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Etymology of Three Hahn:
Chen Shou left the phrase “有三種”, which means Three kinds of Hahn, named “馬韓,辰韓,弁韓”, and made a section of Byeon-Jin(弁辰傳). Though the names “馬韓,辰韓” being used without any disputes, “弁韓” had been recorded as “弁韓, 示韓” in Chinese, but Korean used only “卞韓” throughout the history.
Decree from emperor Taizong of Tang(克高麗白巖城詔) conformed the location of Byeon-Jin(弁辰傳) as the southwestern region of Manchuria .
The adjective logograms “弁, 示, 卞” had been used in China for long time. The true meaning of “卞” is in the Jiaoshi Yilin (焦氏易林). He was righteous person punished badly. Western Zhou avoided the meaning righteous high officer “卞” to his cap “弁” made of young lamb skin.
Well known Chinese philologist, textual critic, Zhang Binglin (章太炎/炳麟:1869-1936) said that some of Joseon people remained in the southwestern (營州之域)region of Manchuria. They had family genealogy records since Di Shun(虞氏) era. The three Hahn is Yemaek people spread wide in the Russian far east and Xian Bei tribe is one of them .
Chen Shou meant the Yemaek people as Hahns (汗人, 汗國, 韓人, 倭) who had been living in the He-river (海河) watershed area spread out from the Tian-Jin through the Sea of Hahn (翰海, 瀚海) to Korean peninsula, Japanese archipelago, Okinawa, Taiwan Island and coastal region of East China Sea.
삼한 (三韓)의 후예 (後裔)들.
삼한 (三韓)의 유래:
언제 부터인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한반도를 삼한 땅이라 불러 왔다. 이 명사가 오늘 공식 명친인 대한민국 (大韓民國)의 어원이 되였다. 북쪽에서는 옛부터 전해 내려 오는 조선 (朝鮮)이란 명사를 국호로 쓰고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동양 역사서에서는 한반도 동남쪽에 삼한의 하나인 진한 (辰韓)이 있었고, 그 땅에서 신라 (新羅)가 건국 했다고 기록 되여 있다. 신라와 가야 연맹체의 발생 과정에는 그 선조가 출발 점이 어디였던가는 알려 지지 않으나, 바다를 따라 서쪽에서 와 한 반도 남단에 자리 잡았다. 한반도를 통일 한 신라가 한반도에서는 제일 오래된 왕국이라 했는데, 왜 동남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서라벌이라 이름 한 곳에는 그 전에 벌써 “조선의 유민, 朝鮮遺民”이 여섯 부락을 이루고 여기저기 골짜기에 흐트러져 살았다. 이들이 후에 “진한육부 辰韓六部”가 되였다고 기록 했다. 신라 건국후 8년에는 왜병이 변방을 친입 했다“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18년에는 변한 (卞韓)이 항복해 왔고, 30년에는 낭랑 (樂浪)이 친입해 왔다. 38년에는 왜에서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는 호공을 사절단으로 보냈다. 신라 사신에게 마한 왕 (馬韓王) 이 힐책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 辰卞二韓為我屬國” 이였다고 했다. 이러한 신라의 발생에 관한 기록을 보면, 위에 말한 여러 나라들이 모두 해변에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곳에는 또 중국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진한 땅에 와서 원주민들과 석여 살았다 했다. 진시황 시절에 중국 피란민들이 한반도 동남 해안 지역에 왔다는 학설을 그대로 받아 들려 한반도를 삼한 (三韓) 땅이라 했고, 중국 후한서와 삼국지 에서는 진한 (辰韓)을 진(秦)나라 사람들이 피란을 가서 자리 잡은 곳이라 하여 진한 (秦韓)라 기록 하기도 했다. 믿기 어려운 설명이다.
