미 했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청구가 우리나라를 부르는 호칭라고 인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청구영언(靑丘永言)을 비롯하여 청구(靑丘)란 이름이 한반도의 애칭으로 많이 사용되였다. 일제강점 이후에 대구에 청구(靑丘)대학이 생겼다.
왜 삼한 (三韓)이란 글자 또한 한반도 남쪽 땅으로 인식:
삼국사기에는 동성왕(東城王, 재위 : 479년-501년) 490년조에 “중국 문헌을 인용하여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년-523년)의 부친으로 알려진 개로왕 (蓋鹵王: 455년-475년)의 실체를 밝히려 여러 문헌을 조사 해 보았지만 알수가 없다”고 했다. 그 문헌중에 하나가 삼한고기(三韓古記)란 이름이 실렸다 .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개로왕(蓋鹵王) 시절에 백제는 남만주에서 밀려 중국 동해안을 따라 양자강 하류에 까지 이르는 넖은 지역”에 여러 부족 연맹을 이루고 살았다. 그 당시 대륙 백제에 관한 기록이 남제서에 있다. 발해만 서북쪽에 있던 선비족 “위로(魏虜)가 수십만 병력을 동원 하여 백제를 친입 할때 백제왕 모대 (牟大)의 지략으로 침략군을 대파”했다. 그의 조부 모도(牟都)에게 주었던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세습하도록 했다 . 이렇게 큰 전쟁을 삼국사기에는 “488년 (동성왕 10년)에 위(魏)나라 군사가 친입해 왔으나 우리 군사에게 패배 당했다”고 간단히 적혀 있다 . 당시 위나라는 고구려 서쪽을 친입하여 자주 분쟁이 있었다. 발해만 서쪽에 있던 위나라가 그 많은 군사를 끌고 백제를 침입 하였다면 두 나라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어야 한다. 중국기록에는 백제에 관한 기록이 이렇게 은미하게 실려 있어 그 진위를 확임 할수 없었다 .
진동대장군이란 뜻을 그 전쟁과 결부 시켜 보면 뚜렸하다. 대륙 백제의 통치 영역은 동부 발해만에서 산동반도 동남부를 통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를 글자만 보고 풀이 하여 역사서를 만들어 후세 사람들이 이해 할수 없게 되였다. 이러 저러한 연유로 삼국사기 편집진은 인용했다는 삼한고기(三韓古記)가 어느 지역 역사를 삼한이라 했는지 분별을 못했다.
만주에 남아 있던 진한의 한 부족(辰餘)이 청나라를 새우고 중국대륙을 통치했다. 6대 건륭황제(1735년-1796년)의 명으로 1781년에 중국여 여러 고전을 종합하여 편찬된 “사고전서조선사약 (四庫全書朝鮮史略卷一) 에는 단군(檀君, 檀君)의 기원을 제사장을 뜻하는 예군(禮君)으로 신시 (神市)시대를 통치 하던 단군을 포함 했다. 단군의 후손이 구리의 일종이고 그들이 조선을 새웠다. 백제는 가락국에서 나타났다”는 등 삼한은 모두 반도 땅에 있었다고 인식 시켰다 .
