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f the Silla Capital “慶州” in Korean peninsula
Another mystery of Silla unveiled. Etymology of China. Part I
Abstract: Silla had emerged in the Tianjin(天津) area with Gaelim (雞林) as the capital. They ran down to the south along the waterway and settled in the SE part of Korean peninsula. Another band went down to the SE Asia along the continental coastal region.
Tang used Gaelim (雞林) as the capital of Silla. Ideograms Gaelim (雞林) has a meaning of forest where defeated Hae tribe living. The first king of Goryeo arranged his first daughter Princess Nang-rang to the last King of Silla and named old Silla capital region as Gyeongju (慶州). Semantics of Gyeongju(慶州) is the province of the subjugated territory providing pleasure. After Emperor Wen of Sui (隋文帝) unified fragmented continent, Gyeongju(慶州)was applied to the western nomad territory where the Xiongnu prince Jin Midi (金日磾; 134–86 BC) had been captured.
Glorified name Gaelim (桂林) is in the Guangxi autonomous region where many minorities have been living for longtime. The Zhuang nationality has their own language, culture, and consider the Legendary Chīyóu (蚩尤)as the ancestor. One band of the Yaemaek people who left Tianjin port settled in the coastal region of Indo-China peninsula built the Silla kingdom where the mystical Persian prince got married to the princess Farang of Silla. Phonetic of Silla appears to the etymology of China. Princess Farang is the origin of Silla Hwarang (花郞), equivalent to the Boy Scout. Kim Yu-shin (金庾信; 595 – 673) served as the head of Hwarang, Pung wol Ju.
서론: 상형자를 쓰는 동양문화권에는 이름자에 깊은 뜻을 실었다. 앞서 신라 (新羅, 斯盧)의 발생, 이름, 수도의 변천 경로를 설명 했다. 신라의 첫 수도를 계림(雞林)이라 했다. 그 곳, 발해만 연안에는 이미 조선 유민이 여섯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광개토대왕 전후에 신라,임나 가라,왜, 백제 (任那加羅)가 실렸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다툼에 밀려 한반도로 천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화랑(花娘)과 처용가, 경주(慶州)라는 이름의 어원은 밝혀 지지 않았다. 이들 이름의 발생 연유를 살펴 보았다. 패르샤 왕자는 동남아 해안에,공주 Fa rang 이 살던 신라국에 피란을 갔다. 해상로를 통해 서역에 알려 지나란 이름이 오늘의 China의 어원이 되었다.
서라벌 (徐那伐)의 첫 수도 계림(雞林)의 유래:
삼국유사에 나오는 계림(雞林)이란 글자가 중국문헌에는 당 태종때 서역을 나녀온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처음으로 계림이 “蓋非道映雞林” 일반 명사로 실렸다.[1] 오대 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79년) 을 통일한 송나라 는 만주에서 진출한 북쪽 세력을 견제 하려는 목적으로 한반도에 있던 고려와 자주 교류 했다. 두 나라는 북송 (北宋, 960년 ~ 1127년) 시대 말기에 한해의 남쪽 항로를 따라 교류 했다. 고려땅 풍물이 손목(孫穆 宋)의 계림유사 (鷄林類事)와 서긍(徐兢, 1091-1153)의 고려도경에 실려 있다. 손목은 1103년에 고려에 다녀 가서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남겼 했다. 한 세대 후 서긍이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고 작성한 보고한 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 에는 글자가 다른 계림(雞林)이라 했다. 분명 고려의 지도를 그렸건만 유실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송사(宋史)에는 오역의 계림기 (吳棫 雞林記) 왕운의 계림지(王云 雞林志)가 있었다.[2]
통일 신라 시대에 당나라에 유학 했던 김대문(金大問)이 계림잡전 (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郎世記), 고승전 (高僧傳), 한산기(漢山記)·악본 (樂本) 등을 편찬했으나 유실 되었다. 이를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김부식 (金富軾)이 읽었다. 김대문은 손목이 사용했던 같은계자로 계림잡전 (鷄林雜傳)을 남겼다. 그러나 삼국사기 본문에는 신라를 서라벌 (徐那伐) 이라 하고, 첫 수도를 속국이란 뜻이 있는 계림(雞林)이라 했다. 나(那)자는 햇님을 숭상 하던 사람들이 해지 연안에서 여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3] 임나는 그들의 수도(那:何也,都也)을 맏겼다는 뜻이다.