신라 최치원 (崔致遠) 이 이르기를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이 백제, 진한 (辰韓)이 곧 신라”라 했다. 한국 삼국사기 지리지 (三國史記 雜志第三地理一)에는 신라의 강역은 삼국사기를 쓴 분들이 알고 있는 바와 옛 부터 전해 오는 예기는 다르다 했다. 통전 (通典 邊防一 馬韓)에는 삼한중의 하나인 마한 땅이 4천리라 했다 “地合方四千餘里.” 한반도가 3천리라 했으니, 마한이 만주 땅에 있었어야 한다. 신구 당서 (新舊唐書) 에 이르기를 “변한의 후예가 낙랑에 있었다. 낭랑은 옛 부터 조선의 일부 였다” 했다. 이들이 모두 만주 땅에 있었스리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더 복잡하게 하는 이름이 진수(陳壽 233-297) 가 쓴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변진전, 弁辰傳” 내용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또 후한서와 함께 한국상고를 였볼수 있는 중요한 역사서다. 어떤 글자가 의심스러워 무슨 뜻인가를 확인 하려고 강희자전을 비롯한 다른 문헌을 찾아보면, 사관들이 글자의, 음(音)과 뜻(의 意)을 묘하게 바꾸어 적어 놓았다.
“考證:〔又三韓,國名,辰韓,示韓,馬韓也。見《後漢•光武紀》。〕謹按示韓當作弁韓,見後漢書東夷傳,光武紀本文無之。謹將示改爲弁。光武紀改東夷傳.”
이 기록을 여러 모로 찾아보아도 그 내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동이전 (東夷傳)에 나오는 삼한 (三韓)의 어느 하나를 글자를 바꾸었다는 예기다. 이 후한 초기때에 낭랑이란 말이 여러 곳에 나온다. 호동왕자와 최리의 낭랑국(樂浪王崔理) 공주의 슬픈 사랑 예기, 마한 사람 염사치( 廉斯鑡)가 한나라 낙랑(漢樂浪)의 토지가 아름답고 인민이 풍요롭게 산다는 말을 듣고 투항하였고, “鑡曰:「我當降漢樂浪” 후한은 그에게 큰 벼슬을 주었다. 이러한 일연의 기록과 평안도에서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후한이 평양에 낭랑을 설치 했다는 학설(樂浪平壤說)을 남겼다. 그 러나 당시 집권자의 본기에는 그러한 말들이 없고 글자도 뒤 바뀌어 판단하기 어렵게 되여 있다. 흔히 한국 기록에 나오는 변한이 다른 글자(示/卞/ 弁韓)로 적혔 었다.
역사 기록이란 언제 어디서나 그 당시 집권자의 뜻에 맞게 기록 했다. 지리적 여건을 감안 하면, 한국 상고사에 관한 기록은 중국 문헌에 있어야 한다. 사관의 기록이외에 다른 자료들도 찾아 그 글의 뜻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옛 기록을 찾아보면 삼한의 발생지가 남만주였다는 뚜렷한 결론이 나온다.
그 증거는 고구려를 친입 했던 “당 태종 唐太宗; 613–636 년)이 남긴 각종 기록에 나온다. 그는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가 고구려를 친입하려고 이른 봄에 출발하여 갈석산 (碣石山)에 올라가 “봄날 바다를 바라보며, 春日望海”란 “오언시 五言詩”시를 읊었다. 그를 보필 하던 재상 양사도 (楊師道)가 “봉화성제 춘망일 奉和聖制春日望” 이란 오언시 (五言詩)시를 지어 바쳤다. 당태종 이전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 (曹操;155-220년)가 만주 서남쪽 산간지역에 숨어 있던 원소 일당을 소탕하고 갈석산에 올라가 읊은 시가 “관창해 觀滄海”다. 이 집권자 들의 말은 사관이 바꿀수 없었다고 본다. 발해 (渤海)를 창해 (滄海)라 했고, 갈석산에서 발해만 연안에 청구 (靑丘), 대방(帶方), 숙신향 (肅愼鄕) 하는 이름들이 있었다. 숙신의 본향이 갈석산 일대였다는 예기다.
