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ymology of China Part II 南詔
운남성에 있던 支那皇帝가 Cina 의 어원이다.
Abstract: As the leader Dangun Wanggeom (단군왕검; 壇君王儉) being assassinated, Gojoseon people spread out all direction. One to the northeast, another to the sea route from the port of Heaven (天津) throughout both side along the Sea of Hahn to the south east Asia
The third band moved through the Sichuan province(四川省, 益州) to the Yunnan Province(雲南省) and settled in the SW of China. They were the Yi People(彝族) and were conquered by the Mongol. Some of them ran away to through the Mekong River to the coastal region. They are still carry-on tradition of exodus with annual boat race.
People in the Tianjin(天津) area built many small town states such as Silla, Baekjae Wao, and Gaya confederates. They were seafarer. Silla capital was Gaelim (雞林). They moved the capital in the SW part of Korean peninsula. Another band of mariner moved down along the eastern shore of continent and stretched all the way around the SE Asian shore to the eastern shore of India.
Glorified name Gaelim (桂林) is in the Guangxi autonomous region where many minorities such as Hmong and Miao. Some of them came late and assimilated with the locals over a millennium of years. The Zhuang nationality has their own language, culture, and consider the Legendary Chiyou as the ancestor. One band of the Yaemaek people who left Tianjin port settled in the coastal region of Indo-China peninsula built the Silla kingdom where the mystical Persian prince got married to the princess Farang of Silla. Phonetic of Silla appears to the etymology of Cina, instead of China. Princess Farang is the origin of Silla Hwarang (花郞), equivalent to the Boy Scout. Kim Yu-shin (金庾信; 595 – 673) served as the head of Hwarang, Pung wol Ju.
서론: 중국사람이 지나(支那)를 영역으로 사용한 최초 기록은 당 현종 (唐玄宗: 685- 762년)이다. 유가에서 중국(中國)이란 글자를 국호로 하여 황실 사관을 확립 했다. 청나라 말기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소문 (孫文;1866-1925)은 중화(中華)민국, 뒤에는 모택동이 중화 (中華) 인민 공화국이라고 했다. 청조 말기에 장병린등 여러 지식인들이 중국을 지나 라고도 했다. 중원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온 경로를 살펴보면서 중국(中國) 과 지나(支那, China)란 이름의 변천 과정이 밝혀 진다.
본론:
중국(中國)이란 글자: 시경에 天子가 살던 경기지역이란 뜻으로 경전 문헌에 나온다. 중앙사시아 유목민이 동쪽으로 와서 동북아 일대에 흐터저 살았다. 그들이 홍산문화를 남겼다. 그 한 지류가 산서성 분수를 따라 하동에 있는 자그만 염호(salt lake) 연안에 수도를 정했다. 치수사업을 돌보던 동이수령 백익이 왕중왕 즉 왕검으로 추대 되어 제정일치 통치자가 되었다. 백익을 죽인 세력이 하나라를 세웠다. 이를 상나라가 정벌했다. 상나라 말기에 이방인 서백 창(西伯昌)이 들어와 원주민을 시켜 전설을 금석문으로 기록 했다. 첫 역사서가 상서다. 시경에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영역의 가운대란 뜻으로 중국(中國)이란 글자를 썼다. 상서 주서에는 원주민을 노예로 쓰고, 경기 (京畿)지역 에 사는 사람들을 중국민 (中國民) 이라 했다. 관자 패언 에는 왕국지형 중국지형 (王國之形, 中國之形) 이란 문구가 있고, 소광에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 중국제후 (故東夷, 西戎, 南蠻, 北狄, 中國諸侯) 모두란 문구가 있다.[1] 천자가 살던 경기지역도 때로는 몇몇 제후가 다스렸었다는 뜻이다.
흉노로 알려진 유목민은 옛부터 세 발 달린 새(三足烏)가 햇님의 정기를 타고 내려온 부족이라 하여 오손(烏孫)이라 했다. 까마귀(black bird)의 어원이다. 보일듯 말듯 아물 아물/ 가물 가물 하다는 뜻에 현조(玄鳥)라고도 했다. 이를 제비로 풀이 한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땅을 진단(震旦) 이라고 했다. 그들이 해뜨는 동쪽땅으로 올겨 왔다. 유목민의 지도자를 이민족이 훈역 하여 천자 (天子) 라고 기록 했다. 즉 일월성신 (日月星辰) 삼신 (三辰) 께 재사를 드리던 재터단자 단군(壇君)을 천자라고 했다. 태평광기 남조 (南詔) 에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 란 문구가 실렸다.[2] 우리들이 진단에 살때는 천자를 진단이라 했다 는 뜻이다. 그들이 빛을 따라 동쪽 으로 와서 홍산문화를 남겼다. 그 기록은 실전 되어 유기 백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한지류가 분수를 따라 내려와 산서성에 군림 했다. 성역이였던 해지연안을 주(周)족에게 빼았겼다 되찾았다. 서주가 동쪽으로 쫓겨가서 그때 부터를 춘추 시대라 한다. 춘추시대 초기에 서주 영역을 놓고 두 진나라가 싸웠다. 이를 삼한의 선조들이 살던 곳에서 싸웠다하여 한원지전 (韓原之戰)이라 했다. 맹자 또한 홍수로 범람하여 치수 사업을 하던 땅을 중국이라 했다.[3] 그러나 뒤에는 국(國)자를 복수로 풀이 하여 여러 나라의 중심이라 했다.
병가 오기(吳起; 440–381 BC)는 삼진자(三晉者) 즉 고조선 땅을 중국이라 했다.[4] 자서(字書 )에도 제후국 진은 진(晉, 進也)이다 산서성 북부에 중국이 있었다. 그들이 내려와서 진이 되었다.[5] 진이 셋으로 부서저 한조위(韓、趙、魏)가 나타났다. 그 위나라의 역사서에 단군왕검에 관한 기록이 실렸다. 당대의 학자로 진시황 송덕비문을 남긴 이사(李斯) 이사는 한왕에게 한거중국 (韓居中國) 이란 문구를 남겼다. 삼한의 선조들이 중국이란 땅의 첫 주인이었다.
October 25 at 9:11 AM in the Face book. ·
Etymology of China Part II.