폐백(幣帛)의 한 가지란 뜻이 있는 계(雞: 奚+隹)자는 동이해 (奚,解,亥) 족의 지도자를 뜻했다.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하고 만들어 준 이괘 명문 (利簋銘文)에 무왕을 무(珷)자로, 처형당한 상나라 제신(帝辛)을 꼬리 짧은 새(征商隹) 로 그렸다.[4] 계림(雞林)이란 미개한 동이 수령이 사는 숲이란 뜻이다. 동이 수령이 살았던 곳에 박혁거세가 자리잡를 잡았다. 발해인 고씨가 남긴 송고승전(宋高僧傳) 에도 실렸다.[5] 처음으로 한반도 땅을 침략 했던 당나라 시대 기록; 통전과 신구당서 모두 서긍이 쓰던 글자 계림(雞林) 이라 했다. 당에 유학 했던 의상(義湘, 625년 ~ 702년) 대사를 계림부인 (雞林府人)이라 했다. 꼬리 짧은 새를 어근으로 하는 계 (雞)자는 폐백 (幣帛)을 뜻한 글자다. 조공을 바치는 지역, 또는 미개한 지역을 뜻했다. 당태종의 명을 받아 서역에 다녀온 현장(629년~645년)의 대당서역기에 계림(映雞林) 이란 글자는 고조선의 후손들이 살던 변방을 뜻한 글자다.
서라벌 (徐那伐)의 첫 수도,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 이란 글자와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양평(襄平)이란 글자는 [옛적에 있던 토성이 패허가 된 곳]을 뜻했다. 삼국지 변진전에 실린 시로국(斯si/ siɛ盧國)이 있던 곳이다. 위징은 [한나라때 낭랑 땅에 있던 시라(斯羅)가 신라다. 같은 라자 가라국왕 하지(迦羅國王荷知)가 479년에 남제 첫 황제 소도성(萧道成)의 대관식 에 사신을 보냈다.[6] 그 가라국을 신라가 흡수 했다. 수서에[백제 맥국 (貊國)이 있었다]고 했던 곳이 발해만 서남쪽 해하 수계에 있었다.[7]
같은 글자 가라(迦羅)가 대당서역기와 송고슨전에 나타난다. 인도 동북쪽에 원시 블교가 번성 했던 지역이다. 장수왕이 백제개루왕이 있던 한성을 점령한 이후 가락국이 처음으로 한해의 남쪽 항로를 개통 했다. 문헌을 고찰해 보면 [임나(任那)란 글자는 변함이 없다. 허나 가라(加羅) 와 신라는 여러 글자]로 표기 했다. 임나는 훈역이요, 가라와 신라는 뜻과 음을 이리저리 휘돌려 기록한 결과라 본다. 진서와 십육국 춘추에 백제 설라와 같이 나오는 휴인 (薛羅,休忍)이 임나 가라 (任那加羅)의 다른 이름이다.[8] 전진 부견 (秦 苻堅: 357년 ~ 385년) 이후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391년- 413년)이 대륙백제를 정벌 하던 시대에 남방 불교가 발해만 연안에 전래 되었다. 공손연이 양평에 웅거 할 때, 동오의 손권이 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교류를 했다. 그 해상로를 따라 남방불교가 발해만에 전래 되었다. 천진-당산일대에 나타난 신라는 주위에 있던 낙랑 왜(樂浪 倭) 고구려, 말갈, 등 여러 부족 국가의 시달림을 받았다. 전국시대 후기에 연의 동쪽에 있던 조선의 수도를 양평(襄平)이라 했다.
진수가 지도자란 옛 어음의 가차 한(汗, 汗國)자를 왜(倭)자로 바꾸었다. 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왜 (倭)자는 그 후에 편찬된 수경주에 요수를 설명한 지역에 나온다.[9] 요수는 서쪽 창려현을 지나 양평에 이르러 발해만 (翰海)으로 들어 간다. 해하의 한 주류를 대요수 (大遼水) 라 했다. 옛적 부터 양평현에 있던 고성(襄平縣故城)에서 공손연 (公孫淵)이 잡혔다.[10] 진수는 요동 양평하는 이름을 모두 요하 동쪽으로 기술 했다. 창려현은 연산 산맥 일대 해하 수계에 있던 옛적 조선 땅이다. 선비 모용황 (慕容皝: 297-348)이 조선공 (朝鮮公)으로 봉해 졌다는 기록이 십육국 춘추에 있다. 장수왕도 실렸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에 관한 기록은 없다.[11] 용성왕 풍발이 장수왕에게로 도망 갔다. 고구려에서 풍발의 아들 태자왕인 (太子王仁)을 인질로 잡았다. 나라를 잃은 왕자가 대동강 하구 백제 한성을 지나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백제사람 박사 왕인이다.