이조 말기 이규경(李圭景, 1788년-1856년)은 실학파의 명맥을 이어온 학자다. 그는 삼한이란 뜻이 어떻게 변해 왔나를 고증한 삼한시말 변증설 (三韓始末辨證說)을 발표 했다 . 그는 “시경 한혁에 나오는 한후가 주 무왕의 후손이 아니라 모성 한씨(冒姓韓氏)라 믿었고, 한후가 살던 부피한성 (溥彼韓城)이 하북성 탁군 방성현(涿郡方城縣)에 있었다는 왕숙의 설을 믿었다. 서진(西晉)말기 혜제(恵帝) 때에는 팔왕의 난(300년)이 있었고, 회제(懐帝) 때에는 이민족이 봉기 한 영가지란(永嘉 307년-312년) 일어 났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현토와 낙랑을 점령 했고 백제는 그보다 남쪽 천진일대에 있던 대방(帶方)을 점령 했다”는 등 많은 사료를 분석하여 삼한의 어원이 만주땅에 살던 구한(九韓/馯)에서 나왔다는 사실 을 인식했다 . 그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드려 역사학에 인용한 실증사학의 기틀을 만들기 전에 한국에서 자생한 실증사학의 태두라고 보겠다. 그는 실학파의 태두로 알려진 대선배 성호 이익(李瀷, 1681년-1763년)의 맥국 (穢國)에 관한 풀이를 반박 했다. 성호가 (발해만 서남 연안)에 있었던 “창해군에 맥국이 있었다. 요동에 속했었다. 그 맥국이 이조 시대 강릉(江陵)이다”라고한 풀이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틀렸다고 주장한 이유는 글자 풀이에 근거를 두고 한 예기가 아니라 상식에 어긋 나는 풀이라고 보았다. 요동에 속했던 지역에 창해군 (滄海郡)을 새웠다, (강릉이라는) 작은 읍이 군(郡)이 였다니 믿을수 없다고 했다. 지리적으로 강릉은 너무 멀리 떠러저 틀렸다고 했다 . 그는 방대한 사료를 살펴 보았지만, 중요 원인이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 연안이고, 옛 요동이란 곳이 청진 당산일대”였다는 사실을 찾지 못했다. 또한 (당시 자연과학이 아려 지기 이전이라 )해상교류의 연혁을 깊히 이해 하지 못하여 중국사람들이 선전하던 “진시황이 불사초 불사약을 구해 오라고 선남 선녀를 보냈던 곳이 제주도다. 일본이다. 진나라 사람들이 진한 땅에 왔다” 하여 진한이 경상도라고 잘못 인식 했다. 청구(靑丘)가 낙랑지구 (樂浪之丘)다는 사실을 인지 하였지만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잘못된 고정 관념에서는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 결과 삼한의 발생지가 발해만 서안이였다는 사실을 인식치 못했다. 아직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이 주장하듯 한강 남쪽이 삼한(三韓)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 그땅에는 많은 한(汗, 韓, 翰, 馯)이 다스리던 부족들이 살았다. 옛적에 강 이름은 마땅히 그들의 어원이 들어 있는 글자를 써왔다. 한반도 중앙에 흐르는 큰 강 이름은 마땅히 한강(韓江)이 였을터인데 아직도 한나라 한자 한강(漢江)이라고 사용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한성, 북한산, 남한산성, 대한문, 한양, 한양 대학.. 등등” 원한 (怨恨)의 뿌리가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고종황제가 갑오개혁을 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1910년)으로 정할 때는 남한산성의 굴욕을 벗어 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너무 짧았던 수난의 시기라 그에 따르는 기초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주권을 빼았겼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한반도에 남아 있는 한나라 한(漢)자는 다른 한(韓, 汗, 翰, 馯)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지를 지난 가을에 밝혔다.
서양문화권에서 작성된 역사에 관한 글을 “규범윤리학(規範倫理學, Normative Ethic” 에서와 같이 “기존 사료를 다룬 실증 사학”이라면, 동양문화권에서 작성된 역사에 관한 글은 글자의 특성상 그 숨은 뜻을 찾아 동양역사를 이해 해야 한다. 경험에 근거하여 상식에 따라 결정을 내린 새로운 윤리학 (Empirical Descriptive Ethics)이 개발 되였드시 “기존 사료를 근거로 상식에 따라 역사를 풀이 하는 수필 (Empirical Descriptive historiography)을 써야 한다”고 인식했던 선구자가 이규경 (李圭景)이다. 한국 사학계는 “실증 사학”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한 거름 더 나아가 이규경이 시도한 “경험(실증과학)에 의한 상식적 판단에 따라 여러사람들 이 인식 할수 있도록 한국 상고사를 서술”해야 한다.
끝
February 4,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