당 태종는 안시성 (安市城)을 정복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그때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선이였던 백암성 (白巖城)을 함락하고 남긴 글이 “극 고려 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다. 백암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많이 적혀 있다. 그 위치는 요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는 추리가 나온다. 그러나 사가들은 요하 동쪽이라 한다. 중국사서(新,舊唐書)에는 크게 나타나지 않고, 이에 관한 기록은 다만 통전 通典 과 송대에 편수된 태평어람 (太平御覽)에 나온다. 그 문구를 “師次白巖城,將軍李思摩中弩矢,太宗親為之吮血” 보면, 태종이 정주 (定州)를 떠나 작심하고 한번 혼내주어야 겠다고 처음으로 직접 관장한 전투다. 연혈(吮血)이란 내 스스로 피를 빨아 맛을 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국 사서에 나타난 기록만으로는 그 전쟁의 시일과 장소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뚜렸하게 기록되지 않은 전쟁터를 학인 할 수 있는 사료를 당 태종이 남겼다. 그 이외에도 만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시문, 황실 칙령 등으로 남겼다. 위에서 의문스러워 했던 신라 초기에 관한 이름들이 “당 태종의 말을 직접 또는 간접적 기록한” 각종 서신에 나온다.
그 당시 당나라 군사들이 만주 땅에서 싸웠지 오늘의 압록강을 너머 오지는 않았다. 중국 사람들이 성군 (聖君)이라 하는 황제가 직접 인솔하고 출정하여 분탕친 곳이 삼한 (三韓) 땅이고 곧 “계시/사 蓋斯” 들이 살던 곳이다. 백암성 (白巖城)이 있던 땅이 “변한 진한의 땅; 弁辰之野”이라 했다. 삼한 땅은 북경에서 갈석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 나온“계시/사 蓋斯”란 글자는 “사음자 寫音字”로 “해를 숭상하던 고조선 사람들”을 이른 말이다. 이들이 살던 곳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계시/사 蓋斯水”라 이름 했고 이 강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 이 건넜다.개사수(蓋斯水)가 엄사수 즉 서 요하다. 비류수 (沸流水)와 살수 (薩水)는 동서 요하의 두 물줄기가 심양 일대에서 만나 서남으로 흘러 발해만에 이르는 늡지대라 본다.
태종이 남긴“又燕碣土風,素多霖霔。軒皇遭召雨之寇” 란 문구가 그 곳을 오늘의 지도에 그려 볼 수 있는 근거다. 그 지역, 즉 “북경에서 갈석산 을 지나 발해만 서안 일대”는 늘 전운에 시달렸다. 사마중달의 후손이 새운 “진나라 이후에 고구려 와 백제가 통치”한 사실을 “샘물이 넘쳐흘렀던 재앙 晉後苦湧水之災”이라 표현 했다. 백제가 멀리서 만주 땅에 친입 한게 아니라, 옛 부터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중원 세력에 반항하여 일어섰다는 뜻이다. 한 때는 고구려왕에게 만주 서남쪽 지대를 통치하는 권한을 주었다. 그 명칭에 대방 (帶方)이란 이름이 있다. 이는 갈석산(碣石山) 이남을 통치했다는 뜻이다.
“其後慕容寶以句麗王安為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
북사 (北史)에서는 백제가 개마한(蓋馬韓)에 속하는 구대 (仇台)가 옛 대방(帶方) 땅에서 나라를 새워 시작 되였다고 기록했다. 후에는 중국으로 부터 대방 이란 수식 명사가 붙은 칭호를 받았다; “帶方郡公百濟王.” 대방이라 표현한 지역은 오늘의 천진에거 갈석산이 이르는 발해만 서안이 였다. 그 곳을 백제가 통치 했었다는 뜻이다.
당 태종이 처 부신 “백암성白巖城”은 오늘의 요하 (遼河) 서쪽이 될수 밖에 없다.
이밖에도 당 태종이 남긴 문헌을 보면 동북아시아 상고사에 나오는 의문 스러운 이름들의 뜻이 더뚜렸해 진다. 당태종이 끌고 온 중원 새력에 맏서 싸운 고구려 사람들을 “삼한지사, 反三韓之士”라 했다. 남만주가 삼한의 땅이 였다는 뜻이다. 한 무제 때 설치한 제일 북쪽에 있던 현토군 (玄菟郡)을 원투(元菟)이라 불렀다.