성덕왕(聖德王,재위: 702년 ~ 737년) 3년에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 을 지냈다는 김대문은 언어 학자였다. 신라 발생지에 살던 사람들이 쓰던 거서간 (居西干) 이란 [서쪽에 살던 지도자]란 뜻의 기록을 진언 (辰言 秦言 秦語) 이라 했다. 삼국유사에는 이를 진나라 사람들의 말과 비슷하다 (有似秦語) 라고 했다.[12] 그 출처의 문맥을 찾아 올라가 보면 삼국지 변진전 에 “其言語不與馬韓同” 란 문구다. 발해만 연안 천진 일대 사람들의 언어는 부여와 마한과 같다. 설문해자에는 낭랑(樂浪)이란 곳에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을 다어(多語) 이라 했다.[13] 다다어(多多語)의 약자로 안씨가훈 서증에 “濌濌語”tartar어, 즉 퉁구스어를 썼다는 뜻이다. 낭랑(樂浪)에 패수가 있고, 변진전에 나오는 염해국(冉奚國) 에 실던 나약 하다는 뜻의 염(冉)씨가 강남으로 내려가 안씨(顏氏)가 되었다.[14] 송나라 때 편찬된 광(廣韻)에는 상나라 고종을 도와 중흥을 이루었던 부열 (傅說)의 후손이 강남 오나라 땅에 남아 부여(夫餘) 를 성씨로 했다고 한다.[15] 삼한, 즉 부여의 후예들이 양자강 하류 일대에 정착했던 사실을 이렇게 기록 했다.
홍산문화를 이루었던 유목민들이 남쪽으로도 내려가 관중분지, 하북평원, 남만주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흐터졌다. 한 부류는 동남아로 내려 갔다.
진수의 삼국지에 처음으로 요동만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지나 일본 구주에 이르는 해상로를 자세하게 설명 했다. 그러나 중원의 동쪽 해안을 따라 진출했던 사실은 혼미하게 오주부전에 실렸다. 왜 여왕 비미호 (卑彌呼)가 발해만 연안에 있던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남조 (宋, 南齊, 梁)역사서에 나타난 왜오왕(倭五王) 을 후한 말 백제 여왕 비미호(卑彌呼)의 후손이라고 했다. 부여씨가 세운 대륙백제의 후손 왕이 비미호다. 왜왕 (대륙백제왕)이 다스리던 부족국가;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 7 나라, 또는 백제를 제외한 6 나라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라고 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新羅任那加羅”가 색인 되었다. 발해만 서남쪽에 대륙백제 왜와 인접해 있던 부여의 후손들이 강남으로 옮겨 왔다.
다음사전에 [어찌 나, 무엇 나, 어조사 내 란 뜻]이 있다는 나(那)자는 시경 소아와 상숭에 실렸다. 해(sun)의 음역으로 햇빛을 숭상하던 사람들이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다는 뜻이다.[16]
왜왕이 다스리던 여섯 나라들이 오호십육국 말기에는 중국동남 해안으로 확산 되여 인도 동쪽 해안에 까지 나갔다. 더 많은 사람들은 중국 동남쪽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중원 세력의 포로들은 몹쓸 땅으로 이주 시켰다. 공자가어에는 (費氏經與魯古文同),비씨궁(費氏之宮) 하는 문구가 있다. 객가(客家 alien)가 그 한 본보기다. 오늘의 복건성 광동, 광서 귀주 운남성 등지에 삼한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살았던 흔적이 풍속에 나타나 있다.
풍월주를 지도자로 했던 화랑(花郞)의 어원과 출처:
패르샤 왕자와 신라 공주 화랑(Farang, princess Frarang)의 사랑을 읊은 서사시 “쿠쉬나매The Kushnameh”가 전해 온다.[17] 패르샤 왕자가 피란을 갔다는 신라 (新羅)는 풍요롭고 코끼리가 있었다. 귀국 할때는 뱃길로 갔다. 인도 동남 해안에서 남중국 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신라가 있었다고 본다. 이 지역이 폴투갈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알려 졌다. 인도에 관해 깊히 연구했던 독일사람 맥스 뮬러( Friedrich Max Müller: 1823 – 1900)가 처음으로 중국고전을 번역 했던 스코틀 란드 선교사 제임스 래게(James Legge; 1815 – 1897)와 같이 준비 했던 동방에 관한 방대한 기록서 “Sacred Books of the East series”가 출판 되었다. 그 속에 화랑 (Farang) 과 Zhina (支那)의 어원이 실렸다.[18]
꽃같이 아름다운 처녀란 뜻글자 화랑(花娘)이 위진시대 문헌에는 찾을수 없다. 그후 금병매,홍루몽 태평광기등 작품에 실렸다, 화랑이란 어음이 수나라 이후에 패르샤와 동남아 지역에서 왔다고 한다. 이란 북쪽 카스피해 동남 연안에는 화랑(Farang)이란 도시가 있다. 가락국 허황후가 배를 타고 왔다는 아유타 왕국과 어음이 같은 곳이 태국 방콕 근교 와포 (Wat Pho)에 있다. 불당 앞에 서있는 화랑 동상은 한국의 갓을 쓰고 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 ( 570년 ~ 632년) 가 나탄 시절에, 패르샤 왕자가 피란을 갔던 신라국은 동남아 해안에 있었다. 통일 신라 시절에는 남방 해상로를 통하여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중동문물이 신라에도 알려 졌다. 이 시절에 처용이 지었다는 처용가 (處容歌)가 나타났다.