춘추 삼전에 천자(天子) 와 천왕(天王)이란 명칭이 있다. 춘추 공양전 (春秋公羊傳); 천왕(天王)의 사신 범백(凡伯, 范伯)을 햇님의 정기를 이어 받은 천자의 대부 (天子之大夫)라 했다. 범(凡伯, 范伯)자는 홍범(洪範九疇) 의 법범(範)자를 음차한 글자다. 또한 여러 지도자를 모두 다 천자의 대부라고 했다. 이렇게 천왕과 천자의 뜻을 모호하게 설명 했다.[6]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부여(夫餘, 不與) 와 이적이 온 나라 (不與 夷狄之執中國)에 퍼져있다.” 라는 문구가 있다.[7] 좌전에는 춘추필법 (春秋筆法)을 인용하여, 여기 나오는 글자 뿐만 아니라, 이 혼란기에 발생 했던 사건을 모두 아전 인수격으로 바꾸어 풀이 했다. 조선이란 글자를 글자로 숨겼다. 같지 않다는 뜻으로 기록 된 부여 (不與)를 부여 (扶餘) 로 풀이 했다. 춘추좌전의 원조라고 알려진 국어에는 “不與”란 글자가 선비 (鮮卑) 란 글자와 같이 오직 산서성을 뜻한 진어(晉語)에만 나온다.
흉노가 지도자를 천손(天孫)이라 한 뜻을 이리저리 뒤바꾸어 도용하다 보니 아들(天子)이 아버지(天王)보다 계급이 높은 꼴이 되였다. 공자께서 실토 했다: 자공이 묻기를 춘추오패로 알려진 “진문공(晉文公: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이 실로 천왕을 불렀습니까? 모두들 선생님께서 춘추를 편술 하셨다는데, 춘추에 천왕이 하양에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옳습니까?” 하고 물었다. 공자께서 답하기를 “부하가 어떻게 주군을 부르겠나. 번역이 틀렸지 상서에도 제후들이 천자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지 않나” 하셨다.[8] 관자에 실렸던 조선이란 글자가 국어와 춘추에는 없다.
그후 급총죽간이 발굴되어 작성했다는 일주서 태자진해(太子晉解)에, [선이 사해에 미치는 지도자(善至于四海)를 천자(天子)라 하고, 통치력이 사해에 이르는 (善達于四海) 지도자를 천왕(天王)이라 한다]고 했다.[9] 도적적으로 극치에 이른 흔히 말하는 신선(神仙)으로 묘사 된 단군(壇君) 을 천자(天子)라 했다. 후에 불교가 중원에 들어와 부처님을 모시는 불당에 들어가는 정문에 무력을 과시하는 사천왕 (四天王) 상을 세웠다. 당나라 이후 五代十國 시절 중원이 여러 나라가 싸울 때에도 中國 天子 王者 이란 글자를 썼다. 천자는 상징적 지도자, 왕자(王者)를 정치적 지도자로 묘사 했다. 태평광기 남조 (南詔) 에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 란 문구는 그들이 옛 구주땅에 살때는 단군(壇君)이 사재권과 통치권을 겸한 지도자 였다는 뜻이다. 천자(天子)는 왕중왕이 된 백익(伯益)을 뜻했다.
October 28th in the Face book.
Etymology of China Part II.
3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는 황실 사관에 따랐다.
후한 초에 서역불교가 들어 왔다. 후한말 부터 동서진 교차기 불교가 번창해 갔다. 서진 말기에 불경 번역서가 나타났으나 기록이 혼미하다.[10]
동진 유송(劉宋, 420년 ~ 479년)시대 동남아로 이어지는 해상교규가 활발하여 남방불교가 들어 왔다.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편찬한 양고승전(梁高僧傳)에는 남조 송 원가(南朝宋元嘉) 6년 서력 429년에 사자국 (師子國) 스님 8명이 송나라 수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11] 사자국을 천축국의 방국(天竺旁國)이라 했다.[12] 여러 송서 양서 모두 동남아 여러 불교국가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옛 역사서는 삼한의 후예들이 발해만 연안에서 여러 나라를 세웠다가 한해 동서 해안으로 흐터져 나갔던 사실을 몰라 일연 스님은 김일제가 지니고 있던 금인(休屠王祭天金人) 불상으로 인식하여 불교가 삼한에 전래 된 경로와 시대를 혼미하게 기록 했다. 부여 삼한의 건국 시조가 불교와 관계가 있다고 설명 했다.[13]김해김씨 어느누가 가락국기 (駕洛國記)를 편찬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강남에 남쪽 해상로를 따라 들어온 남방 불교가 한반도 남단에 전래 되었다.[14]
당나라 초기에 당태종(唐 太宗 李世民: 599-649년)의 지시에 따라 현장 (玄奘:602-664년)이 서역을 다온 견문록이 대당 서역기(大唐西域記)다. 그에 나타난 불교에 관한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한무제 때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이 다녀온 천산 남로를 따라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다. 그 길로 서역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 왔다.
신구 당서에는 진단 (震旦)과 (葱嶺, 蔥嶺)이 실렸다. 그 길로 서역을 다녀온 현장이 당태종에게 바친 대당 서역기(大唐西域記) 에는 그 지역에 있던 총령(葱嶺)) 과, 진단 (震旦Cīna-sthāna)이란을 여러 다른 글자들 (震丹,真丹 真旦,神丹)로 표기 되는 어음을 진단 (振旦)이라 했다.[15] 현장이 천축국에서 들은 인도 동북쪽, 아쌈 (Assam) 지역 에서 운남성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있던 나라들을 종 복자를 넣어 여러 지나국 (至那僕底國, 至那僕氏國, 至那揭羅曷國) 으로 기록 했다. 삼국유사에 가야 사람들이 수로왕을 세웠다는 지역 가야(阿耶)가 갠지스강(殑伽河) 북쪽에 있다.[16] 그 곳에는 사찰이 다섯개나 있고 승도가 천여명이 넘는 불교의 핵심부다.[17]
당나라에 복속 되지 않았던 서남 지역을 비하 하여였다. 그에 앞서 서진 시대 불경을 번역한 루탄경 (大樓炭經:西晉法立, 法炬共譯)에 실린 총하 이동이 진단 (蔥河以東名震旦) 이라한 문구에서 진단을 지나 (至那)로 바꾸었다. 전후한서의 서역전(西域傳)에는 총령(蔥嶺河合)이 실렸다. 서진시대 스님들은 천산 남로를 지나 다녔다. 일연 스님이 지나 갈국 (至那竭國)의 출처를 밝힌 고승전과 서역전(高僧傳,西域傳)은 여러 종류가 있다. 아쌈지역의 지나(支那)를 서역 월지국이 있던 곳으로 오인 했다.[18]
현장은 아쌈 동쪽 큰강을 지나 불교가 번창 했던 지역을 지나 (至那)로 기록 했다.[19] 장병린은 진단 지나 (震旦,支那) 모두 진나라 어음(皆言秦)으로 “silk”란뜻이 있다고 했다.[20] 아쌈 지역까지 삼한의 후손이 진출 했었다.