당대의 시인 양형(楊炯)이 작성한 비문 (唐右將軍魏哲神道碑)에도 현토군 (玄菟郡; 高句驪,上殷台,西蓋馬)이오늘의 요녕성 서쪽에 흐르는 대능하 일대에 있었고 (元兔白狼之野,) 그 곳이 삼한 땅이라 했다(問三韓之罪.) 현토군이 제일 북쪽에 있었는데 우거왕의 수도가 있던 곳이란 뜻이다. 오늘의“조양일대”일대에 세웠다. 한의 낭랑군(漢樂浪)은 마땅히 그보다 남쪽, 천진(帶方) 북쪽에 있었어야 한다. 두 나라의 경계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요수와 패수 사이 遼浿之間”란 뜻을 보면 “패수”가 한반도에 있을수 없다. 이 패수는 진시황 때 만주에 있던 고조선 즉 “기/지조선 暨朝鮮”과의 국경으로 산해관을 가로 질러나가는 자그만 여울이다. 기조선의 “기暨”자는 뜻글자로 옛 관자(管子)에서 표음문자 (表音文字, 寫音字)로 기록한 발조선(發朝鮮)을 사마천이 그 뜻을 밝혀 새로 만들어 붙인 회의문자 (會意文字) 이름이다. 이 글자를 옛적에는 하나의 “접속사”로 풀이 했다. 글자를 풀이하면 “이른 아침” 이란 뜻이다. 밝다는 뜻의“발조선”을 그렇게 기록 했다. 당태종은 공자가 담 또는 탐자 (郯子)에게, 문왕은 곽숙 (虢叔) 에게 배웠다한다. “仲尼師於郯子, 文王學於虢叔.” 곽(虢)는 김 씨의 원조가 되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 김 일제 (金日磾; 134- 86 기원전) 일화와 도 관련되는 곽거병 (霍去病 ; 140 – 117기원전)의 “곽”자와 같이 사음자로 북적 (北狄) 을 이르는 글자에서 나왔다. 사마천은 공자가 노자 “老子 담/단耼”을 만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탐(郯) 자는 “단耼”의 또다른 사음자가 분명 하다. 여러 문헌상에 나오는 노자 “老子 담/단耼”란 낱말을 살펴 보면 복수로 해석 된다. 오늘 신교에서 흔히 쓰는 “장로 님 들, Elders”이란 뜻이다.
중국역사서 이외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입 하고 남긴 기록을 다른 여러 사료와 종합해 보면, “신라, 백제, 왜, 가락연맹”가 모두 남만주 발해만 연안에서 생겨난 삼한 (三韓)의 후예 (後裔)들이란 결론이 나온다. 삼한은 곧 한 무제가 점령했던 고조선 땅에서 나타 난 여러 부족국가들이였다. 이 여러 국가들을 그 당시 국경 이였던 갈석산 일대의 “진한, 번한 쪽에 있든 여러 나라들, 真番旁眾國”이라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 했다. 이를 다른 중국 기록에서는 한반도 남쪽 조선 (朝鮮) 땅에 진(秦)나라 사람들이 피란을 가서 자리 잡은 곳이라 하여 진한 (秦韓)라 기록 했다. 이를 한서와 후한서에서는 동쪽에 있는 나라 란 뜻이 있는 진국 (辰國)이라 했고 삼국지 에서는 진한 (辰韓, 秦韓)이 옛 진국 (辰國)땅이라 말을 돌려 기록 했다. 우거왕에게 진언 했다 고 조선의 수도를 떠났다는 역계경 (歷谿卿) 이 2000여 가구를 끌고 자리 잡은 곳(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이 바로 발해만 서북쪽 연안, 즉 옛 조선 유민이 살았다는 신라 초기의 서라벌 육부 촌(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이다. 같은 시절에 280,000 명의 고조선 사람들이 남여 (南閭)를 따라 발해만 성남 쪽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이 피난민 수용소가 창해군 (蒼海郡, 滄海之郡)이다. 이 곳에서 창해 역사가 시황을 살해 하려다 실패 했다. 발해만 서남 연안이다. 이 곳에서 가야 연맹국과 왜가 타냉 했다. 백제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가 자리 잡았었다는 미추홀 (彌鄒忽) 은 양사도가 예기한 대방으로 천진 일대가 된다.