Depiction of farang as a stone guard at Wat Pho in Bangkok; circa 1824–1851
한해 남쪽 수로를 따라 남방불교가 한반도 남쪽에 정착한 신라에 번성 했다. 제24대진흥왕(眞興王, 534년 ~ 576년)은 불교 승려로서 법운 (法雲)이란 법명을 썼다.[19]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는 동남아와 더더욱 교류가 왕성 해젔다. 여러 글자로 기록 되었던 신라(Silla)와 가야의 어음이 와전 되여 서양 문화권에 지나(支那)로 알려 졌다. 그곳에 지상 낙원의 대명사 Shangri-La 가 있다. 서역에서 동쪽 나라 중국을 진단 (震旦, 振旦) 이라 하던 땅이라 했다. 인도 동북 나(那)에 이르 렀다(至)는 뜻의 지나 (至那)를 비해 해서 가지지자 지나(那)라 했다.
화랑(花郞)이란 이름은 신라가 한반도에 정착한 이후, 한해 남쪽 해상로가 개척된 이후에 남방불교가 전래되던 시기에 나온다.[20] 패르시아 왕자가 피란을 갔던 동남아지역의 신라국 공주 화랑 (Farang)이 한반도에 이르러 신라에서 글자를 바꾸어 (娘, 郞) 화랑(花郞)의 어원이 되었다.
삼구사기와 연호덕이 작성 했다는 화랑의 발생 과정을 종합해 보면 삼국유사의 문구는 [미모의 남자가 도착한 바닷가에 망해사를 지었다] 는 뜻이다. 처용이 화랑(花郞)이 되었다. 공주와 결혼 하여 왕정을 도왔다.
김대문이 남긴 화랑세기에는 위화랑(魏花郞: 540년–?)이 첫 풍월주, 여자 미실(美室), 그리고 꽃의 기원이란 뜻의 원화(源花)가 화랑의 시초라 했다. 진흥왕 38년에 시봉원하(始奉源花), 즉 원화를 받들기 시작 했다는 문구가 있다.[21] 통일 신라 측천무후 시절의 당나라 시인 소미도 (蘇味道; 648?–705?) 가 읊은 시문에 은애원화미기로(隱曖源花迷近路)란 시구가 있다. 원화의 원조는 발생지에서 뱃길로 먼곳에서 왔다는 뜻이 있다.
허황후가그 해상로를 통해 가락국에 도착 했다. 남방 불교가 왕성하던 동남아에서 온 여자를 스님이 미화 하여 시대를 가락국 초기로 기술 했다. 한반도 동남지역에 남방불교가 정착했다. 삼국유사에는 의문이 있다고 남긴 기록 여주공덕대사(餘州功德大寺),가림군(佳林郡), 하남임주 (河南林州) 등은 모두 중국 땅에 있던 이름이라고 본다 . 시절에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아 산간 여러 부족 국가에서 범어 梵語 가라란 이름을 사용 했다.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로 묘사된 남방 신라국 공주 화랑 (Farang) 이 한반도 신라 화랑의 시초다. 남방에서온 미모의 처용이 화랑(花郞)이 신라왕의 사위가 되어 국사를 보좌했다. 이러한 복잡한 사연을 종합하여 불교에 심취 했던 진흥왕 말기에 원화(源花)란 글자로 실렸다. 풍월주를 지도자로 하는 화랑 제도가 시작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원화(源花)란 글자가 없고 삼국사기에는 처용(處容)이란 글자가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법명은 태현(太賢). 대현(大賢) 또는, 청구 사문(靑丘沙門)이라” 했다. 출처 불명의 인물이 신라 유식종(唯識宗)의 종조 (宗祖)이다. 삼국유사에는 대현(大賢) 호는 청구사문이라 했다.