현장이 먼 여정을 마치고 천산 남로를 따라 귀국한 곳을 진단(振旦) 이라 했다.[21] 진시황이 통치 하던 땅을 당나라 땅이라 진단이 왕의 이름 (前王之 國號)이라 했다.[22] 현장이 처음“震旦을 振旦, 支那을 至那”로 기록 했다.
불가에서 진시황이 병장기를 녹여 금인 (金人) 을 만들었던 사실과, 휴도왕이 소유 했던 금인 (金人)을 불상으로 잘못 인식 하여, 후한 초에 서역불교가 처음 들어온 불교가 진시황 이전에 전래 되었다는 증거로 쓰이고 있다. 불교는 크게 세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 왔다. 서역불교와 남방불교의 전래는 경로와 시대가 밝혀 졌다. 그러나 차마고도를 주 교역로로 하던 운남성 일대를 통해 전래된 전통 불교에 관한 기록은 미흡하다. 그 곳에는 현장 스님 이전 부터 강력한 국가 남조(南詔)가 있었다. 빨리 귀국 할수 있었지만 그길을 못가고 갔던 길로 되돌아 왔다.
무우왕 (無憂王) 즉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른 아유 부처 가(阿輸迦)를 당나라에서 아유화야왕 (阿育訛也王) 이라 기록 했다. 삼국지 왜인전에 서가모니 탄생지 임아국(臨兒國lín ér guó[梵Lumbinī]佛)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곳에 [老子가 가서 胡, 즉 천축국 지도자에게 도덕경을 가르쳤다]는 무위(無爲)를 뜻했다.[23]
사기에 나오는 사마상여(司馬相如: 179년 ~BC 117년) 시절에 사천성 (益州)에 살던 백익의 후손들이 차마고도를 따라 천축국과 교류를 했었다. 그길을 따라 단군왕검의 가르침 도교가 천축국에 전도 되었다고 본다.[24] 삼국유사에 천축국의 왕이 동이 공공지족(東夷共工之族)과는 다르다고 했다.[25] 서남 산간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은 도교와 토속신앙을 믿고 있다.
청 강희 25년(1686년)부터 도광 22년(1842년)까지 거의 2세기에 걸쳐 편찬되었다는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와 (淸)나라 말기에 위원 (魏源, 1794년 ~ 1857년)이 1844년 저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에는 지나(支那 와 至那) 가 여러 곳으로 나온다. 그는 이태리 선교사가 만든 만국지도 내용을 인용하여 현지음으로 적은 태국을 섬라(暹羅)라 했다.[26] 지나(支那 와 Sayam)의 출원지다. 사전에는 중국어로 진시황(秦始皇 Qin)의 성씨를 백익의 후손을 봉했던 곳(秦:伯益之後所封國) 이라 했다. 천축국에서 해안을 따라 태국을 지나 월남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지나(支那)라고 했다.[27] 그곳에서 서양 열국이 세력 다툼을 했다. 지나(支那)에서 싸워 패했다고 했다.[28] 하노이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 나타난 지나(支那)는 광동 광서 장족 자치구 (廣西壯族 自治區)와 운남성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지나(支那)라 했다.[29]
송고승전(宋高僧傳)은 발해 고씨(渤海髙氏) 찬녕(釋贊寧:919-1001 년)이 양자강 하류에서 해로를 따라 동남아를 돌아 남천축국에 다녀온 기록이다. 남천축국 사람들은 지나(支那)를 [인도에서는 사자국(師子國, 獅子國)의 동쪽, 중국동남부 지명으로, 지도자를 천자 (支那天子)라] 했다.[30]
운남성에 남조(南詔 Nanzhao)를 세웠던 이족 (彝族, 夷族)은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황금시대를 이루어 었다. 이를 대리국 (大理國)이라 한다.[31] 대리(大理)란 순임금 때 현명한 법관 고요 (皐陶. 咎繇)에게 붙였던 이름이다.[32] 고요의 아들이 백익(伯益)이라 한다. 앞서 언급한 산서성의 범(凡伯, 范伯)씨는 홍범의 사음자요, 이윤 (彝倫)은 백익의 가름침이다. 이괘명문에는 백익을 뜻한 글자(彝)가 있다.
운남성에서 참패한 당현종(玄宗)이 고요를 덕명황제 (德明皇帝)로 추존 했다.[33] 그 때에 남조에 있던 호수를, 백익 이기씨(伊耆氏)가 살던 마을을 지나던 이수 (伊水 洛水)와 음이 같은 이해(洱海, Erhai)라 했다. 이원현 (洱源縣) 이라던 고을에 있는 도시를 대리 (大理)라고 이름 했다.
끝. October 31st 2021.
이렇게 문헌을 살펴 보면 진단 (震旦)이란 [해 뜨는 동쪽 땅]이란 뜻이다. 단 (旦)이란 글자는 중앙 아시아에 있는 나라 이른 탄(xx-tan), 한국어에 들 땅의 옛말 아사달 (Asadal) 인류학에 나타난 Neanderthals 과 같이 현지어음을 가차전주한 글자다. 장병린은 이 두 명사를 현지음으로 진나라 땅을 뜻(譯皆言秦)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 학자 앤도씨 (遠藤隆吉)와 같이 만주족이 점령 했던 청나라 영역을 지나 (滿洲滅支那)라 했다.[34] 당 현종이 시문에 남긴 지나(支那)란 글자는 좋은 뜻은 아니다.
천축국은 오늘의 네팔과 인도 북동부 고원지대에 있었다. 차마고도를 따라 운남성과 교류가 있어 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살았었다.