“東見滄海君,得力士為鐵椎,重百二十斤,秦皇帝東遊”
삼한 (三韓)의 종말에 관해서는 뚜렸한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초기에 온조왕 27년에 멸망 했는대, 후에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 (太祖大王, 諱宮)이 마한 (馬韓)과 예맥의 병역을 이끌고 현도성을 첬다는 기록이 있다. 한 반도에서 병력을 동원 하여 만주 서남 쪽에 까지 출병 했다는 풀이가 된다.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받아 들여, 후백제의 견훤이 완산에 이르러 군중 앞에서 한 연설에는 자기들이 마한의 후예라 했다. 마한이 처음 생기고 뒤에 진한 변한이 흥했다 했다.혁거세가 나타 난 발해만 서북쪽을 ‘진한 또는 변한’으로 보았다. “吾原三國之始,馬韓先起,後赫世勃興,故辰、卞從之而興”
삼한은 모두 만주 땅에서 나타나, 남쪽으로는 서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쪽에 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삼한 (三韓)의 후예 (後裔)들이 남만주 해안 일대에서 한반도 서안을 따라 일본 남부와 유규 열도로 퍼저갔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다.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 491-519년) 13년 조에는 제주도, 즉 섭라(涉羅)가 백제에 속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고구려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다. 만주에 있던 삼한을 통일 했다. 그 집권 시기에 제주도를 섭라(涉羅)라 했으니,제주도로 가는 뱃길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열렸다고 본다. 신라가 제일 늦게 만주에서 남으로 내려와 한반도 동남에 자리를 잡았다. 삼국유사에는 지증왕 (智證麻立干立,재위 500 -514) 때를 중고의 시작 (己上爲 上古. 己下爲中古)이라 했다. 그 때에 경주로 수도를 옮겼다고 본다. 그 가 513년에 우산국 정벌 했다. 그 시절에 독도를 찾았다고 본다.
그 때 삼한의 후예들; 신라, 백제, 가야 연맹, 그리고 왜 (倭)는 오늘의 지도상에 어떻게 분포되여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
끝
康熙字典 弁:《韻會》皮變切,𠀤音汴。《說文》本作㝸。象形。或作弁。 《玉篇》㝸,弁也,攀也,所以攀持髮也。《儀禮·士冠禮》周弁,殷冔,夏收。《註》弁,名出於槃。槃,大也,言所以自光大也。《疏》弁是古冠之大號。以鹿皮爲之,謂之皮弁。以𩎟韋爲之也。《詩·衞風》會弁如星。又急也。《疏》弁,急也。剡剡,身起貌。急行欲速,而身屨恆起也。弁謂撫手也。《廣輿記》卞山,一名弁山。在今湖州府城北。樂也。《詩·小雅》弁彼鸒斯。《傳》弁,樂也. 廣韻 卞: 弁:周冠名
자서(字書)에는 보일 시“示”자와 꼬깔 변“弁”는 있으나 모자를 쓴 점치는 사람을 뜻한 변“卞”자는 없다. 고려사절요등 한국기록에만 나타나는 변한 (卞韓)이란 글자는 위진 시대 이후에 만든 이름자다. 자전에 실린 “弁 急也. 剡剡”란 글자는 변한 사람들이 서둘어 섬 (Island)로 갔다는 뜻이다.