불교 신문에는 처용(處容)이 처음 나타나는 경덕왕 무렵(742~764) 에 나타난 태현(太賢)스님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불교가 번성 했다. 태현스님은 원광.안한.자장.보덕.낭지.혜숙.혜공.대안.원효.의상 스님으로 이어지는 신라불교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서라벌에서 태현스님 위주의 교학은 침체에 빠져들고 말았다. 신라의 화랑과, 한국 특유의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이때 나타났다.
신라 사회가 혼란해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 ~ 846년)가 나타났다. 그 이후부터 신라는 사양길에 들어 간다. 그 혼란기에 사람들이 불교의 성역으로 알려졌던 아유타 왕국 으로 피란을 갔다고 본다. 고려 초기에도 해상 교류가 왕성하여 동남아지역과 중동 문물이 들어 왔다.[22] 인도 동쪽 해안에서 쓰는 중기 타밀어에는 한국어 어휘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항해의 필수 요소 나침판:
위진시대부터 천진당산 일대에 살던 삼한의 후예들이 중국 동해안을 따라 멀리 동남아로 진출 했다. 삼국지에는 풍력과 방향계가 쓰였다는 흔적이 보인다.[23] 동진시대 부터는 동남아 해로를 통하여 남방불교가 남조에 들어왔다. 송서에는 범선으로 二三萬里를 항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24] 불가의 성산 수미산 (須彌山. Mount Meru, 머리산)이 실렸다. 양서 수서에도 실렸다. 설명을 종합해 보면 수미산은 히말라야 동남쪽이 된다. 운남성 대리(大理)시를 지나는 차마고도를 따라 불교가 들어 왔다. 산간 지역에 있던 매콩강 상류에 관한 설명은 “Part II”에서 설명 한다. 당승 현장은 여러 운남성으로 가는 길이 막혀서 먼길을 돌아 처음으로 중원 땅에 불교를 알려준 가옆마승(迦葉摩騰)아 찾아 왔던 길을 따라.[25]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수도 한성을 점령한 시기 478년에 한해의 남쪽 해상로가 개척 되었다. 그 를 따라 남방불교가 한반도 남부에 들어 왔다.[26]
한국 재야 사학가 오재성(吳在成)은 서신라 (西新羅)의 특산물 편에, 당나라에 선물 했다는 자석 (磁石)을 근거로 나침판을 신라 사람이 개발 했다고 한다.
통전 지남차 (指南車) 편에 나침판의 유래를 설명했다. 황제 헌원이 동이수령 치우 천왕과 싸웠다는 예기부터 후한 시절에도 쓰이었다고 한다. 위진 시대 청룡(靑龍; 233년 ~ 237년)간에 지남차가 사용 되었다고 한다.[27] 더 자새한 설명은 북위의 사관 최홍 (崔鴻, 478- 525)이 쓴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는에 실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의 제3대 황제 석호(石虎,재위:334년 – 349년)가 출처를 알수 없는 불교에 심취한 해비 (解飛: Xiè Fēi; fl. 334–349) 를 임용 했다.[28] 해비 (解飛)는 고구려와 부여의 성씨다. 그는 다재 다능한 쟁인이었다. 나침판이 보급 되여 중국 동남아 해안으로 진출 했다.
Map of the Tea-Horse route
계림(雞林)이 한반도에 나타난 사연:
진서와 수서에는 계림(雞林)이란 이름이 없다. 당나라 때에 붙였다. 태평어람에는 당서 내용을 인용 하여 신라의 도움으로 백제를 정벌한 이후 663년에 신라국을 강등하여 계림주(雞林州)로 했다.[29] 신라 본기에 실린 계림이란 글자는 중국사람들이 비하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를 서긍을 안내 했던 김부식이 인용 했다. 뒤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땅에 붙였다.
계림(雞林)이란 글자와 음이 같은 계수나무 계 계림(桂林)이라는 지명이 중국광서 장족 자치주(廣西壯族自治區) 산간지역에 있다.[30] 여러 소수 민족이 그곳으로 밀렸다. 옛적에는 울림(鬱林)이라 했다.[31] 그들은 치우천왕을 선조로 모신다. 삼위산에 숨었다는 (竄三苗于三危) 고조선의 한 부족이 묘족 (苗族)이다. 중원에 있었던 흑치(黑齒)국이 남쪽으로 밀려 갔다.[32] 치(齒)는 한국어 방언으로 [이치 왜 이래]에 나타난다. 이를 훈역하여 옛적에 남방에는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속이 있었다. 백제 서부인으로 알려진 흑치 상치의 본향이 중국이 있었다고 본다. 당나라 때에 끌려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도 중국 서남부 산간 지역으로 이주 시켰다.