그후 당의 중흥을 이루었다는 헌종(憲宗: 805년 ~ 820년) 시대에 토번 글안 발해 남조(南詔)등이 다시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나 “Cina, China” 의 어원이라는 지나(支那)는 만주원류고등 많은 사서에 없다.
지나의 핵심 “나 那”자는 임나 (任那)란 글자에서 설명 했다.[35] 햇님을 숭상 하던 사람들이 해지 연안에서 여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36] 한국어 나라(town state)의 어원이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똑 같은 글자 “新羅、任那、加羅、秦韓六國”가 송서 양서 태평어람등 남사(南史) 기록에 왜왕이 다스리던 진한6국으로 실렸다. 그러한 부족이 운남성에 살았다. 인도승 극량(極量;中印度人也)이 말하기를 지나란 광부(廣府為支那), 즉 중원 남쪽 소수민족이 사는 넓은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라 했다.[37]
진단(震旦)이라고 읽는 글자에는 여러 뜻이 있다. 인도에서는 파밀고원을 넘어 천산남로를 따라 사막지대를 따라 동쪽으로 이러지는 엿 왕국을 굴단 (屈qū丹) 그 지역 사람들은 계단(溪xī qī旦) 이라 했다.[38] 동쪽으로 이주 하여 거란(契丹, Khitan), 여진, 발해의 어원으로도 나타났다.[39] 해와 달 그리고 별과 같이 하늘에서 빛을 내는 세 물체 삼신 (三辰, 三神)을 일월성 (三辰,日月星也) 이라 한다. 진단(震旦)을 신주(神州)라 하듯 “별진 (辰名, 十二支 ), 벼락 진, 아이 밸 신(震)자와 같은 음의 글자 진”을 신(神) 으로도 읽고 단은 신과 같다(旦:又與神同)고 했다.[40]. 해뜨는 동쪽 땅을 뜻했다.
당나라 이후 십국(十國: 902-979)시대 역사 구국지 (九國志)와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년 ~ 1086년)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지나 (支那)가 없다. 그후 원나라 역사어에 나타났다, 뒤를 이은 明史 에는 없다. 그러나 같은 시대 통킹만 지역 역사서 대월사기 전서 (大越史記全書)에는 안남과 섬라(安南與暹羅)가 접해있다. 그 일대에 같은 문자를 쓰는 나라를 (我,日本,支那,朝鮮.安南) 이라 하고, 조선과 지나는 구호(舊好)라 했다.[41] 조선이란 강남 해안에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던 삼한의 후손이 수나라 이후에 복건성 일대에 살던 신라와 백제를 뜻했다. 뱃길로 더 서쪽과 교류 했다. 그 곳에 안남과 섬라(安南, 暹羅)는 인접해서 사람 모양이 비슷하나 섬나는 다른 문자를 썼다. 명사(明史)에는 남조 (南詔) 대리 (大理), 안남과 섬라(安南, 暹羅)는 있으나 지나 (支那 支那)가 없다. 섬라(暹羅)를 시암 (Siam (xiān; 仙:鮮)의 사름자로 아유타야 시대부터 강대한 불교 국가 로 오늘의 타이 왕국(랏차 아나짝 타이)이다. 오늘의 타이족은 지나(支那) 황제가 다스렸던 운남성에서 매콩강을 따라 내려 왔다. 해상 통로의 중요한 지역에 있던 관계로 구라파 선교사를 통하여 지나로 알려 졌다. 섬라(暹羅)란 어음이 신라와 비슷하다. 수서에 대륙 百濟의 영역으로 기술된 대만의 옛 이름 탐라 섭라(涉羅, 𨈭牟羅)의 어음과도 비슷하다.[42]
중원 세력이 기록한 역사서에는 남쪽 세력을 뜻한 지나(支那 支那)란 이름 없다. 만주 원류고에도 없던 지나(支那)가 청나라 후기 1842년에 위원 (魏源) 편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 )에 나타난다.
끝. November 2nd 2021
태평광기 남조 (南詔) 에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 란 문구는 남조왕 발해왕 (渤海郡王) 고병(高駢)이 읊은 시문이다.[43] 표신이란 시인이 남조 (南詔驃信著)를 읊었다는 시문에 같은 문구가 있다.[44] 표신이란 군주를 칭한 그 지방어(自稱驃信 夷語君)라 했다. 나 짐朕 하는 표현과 같다. 그 시문에 “翊衛類夔 契. 伊昔經皇運”란 문구가 있다. 치수 사업을 하던 북쪽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온 사람들(夔 契)이 밀려 내여 왔다 는 뜻이다. 남조/소(南詔)는 당나라 남쪽에 있던 제왕이 다스리던 지역이란 뜻이다.
표신이 당나라 말기에 발해군왕 연국공으로 불리던 선비족 지도자였다. 송대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연국공 고병 (燕國公高駢) 이 여러 곳에 실렸다. 그가 성도에서 남조로 갔다. 그 세력이 안남(安南)을 정벌 했다.
앞서 October 23 일 발표한 [왕검조선을 이루었던 한 부족이 운남성에서 번창 했었다]는 내용에 원나라 역사서을 인용하여 고씨전 대리국정 (高氏專大理國政), “其孫阿羅仕大理國主高泰” 란 문구가 고병을 뜻했다.
남조 지역은 옛적부터 살던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한무제 이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삼위산에 귀양을 보냈던 삼묘(三苗于三危)의 후예로 알려진 묘족 (苗族; Miao, Hmong) 요족(瑤族; Yao People) 또한 서남지역에 산다. 서남이중에 가장 방대한 영역을 다루어 남조 (南詔) 라 했다. 그곳에 전해오던 전설을 남조왕 고병이 읊었다
오호 십육국시대 내륙에 살던 삼한의 후손들이 운남성에서 번창 했다. 수나라때 단합하여 당나라 세역을 물리 쳤다. 원나라에 패망하여 매콩강 물길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 했다. 동남아 사람들의 풍속에 전해 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남조(南詔, 653년 ~ 902년)란 당나라 때에 처음 나타난다.[45] 두 큰 세력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쪽지역을 통치 하던 자를 지나황제 (支那皇帝) 라 했다.
당현종(唐玄宗; 685년 ~ 762년)은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 (楊國忠: ? ~ 756년)을 보내서 서남이를 토벌 하러 갔다가 751년 753년 두차례 전쟁에서 패했다.[46]
당현종이 읊은 제범서 (題梵書)에 “支那弟子無言語”란 시귀가 있다. 글자 뜻 풀이 또한 [지나란 곳을 흠모의 대상, 또는 혐오의 뜻]이라 한다.