진수의 삼국지에 조조의 후처 무선변황후 (武宣卞皇后)가 문제의 어머니다. 그로 부터 변(卞)씨가 나타났다. 그녀의 출생지가 오늘의 임치(臨沂)인 서주 (徐州) 낭야군(琅邪郡) 개양현(開陽縣) 이라 한다. 그 서쪽에 사물현(史勿縣) 의 어원이 되는 사수(泗水)가 산동성 제녕시 동남(山東省濟寧市東南)에 있는 대택으로 흐른다. 광개토대왕 시절에 신라와 가야(加耶)가 그곳에 있었다. [1] 임성(任城)이 있었다. 임성을 임나 (任羅 任郡)이라 고도 했다. [2]
통전에는 변방 동이 진한과 변진(辰韓, 弁辰)편에 같은 관명이 실렸다. 동이의 영역이 서언왕 (徐偃王)이 다스리던 중국 해안선에 퍼져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다 . 동이들이 한해의 동북서 해안에 살았다는 뜻이다. 발해만 동남쪽 연안에 나타났던 창해군 (滄海之郡)에 살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증거다.
삼한의 한 부류가 종국 동해안에 살았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 있다.
대만을 동이가 사는 섬이라 이주(夷洲)라고 했다. 그곳 사람들은 진시황이 방사 서복(方士徐福)의 말을 듣고 불사초를 찾아 찾아 오라고 젊은이 수천명을 발해만에서 떠네 보냈다는 사람들의 후손이라 했다.
동오의 손권이 고구려와 공모하여 조위를 치려고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동오의 사신은 해상로를 관장하던 대륙백제 사람들이었다. 후에는 강동에 살던 부족이 중원의 옥쇄를 잡아 북제를 건국 했다.
명나라때 편찬된 욱리자(郁離子)에는 삼한부여(三韓扶餘)라 했다 . 이조 후기 이규경(李圭景)의 삼한시말 변증설(三韓始末辨證說)에는 고연무의 일지록 내용을 인용하여 고구려 부여 한예(駒麗、扶餘、馯、貊之屬)가 모두 해동제리라 했다 . 후에는 일지록(日知錄)에 삼한이 한반도 남쪽과 구주열도에 살고있다고 했다. 삼한의 후손들이 중원 해안에서 한해의 동남쪽 도서에 흐터져 살았다는 뜻이다.
진수가 옛부터 고조선 영역에 전해오던 삼감(三監) 이란 글자를 삼한 (三韓)으로 바꾸어 “SMa-Out에 적용했다. 후세 사람들이 글자를 이리저리 바꾸어 만주영역을 지나 한반도에 접붙였다. 변한을 뜻한 시한“弁韓.示韓”은 다같이 일월성 삼신에 예식을 치루던 한(韓) 이란 뜻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삼한이란 낱말은 한해 (翰海 瀚海) 동북서 세 해안에 韓이 살았다는 뜻이다.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이란 어휘에 삼한의 유래가 있다. 청출어람 (靑出於藍)이란 문구도 있다. 청구(靑/青丘)에서 나는 옥돌에 새(bird) 모양의 글자를 새겨 넣은 도장과 관계되는 람전벽 (藍田璧),즉 화씨벽(龢氏之璧 垂棘之璧) 의 출처다. 중산국 대부(中山大夫) 람 (藍諸)여러 사람 이란 문구 설명에 있다. 시경에 실린 三藍皆可作澱)는 삼감(三監, Three Leaders/ Hahn/Gahan, 三幹, 三韓,), 즉 세 지도자가 독립 하여 모두 물가에 자씨 재상(澱:滓滋也)이 어전을 만들었다. 석가모니를 자씨라 한다. 요서(遼西) 영지현에 고국국이 있었다. 불로초의 대명사 영지 버섯이란 명사의 출원지 에 고죽국이 있었다. 이 곳을 밝게 햇살이 비추는 산삼신(三神山)이라 했다.
끝.
January 3, 2020, edited October 22, 2023
[1]. 三國史記 : 史勿縣進長尾白雉,王嘉之,賜縣吏穀.炤知麻立干 加耶國送白雉,尾長五尺。
[2]. 通典: 北齊亦有儀同三司者, 任城王湝等諸王多為之。湝戶皆反。水經注 濟水:「黃水又東南逕 任城郡之亢父縣故城西,夏后氏之任國也。漢章帝元和元年,別為任城在北,王莽之延就亭也
太平廣記 女仙三 魏夫人:魏夫人者,任城人也。晉司徒劇陽文康公舒之女,名華存,字賢安.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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