달 속에 있다는 계수나무 계(桂)자는 규를 든 예맥 (濊貊)족의 지도자 천독 (天毒)이 살던 궁정 앞에 억(檍; 名萬歲木) 이란 나무에서 유래 되었다. 축시(丑) 방향에 나타난 샛별을 새해를 알리는 별이란 뜻에서 세성 (歲星) 이라 했다. 이를 목성(木星, Jupiter) 이라고 했다. 이 나무로 활을 만들고, 마차 바퀴며, 배(Boat) 바닥에 사용 했다. 계수사무 숲 계림 (桂林) 이란 예맥 (濊貊)족이 북쪽에서 내려와 사는 나무숲 속이란 뜻이다.[33] 강희자전에 계“雞:鷄”자 풀이에 그 내용이 실렸다. 남월을 정벌하고 설치 했던 울림군(鬱林郡) 즉 계림군에 옹치현(雍雞縣)이 속했다. 울자와 치자를 바꾸었다고 한다. 치자는 산서성 사람들이 태사 주의 지도 믿에서 금석문 으로 “籀文作鷄” 남긴 글자에는 계(鷄)를 계(雞)로 적든 글자로 백익의 후손(夏后氏以雞彝)을 뜻한 상형글자 였다.[34] 그들이 사방에 흐터져 살았다. 명나라 때 이시진(李時珍;1518-1593년) 설명 하기를 계는 여러종 (鷄類甚多)이다. 조선, 여양, 워남, 월해, 촉국는 큰놈, 형에는 작은 놈 (大者曰蜀,小者曰荆) 그 병아리를 “其雛曰𪅏”라 했다. 방언에는 어음도 뜻도 설명이 없는 글자(𪅏)를 천진-당산일대에서는 알을 품은 닭을 포라 했고 부화 안된 알을계흙 열(涅)이라 했다.[35] 예기에는 한이라 鷄曰翰音 시외전에 이르기를 계에는 다섯가지 덕(鷄有五德)이 있다고.[36] 광동성 계림일대를 월남 역사서에는, 조선과 지나(支那,朝鮮)는 통킹만 지역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舊好)라 했다.[37]
예맥 (濊貊)족은 계속하여 태행-연산 산령에 살았다. 우쩍 일어날 발(勃), 즉 우뜩히 떠오른 햇(海)빛이 보이는 높은 산이 있는 지역이다. 수경주에 실린 발해지 속현 (勃海之屬縣)은 조선, 아사달, 또는 진(晉)과 같은 뜻이 숨은 글자로 태행산맥 일대를 묘사 했다. 그 곳에 높은 산 셋을 (蓬萊, 方丈、瀛洲) 삼신산(三神山) 이라 하여 선인 (僊人, 蓬萊仙人, 蓬萊神仙) 이 산다고 했다. 이렇게 전해 오던 전설을 잘못 인식 하여 바다에 젊은이들을 보내 不死藥 不死草를 구해 오라고 했다. 삼국지 오주부전을 보면, 그 들이 도착한 섬이 복건성 해안에 가까운 바다에 있는 섬 단주 (亶洲) 즉 동이들이 사는 이주(夷洲, 島夷) 오늘의 대만 (Formosa)에 도착 했다.[38]
. 수나라가 남쪽에 있던 진나라와 싸우다 배가 그섬에 표류했다.[39] 그 섬 (𨈭牟羅國)은 남북이 천이 동서가 수백리(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라 했다. 이를 백제 섬이라고 풀이 하여 [진시황이 보냈던 사람들이] 제주도 한반도, 또는 일본에 갔다고 한다. 제주도란 이름은 신라가 백제 땅의 행적구역을 바꾸면서 백제 주군현(百濟州郡縣)이란 문구에서 백제의 섬이였던 대만이 제주도가 되었다.[40]
태행-연산 산맥을 주 무대로 했던 고조선 땅을 지나 발해(渤海,海)로 들어가는 해하 (海河) 수계에 상나라 재상 기자 (箕子)가 경계를 이루었던 기수(淇水)를 지나 조선으로 갔다. 기(淇)자와 꼴이 비슷한 글자를 택해서 한무제 때에 국경을 폐수 (浿水)라 했다. 상해관을 지난는 대석하다.