당 태종의 명을 받고 현장(玄奘)이 17년간 (629년~645년)의 구법 행적을 정리 하여 당태종에게 바친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 진단 (振旦)과 인도 북쪽에 여러 지나국(至那)이 실렸다. 지나국 설명에는 당언 또는 당언 한왈천종 (唐言漢日天種)하는 문구와 지나자 전 왕지국호 (至那者前王之國號)란 글귀가 있다.[47] 또한 조용한 곳에 가서 명상을 하다 대덕이 최후에 다다른 곳이라 하여 지나란 국호를 썼다(大德何方最後而至 曰我至那國也) 문구가 있다.[48]
곤륜 산령(崑崙山脈)에 지상의 낙원이 있다고 믿었다. 곤륜이란 글자는 도덕적 가치관을 결정하는 총수, 즉 최고 제사장을 뜻한다. 이를 티배트 불교에서는 운남성에 샹그릴라 (Shangri-La)현이 있다. 삼국유사에 같은 불교인이지만 동이 공공족(東夷共工之族)과 다른 사람들이 살았다.[49] 앞서 올린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새로운 고찰]에 자새히 설명 했다.
끝. November 6th , 2021
대리국(大理國: 937 – 1253)이 있던 지역 사람들의 전설에는 싸움이 진 당나라 장수가 시조라 한다.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대리국을 몽고족이 정벌 했다. 고려 충열왕 때다. 고려에서 조공을, 백제(百濟)가 양호 (梁浩)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50]
당나라 여러 역사서에는 음차(音借, PLCS) 하여 여러 글자로 기록하는 지나(支那, 芝那, 脂那 至那)는 실리지 않았다. 이를 서역에서는 견사 도자기등 좋은 물건이 생산되는 풍요로운 나라 대당(大唐)을 뜻한 글자라 했다. 실은 중원의 변방(邊鄙)이지 중국은 아니라 했다.[51] 현종이 사용한 지나는 당나라가 통치 못했던 남쪽 오랑캐 땅을 묘사 했다. 이를 중국 남쪽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역이라 취급하였다. 그러한 풍조는 청말에도 나타났다. 일본에 유학 했던 국종사라고 불리던 보수 어문학자 장병린 (太炎 章炳麟, 1868년~1936년) 의 구서(訄書)에 “支那, 中國,中夏”다.[52]
위원(魏源 良圖, :默深: 1794 ~ 1857)의 해국도지(海國圖志) 에도 “震旦,支那”가 있다. 이를 장병린이 인용 했다. 천축국에 다녀온 스님을 지나국(支那國) 사람이라 했다.[53] 인도 동남아 지역에 지나 가라하국 (至那迦羅訶國), 伽羅國, 加羅國 등 여러 이름이 많이 실려 있다. 운남성 에서 매콩강을 따라 내려와 동남아 지역에 정착 했다. 위원은 “中國, 中夏 또는中華”라 하고 동남아 지역을 지나(支那, Chenla:真腊, 真臘)라다.
Lee Jin-Woo박사로 부터 아래와 같은 글을 받았습니다.
이박사님,대리국이 백제라는 명백한 사료를 찾았습니다. 백제인이 부여씨뿐 아니라 고씨로 쓰는 것은 북제에서도 볼 수 있는데 당나라에게 백제가 망한뒤 복국운동을 하던 왕자 부여융이 잡혀가 당나라 령남지역에 던져졌다고 기록되어 있더군요.(구당서) 또 936년엔 망했다는 백제 사신이 후당에 왔고 (구오대사) 쿠빌라이때도 백제사가 왔습니다.(원사)가 가장 신빙성 있는 스토리는 부여융계가 추방된 령남에서 안전한 운남지방으로 들어가서 6개 소읍국 추장들을 쫒아내고 왕이 된것으로 보입니다. 두번째로는 당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잡혀와 검남(사천)에 내던져진 왕족 연남건이 가까운 운남지방으로 내려가 부여융같은 입신을 한다는것 입니다.
운남을 침공한 양국충의 당나라병 20만을 물리친 기개라던가 2차전에서는 황제가 될 뻔했던 명장 이밀이 이 전쟁에서 수몰됩니다.
원광대 소진철 교수가 14년전에 주장한 광서성에서 백제향 그리고 비슷한 풍속이 발견된것도 이것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운남대리를 중심으로 살고있는 라후족,몽족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 조상이 옛날 눈내리는 나라에서 왔다는 기억소환 이야기가 맞으리라고 봅니다. 색동 저고리와 연지곤지, 돌절구등 ..
제가 책에서 언급했던 신라말 복건성 출신 견훤과 왕봉규가 백제계후예로 신라로 건너와 망국의 복수혈전 끝에 고려를 세운것과 궤를 같이하는것 아닌가 보고있습니다. 이해(洱海, Erhai)에서 당나라 장수로 남조를 침공하기 위해 출전한 이밀이 빠져 죽었습니다.
2021.10.28.
7.결론: 하늘에서 밝은 빛을 내는 日月星 三辰을 숭상(參禪)하던 고조선 유목민이 홍산문화를 남겼다. 모두 개천절(開天節)을 중요시 했다. 그들의 한 지류가 사천성을 지나 운남성 일대에서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힌무제 초기에 처음 역사에 등장 한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번창하여 수나라 역사에 혼미하게 실렸다. 당 현종을 크게 격파하여 세상에 남조(南詔)로 알려 졌다. 그 시절에 대륙의 동남 지역에 신라, 百濟, 가라(加羅)가있었다. 원나라가 정복 했다. 백제는 원 세조에게 양호(梁浩)를 사신으로 보내고, 고려에서도 조공을 바쳤다.[54] 남조의 수도에 살던 사람들이 매콩강을 따라 동남아로 내려와 불교를 믿는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매콩강 하유 동남아 해안은 중동과 극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해상 통로 였다. 남방불교가 신라에 전래됬다. 통일싱라이후 남방과 교류가 더더욱 활발하여 통일 신라의 전성기를 이루 었다. 복건성에는 장보고 (張保皐, ? ~ 841년) 가 활동하던 이전 부터 신라성 (新羅古城)이 있었다.[55] 장승을 동남아에서는 회소목 (會蘇木)이라 했다. 장승을 세우고 섬기는 여러 지나 (支那) 부족이 왕성한 나라 (至那旺國)가 하노이에 있던 세력과 접했었다.[56]
회소목 (會蘇木. totem pole)
당시 대리국(大理國)이 나타났던 지역이 번창 하여 운남왕은 천자지자 (天子之子), 즉 단군의 후손이라고 불렀다.[57] 원나라 역사서에는 고씨 대리국정 (高氏專大理國政) 이란 문구와 그손 아라임 대리국주 고태 (其孫阿羅仕大理國主高泰) 란 문구가 있다. 그들이 매콩강 물길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 했다. 동남아 사람들의 풍속과 전설에 전해 온다. 태국(泰國) 이란 이름은 고태(高泰)란 글자에서 온듯 하다.