예맥족의 궁정 앞을 지나는 여울을 호타하(滹沱)라 했다. 호타란 글자를 보면 호 (滹,胡. 沱,他:우리 와는) 다른 사람이 사는 마을을 지나는 여울이란 뜻이다. 그 곳에 조나현 (朝那縣)이 있었다. 흔히 사 또는 시 라고 읽는 고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나는 여울 (斯水)의 한 지류를 묘사 했다. 호타란 이름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붙인 이름이라 선진문헌에는 실리지 않았다. 위진시대 부터 나타난다.
신라 수도 경주(慶州)의 유래:
오늘의 한반도 경주시(慶州市)는 왕건(王建)이 붙인 이름이다.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867년 ~ 936년)에게 수모를 당한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에 스스로 나라를 바쳤다. 고려 태조 왕건이 장녀 낭랑공주를 신라 왕의 부인으로 하고 신라 수도를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고, 경기 지역을 경주 (慶州)라 했다.[41] 같은 내용이 고려사에도 실렸다.[42] 이때 처음으로 한반도에 경주란 이름이 나타났다. 큰 딸을 낭랑공주라 한 사연이 알려 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보다 고려도경이 먼저 편술 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에 반항했던 고구려 부흥운동이 망하자 만주에 있던 신라(新羅잔여) 세력은 돌궐과 말갈 지역으로 도망가고, 옛 위만조선 경기 지역에 살던 고려 왕씨(王氏) 유래를 간략히 남겼다. 왕건이 후당 (後唐; 923-937으로 부터 현토 도독으로 임명 받았다. 왕건이 죽고 아들 무, 손자 소 (武卒子昭) 가 뒤를 이었다. 왕씨의 기록을 잃었다. 낭랑공주, 낭랑공 하는 이름은 모두 남만주 낭랑 땅과 관계가 있는 사람에 붙였다. 왕건은 만주에서 내려 왔다.
고려도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중국 여러 사서에는 한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예기가 혼미하게 많이 실렸다.[43] 신라 또는 그를 전주한 글자는 동북아시아 전역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만주 땅에 나타난다. 금나라의 선조가 신라 사람이고, 청나라 황실은 애신각라 라는 글자를 썼다. 신라를 사랑하니 잊지 말라는 뜻이다. 경(慶)자는 “축하할 만한 일”이란 뜻으로 고전에 많이 쓰인 글자다. 맹자에 춘추오패(五霸)를 설명한 내용에 경사스러운 땅(慶以地) 이란 문구가 있다. 경주란 전승에서 얻은 지역이란 뜻이다.[44]
오랜 혼란 끝에 중원을 통일한 수문제(隋文帝, 541-604)는 새로운 계획을 뜻했다. 상서에 나오는 유신 (維新)이란 단어가 일본과 한국 정치가들이 인용 했다. 실천은 못하고 생각만 했다 하여 위징은 유신 (惟新)이란 글자를 썼다. 통전에 따르면, 옛 옹주편(古雍州)에 서쪽 감숙성 지역에 변두리에 새로 얻은 땅에서 조공을 바치는 지역에 경주 (慶州)란 이름을 붙였다.[45]
한반도에 처음으로 진입 했던 당나라 역사 기록에는 모두 신라 영역을 계림으로 기록 했다. 경주란 이름을 한반도에 남기지 않았다. 경주(慶州)란 이름이 서남쪽 지역에 사는 남소 만(南詔蠻)과의 전쟁에서 나타난다.[46] 현종은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 ~ 756년)을 보내서 서남이를 토벌 했다. 서남이와 751년 751년 두차례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가 사양길에 들었다.[47]
결론: 경주(慶州)란 이름은 신라 김씨의 시조 김일제가 잡혔던 감숙성에 붙였던 이름이다. 남조 마지막 진서(陳書)에는 신라국(新羅國) 과 임읍 (林邑國)이란 남국이 사신을 보냈다. 천진항 일대에서 중원의 동남쪽 해안으로 옮겨 갔던 신라의 한 부류가 한 때는 왜오왕으로 알려진 부여씨의 통치영역에 있었다. 중국 서남 산악 지역으로, 또는 해안을 따라 인도 동남지역에 까지 이르렀었다. 그들이 계림이란 이름을 남겼다. 그 한 부류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신라왕국을 세웠다. 그 해안선을 따라 남방불교 가 한반도에 전래 되어 불가에서 쓰는 글자가 신라와 가야에 남아 있다.
경주(慶州)란 글자는 전승에서 얻은 지역이란 뜻이다. 계림(雞林)이란 글자 또한 패백을 바치는 예속된 지역을 뜻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신라의 경기지역을 경주(慶州)라고 이름 했다.