불경에서 유래 외었다는 진단(震旦)이란 어음이 대당서역기에는 진단 (至那)국이란 이름을 현종이 비하 하여 지나(支那)라고 했다. 같은 어음이 와전 되어 인도와 불교 서적에는 지나(支那)로 기록 되었다. 패르샤 왕자가 코끼리가 많은 지나는 곳에 피란을 가서 꽃같은 신라 공주 화랑(Farang, 花娘, 源花)을 만났다. 동남아에 있던 신라(新羅)를 지나로 적었다. 진한 또는 진국(辰韓者, 古之辰國) 이라고 부르던 신라의 옛 이름이 와전 되어 지나(支那即辰, 震, 神)라 했다.[58]
당나라에 대적 했던 남쪽 세력을 남조 지나라고 했다. 지나의 남쪽 일부가 서양에 알려져 총령 동 쪽 전역을 하나의 동일한 국가로 풀이 했다. 현제 중국공산당 정부는 지나를 일본 사람들이 비하 하여 만든 이름이라 한다. 공식 명칭은 모택동이 붙였던 중화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을 간략한 중국이라 쓰고 있다. 지나(支那)는 남쪽 중국은 북쪽으로 다른 지역이였다.
끝.
October 23, 2021. Revised October 29th, November 7th, 2021
[1]. 管子霸言:夫國小大有謀,彊弱有形,服近而彊遠,王國之形也。合小以攻大,敵國之形也。以負海攻負海,中國之形也. 管子小匡: 故東夷、西戎、南蠻、北狄、中國諸侯,莫不賓服,與諸侯飾牲為載書以誓,要於上下薦神。然後率天下定周室.
[2]. 太平廣記 南詔: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翊衛類夔、契。伊昔經皇運,艱難仰忠烈. . 儒家 獨斷: 漢天子正號曰「皇帝」, “天子, 夷狄之所稱.” “皇帝,至尊之稱。皇者,煌也,盛德煌煌”
[3]. 孟子 滕文公下: 當堯之時,水逆行,氾濫於中國。蛇龍居之,民無所定。《書》曰:『洚水警余。』洚水者,洪水也。使禹治之,禹掘地而注之海,驅蛇龍而放之菹。夏:中國之人也
[4]. 訄書: 自古以用異國之材為客卿,而今始有客帝。客帝者何也?曰:如滿洲之主中夏是也。夫整軍之將,司稅之吏,一切假客卿於歐美,則以雞林、靺鞨之賓旅,而為客帝於中國也何損?知是,而逐滿之論,殆可以息矣。:難者曰:今中國羸病,炊之則殭,犁五稔必僕。雖尊祟孔氏,以息內訌. 悲夫!一二三四之數絕,中夏之科學衰
[5]. 字書 釋名 釋州國:晉,進也。其土在北,有事於中國,則進而南也.。
[6]. 春秋公羊傳: 秋,宋公、楚子、陳侯、蔡侯、鄭伯、許男、曹伯會于霍,執宋公以伐宋。孰執之?楚子執之。曷為不言楚子執之?不與夷狄之執中國也. 天王崩。何以不書葬?天子記崩不記葬,必其時也。天王使凡伯來聘,戎伐凡伯于楚丘以歸。凡伯者何?天子之大夫也,天王使王季子來聘。王季子者何?天子之大夫也。
[7]. 春秋公羊傳: 秋,宋公、楚子、陳侯、蔡侯、鄭伯、許男、曹伯會于霍,執宋公以伐宋。孰執之?楚子執之。曷為不言楚子執之?不與夷狄之執中國也. 天王崩。何以不書葬?天子記崩不記葬,必其時也。天王使凡伯來聘,戎伐凡伯于楚丘以歸。凡伯者何?天子之大夫也,天王使王季子來聘。王季子者何?天子之大夫也。
[8]. 孔子家語 曲禮子貢問: 子貢問於孔子曰:「晉文公實召天子,而使諸侯朝焉。夫子作《春秋》,云天王狩于河陽。何也?」孔子曰:「以臣召君,不可以訓。亦書其率諸侯事天子而已。」
[9].逸周書:太子晉解: 分任諸侯而敦信,曰予一人。善至于四海,曰天子。達于四海,曰天王.
[10].大樓炭經 (6卷)〖 西晉 法立共法炬譯〗. 法海經 西晉沙門法炬譯
[11]. 梁高僧傳 P. 26:徐州刺史王 仲德於彭城請外國伊葉波羅譯出雜心。去六年有師子國八尼至京
[12]. 梁書: 林邑、師子國各遣使獻方物. 師子國,天竺旁國也 徐州刺史王 仲德於彭城請外國伊葉波羅譯出雜心。去六年有師子國八尼至京
[13]. 三國遺事 :即高句麗之始祖東扶餘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天帝降而謂曰。將使吾子孫立國於此。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東海之濱。有地名迦葉原土壤膏腴。宜立王都。
東京興輪寺金堂十聖 迦葉佛宴座石. 汝國皇龍寺。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
[14]. 三國遺事 卷第三: 漢國有之。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祭天金人因生信。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具知始末。今更損高。此百濟佛法之始。又阿莘王即位大元十七年二月。下教崇信佛法求福 摩羅難陀。譯云童學其異跡詳見僧傳.
[15]. 大唐西域記 序:妙窮津會。於是詞發雌黃。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載佇風徽。召見青蒲之上。乃眷通識。前膝黃屋之間。手詔綢繆。中使繼路。俯摛睿思。乃制三藏聖教序。凡七百八十言。今上昔在春闈。裁述聖記。凡五百七十九言。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凡六百五十七部。具覽遐方異俗
[16]. 三國遺事 檢索 “阿耶”:古記云。萬魚寺者古之慈成山也。又阿耶斯山當作摩耶斯。此云魚也。傍有呵囉國。昔天卵下於海邊。作人御國。即首露王。當此時。境內有玉池。池有毒龍焉。
[17]. 大唐西域記:渡殑伽河北至阿耶穆佉國中印度境. 阿耶穆佉國缽邏耶伽國. 國大都城臨殑伽河。其氣序土宜同阿踰陀國。人淳俗質勤學好福。伽藍五所僧徒千餘人。習學小乘正量部法。
[18]. 三國遺事 高僧傳云。惠遠聞天竺有佛影。昔為龍所留之影。在北天竺月支國那竭呵城南古仙人石室中雲云。又法現。西域傳云。至那竭國界。那竭城南半由旬有石室。
[19]. 大唐西域記 卷第十: 渡大河至迦摩縷波國東印度境。斯則王化所由國風尚學。今印度諸國多有歌頌。摩訶至那國秦王破陣樂者。聞之久矣。豈大德之鄉國耶。曰然。此歌者美我
[20]. 訄書:遠藤隆吉曰:「孔子之出於支那,實支那之禍本也. 支那以蠶絲名,世謂震旦、支那,譯皆言秦。今人考得,實為蠶義
[21]. 大唐西域記: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雞林. 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凡六百五十七部。具覽遐方異俗。
[22].大唐西域記: 釋迦如來涅槃之後。第一百年有阿輸迦唐言無憂舊曰阿育訛也王者。頻毗婆羅唐言影堅。舊曰頻婆娑訛也王之曾孫也。大唐國者豈此是耶。對曰。然至那者前王之國號
[23]. 三國志 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不能詳載,故略之如此
[24].: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 教胡。浮屠屬弟子別號,不能詳載,故略之如此
[25].三國遺事 卷第三: 善德王代。寺初主真骨歡喜師。第二主慈藏國統。次國統惠訓 貞觀十年丙申。慈藏法師西學。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文殊又云。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
[26].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長二萬四千裏,闊一萬二千三百裏。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自二十六至一百九十度。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27]. 海國圖志 “支那”: 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
[28]. 海國圖志 -> 檢索 “支那” 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甫六年,與佛蘭西戰,敗績於支那,國幾不守。近日乘佛蘭西為俄羅斯所敗.
[29]. 大清一統志: 支那:,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合有二十九,不能詳載,故略之如此
[30]. 宋高僧傳 釋蓮華。本中印度人也. 敕廣州節度使李復修鼓鑄畢.一云梵夾本是南天竺烏荼國王書獻支那天子。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展轉游化漸達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31]. 康熙字典:《唐書·南詔傳》初鳳迦異築柘東城,諸葛亮石刻故在,文曰:𥓓卽仆,常以石搘捂. 舊唐書:南詔蠻蒙異牟尋大破吐蕃於神川,使來獻捷,語在《南詔傳》。黃少卿攻陷欽、橫、潯、貴四州,吐蕃渠帥論乞髯蕩沒藏悉諾律以其家屬來降。明年,並以為歸德將軍。吐蕃寇慶州及華池縣,殺傷頗甚。《唐會要》曰:《南詔樂》,貞元十六年正月南詔異牟等作《奉聖樂》舞,
[32]. 詩經: 商頌 那: 詩說 商頌: 祀成湯之樂歌.冉,阝:《玉篇》同那). 那:何也,都也.
[33]. 通典: 天寶二年 743년,追尊咎繇為「德明皇帝」,涼武昭王為「興聖皇帝」。仍各立廟
[34].訄書 檢索 “支那”: 遠藤隆吉曰:「孔子之出於支那,實支那之禍本也。支那以蠶絲名,世謂震旦、支那,譯皆言秦。今人考得,實為蠶義域多利以英吉利主名.曰:言語、風俗、歷史。三者喪一,其萌不植。俄羅斯滅波蘭而易其言語,突厥滅東羅馬而變其風俗,滿洲滅支那而毀其歷史。自歷史毀,明之遺緒,滿洲之穢德,後世不聞.
[35].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의 세로운 고찰. Etymology of Khitan Empire; Name of Khitan came from the Hédàn 盍旦 in the Shijing.
[36]. 詩經: 商頌 那: 詩說 商頌: 祀成湯之樂歌.冉,阝:《玉篇》同那). 那:何也,都也.
[37]. 宋高僧傳:極量。中印度人也。梵名般剌蜜帝。此言極量。懷道觀方隨緣濟物。展轉游化漸達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眾知傳達祈請頗多。
[38]. 大唐西域記:行八百餘里至瞿薩旦那國唐言地乳即其俗之雅言也。俗語謂之渙那國。匈奴謂之于遁。諸胡謂之溪旦。印度謂之屈丹。舊曰于闐訛也。.
[39].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삼신(三神)사상과 여진 (女眞)의 어원.
[40].通典州郡三 古雍州: 慶州今理安化縣。周之先不窋所居。春秋時義渠戎之地。秦滅之,始皇以屬北地郡。二漢因之。西魏置朔州。後周廢。隋文帝置慶州,煬帝初置弘化郡。大唐復為慶州,或為安化郡。領縣十.
[41]. 大越史記全書序: 安南與暹羅,地相近也,風土相似也,疆域、人口相若也. 我日本嘗同文軌者,為支那、為朝鮮、為安南。支那、朝鮮於我有舊好;而安南古或有我船舶至其國者,蓋西邊商估以財貨往來耳
[42].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經于百濟. 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
[43]. 資治通鑑 高駢: 高駢至成都,發步騎五千追南詔 南詔遣使者詣高駢求和而盜邊不息,駢斬其使者。蠻之陷交趾也,事見二百五十卷懿宗咸通六年。虜安南总部设安南府經略判官杜驤妻李瑤。
[44]. 全唐詩 卷七百三十二 星回節遊避風台與清平官賦 南詔驃信著: 星回節遊 避風善闡台,極目見藤越。 自我居震旦,翊衛類夔契。伊昔頸皇運,艱難仰忠烈. 不覺歲雲暮,感極星回節。元昶同一心,子孫堪貽厥. 太平廣記 蠻夷四 南詔: 驃信詩曰:「避風善闡臺.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
發步騎五千追南詔 南詔遣使者詣高駢求和而盜邊不息,駢斬其使者。蠻之陷交趾也,事見二百五十卷懿宗咸通六年。虜安南总部设安南府經略判官杜驤妻李瑤。
[45]. 資治通鑑: 玄宗至道大聖大明孝皇帝: 初,儀鳳中,吐蕃陷安戎城而據之,其地險要,唐屢攻之,不克. 戊午,冊南詔蒙歸義為雲南王. 太平廣記 蠻夷四 南詔: 驃信詩曰:「。謂天子為震旦.
[46]. 舊唐書: 天寶末,楊國忠用事,蜀帥撫慰不謹,蠻王閣羅鳳不恭,國忠命鮮於仲通興師十萬,渡瀘討之,大為羅鳳所敗。鎮蜀,蠻帥異牟尋歸國,遂以韋皋為雲南安撫大使,命使冊拜,謂之南詔。咸通中,結構南海蠻,深寇蜀部。西南夷之中,南詔蠻最大也。領縣二。
[47]. 大唐西域記 序: 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 至那揭羅曷國北印度境. 至那僕底國北印度境. 故曰至那僕底唐言漢封質子所居因為國號. 大唐國者豈此是耶。
[48]. 大唐西域記 對曰。然至那者前王之國號.. 婆羅阿迭多唐言幼日王之嗣位也。次此東北又建伽藍 大德何方最後而至。曰我至那國也。然至那者前王之國號.. 大德何方最後而至。曰我至那國也
[49].三國遺事 興法第三: 善德王代。寺初主真骨歡喜師 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然以山川崎嶮故。人性麤悖。多信邪見。而時或天神降禍.
[50].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
[51]. https://ctext.org.User dictionary: 脂那:即支那,翻譯名義集脂那條云.即贊美此方是衣冠文物之地。二云指難,此云邊鄙,即貶挫此方非中國也。西域記云:摩訶至那,此曰大唐.
[52]. 訄書: 自古以用異國之材為客卿,而今始有客帝。客帝者何也?曰:如滿洲之主中夏是也。夫整軍之將,司稅之吏,一切假客卿於歐美,則以雞林、靺鞨之賓旅,而為客帝於中國也何損?知是,而逐滿之論,殆可以息矣。:難者曰:今中國羸病,炊之則殭,犁五稔必僕。雖尊祟孔氏,以息內訌. 悲夫!一二三四之數絕,中夏之科學衰
[53]. 海國圖志:天竺國 聞有支那國僧遠至摩竭陀國,殷勤來請. 渡大河至迦摩縷波國,始入東印度境. 至那迦羅訶國. 與佛蘭西戰,敗績於支那,國幾不守。近日乘佛蘭西為俄羅斯所敗.
[54].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 元史 地理四: 昆陽州,下。在滇池南,僰、獹雜夷所居,有城曰巨橋,今為州治。閣羅鳳叛唐,令曲旂蠻居之。段氏興,隸善闡. 今夷中名其地曰羅伽甸
[55]. 元史 志第十三 地理四:諸葛孔明征南中,經此睒,後號為牟州。唐蒙氏遣爨蠻酋抬萼鎮牟州,築城曰耐籠。至高氏專大理國政,命雲南些莫徒酋夷羨徙民二百戶於黃蓬阱,其抬萼故城隸高氏。及高升泰執大理國柄,高氏專大理國政,命雲南些莫徒酋夷. 其孫阿羅仕大理國主高泰. 元史 志第十四 地理五: 汀州路,下。唐開福、撫二州山洞置州,治新羅,後改臨汀郡,又仍為汀州。宋隸福建路. Baidu: 汀州,唐朝時設置的州。. 開元二十四年(736年)析福州、撫州置,治所最初在「新羅古城」(今福建省上杭縣北某處,一說是在該縣臨城鎮九州村),後移治所至長汀縣
[56]. 元史 外夷三: 緬國為西南夷,不知何種。其地有接大理及去成都不遠者,又不知其方幾里也. 會蘇木達國亦遣人因俱藍主乞降,庭璧皆從其請。四月,還至那旺國。庭璧復說下其主忙昂比。至蘇木都剌國,國主土漢八的迎使者。蘇木達國相臣那裡八合剌攤赤. 元史 本紀第十四 世祖十一: 九月乙丑朔,馬八兒、須門那、僧急里、南無力、馬蘭丹、那旺、丁呵兒、來來、急闌亦帶、蘇木都剌十國,各遣子弟上表來覲,仍貢方物。以太廟雨壞,遣甕吉剌帶致告,奉安神主別殿。甲申,太陰犯天關。行辰,高麗遣使獻日本俘。是月,南部縣生嘉禾,一莖九穗。芝產於蒼溪縣..
[57]. 宋史:太平興國七年982년,益州僧光遠至自天竺,以其王沒徙曩表來上。上令天竺僧施護譯云:「近聞支那國內有大明王,至聖至明,威力自在。每慚薄幸,朝謁無由,遙望支那起居聖躬萬福。光遠來,蒙賜金剛吉祥無畏坐釋迦聖像袈裟一事,已披掛供養。伏願支那皇帝福慧圓滿,壽命延長,常為引導一切有情生死海中,渡諸沉溺。今以釋迦舍利附光遠上進。」又譯其國僧統表,詞意亦與沒徙曩同. 元史: 胡光遠,太平人. 元史 志第十三 地理四: 開南州,下。州在路西南.沾益州,下 在本路之東北,據南盤江、北盤江之間。唐初置州.
[58]. 支那: Cina,又作脂那、至那、斯那、真丹、振旦、震旦、真那、振丹、脂難、旃丹。宋史曰:「天竺表來。譯云:伏願支那皇帝,福壽圓滿。舊說秦始皇統一中國,聲教遠被外國人,因稱我國為秦,支那即秦音之轉。」玄應音義四曰:「振旦或言真丹,並非正音,應言支那,此云漢國也。又無正翻,但神州之總名也。」善見律二曰:「摩訶勒棄多至史那世界國。」注曰 。」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2 Responses to Etymology of China Part II 南詔. 운남성에 있던 支那皇帝가 Cina 의 어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