끝.
October 9, 2021. Revised October 20, and November 23, 2021
[1].大唐西域記: 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載佇風徽。召見青蒲之上。乃眷通識。前膝黃屋之間。手詔綢繆。中使繼路。俯摛睿思。乃制三藏聖教序。凡七百八十言。今上昔在春闈。裁述聖記。凡五百七十九言。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凡六百五十七部。具覽遐方異俗。
[3]. 詩經 商頌 那: 詩說 商頌: 祀成湯之樂歌. 冉,阝:《玉篇》同那)
[4].利簋銘文:: 珷征商隹(唯)甲子朝歲. 金用乍(作)旜公寶尊彝
[6]. 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南齊太祖建元元年五月河南王吐谷渾拾寅迦羅國王荷知並遣使貢獻
[7].隋書: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羅。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 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
[8]. 晉書: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9]. 水經注 大遼水: 東南入塞,過遼東襄平縣西 應劭曰:今昌黎也。高平川水注之,水出西北平川,東流逕倭城北,蓋倭地人徙之. 三國志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為王。진수가 汗자를 (倭)자로 바뀌다.
[10]. 水經注 大遼水: 漢高帝八年,封紀通為侯國,王莽之昌平也,故平州治。又南逕遼隊縣故城西,王莽更名之曰順睦也。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即是處也.
[11]. 十六國春秋: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髙麗王奪其侍人,取其太子王仁為質,
弘忿怒之,遣使上表求迎於建康.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왜오왕.
[12]. 三國史記 新羅本紀: 國號徐那伐。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 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三國遺事: 有似秦語。故或名之為秦韓。有十二小國。各萬戶。稱國。又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故取涿水之名。稱所居之邑里。雲沙涿。漸涿等羅人方言。
[13]. 說文解字: 𧧛𧧛,多語也。从言冄聲。樂浪有𧧛邯縣. 《前漢·地理志》䛁邯,樂浪郡所屬縣.
[14]. 揚子法言: 命者,天之命也。命不可避也。」或曰:「顏氏之子,冉氏之孫。」曰:「以其無避也
[15]. 廣韻 餘:殘也,䞉也,皆也,饒也,姓晉有餘頠又漢複姓三氏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6]. 廣韻 歌 那:何也,都也,於也,盡也,詩云受福不那那多也,亦朝那縣名在安定又姓西魏揚州刺史那椿。《說文》本作𨙻。俗作𨚗. 《玉篇》俗言那事.
[17]. Wikipedia: Love Story Between a Persian Prince and a Korean Princess。https://en.wikipedia.org/wiki/Farang.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왜오왕.
[18].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Legge. Max Müller. https://en.wikipedia.org/wiki/Sacred_Books_of_the_East.
[19]. 三國史記 檢索 “花郞”:始奉源花 遂簡美女二人。二女爭娟相妬。其後更取美貌男子妝餙之,名花郞,以奉之.《新羅國記》曰:「擇貴人子弟之美者,傅粉妝餙之,名曰花郞,國人皆尊事之也。」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謚曰真興,葬于哀公寺北峯。王㓜年卽位,一心奉佛,至末年祝髮被僧衣,自號法雲,以終其身
[20]. Wikipedia: Love Story Between a Persian Prince and a Korean Princess。https://en.wikipedia.org/wiki/Farang.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왜오왕.
[21]. 三國史記 新羅本紀: 真興王 三十七年春,始奉源花。初,君臣病無以知人,欲使類聚羣逰,以觀其行義,然後舉而用之。遂簡美女二人,一曰南毛,一曰俊貞,聚徒三百餘人。二女爭娟相妬,俊貞引南毛於私第,強勸酒至醉,曳而投河水以殺之。其後更取美貌男子妝餙之,名花郞,以奉之。 三國遺事: 有似秦語。故或名之為秦韓。有十二小國。各萬戶。稱國。又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故取涿水之名。稱所居之邑里。雲沙涿。漸涿等羅人方言。
[22]. 高麗史. . 高麗史節要. 高麗圖經.
[23]. 三國志倭人傳: 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女王國東渡海千餘里. 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24].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南夷、西南夷,大抵在交州之南及西南,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25]. 大唐西域記: 昆明: 山經莫之紀。王會所不書。博望鑿空。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26].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Zen Buddhism in NEA. Seafaring in the NEA.
[27]. 通典 指南車: 魏明帝青龍中,令博士馬鈞紹而作焉。車上有木仙人,舉手恒指南。車箱迴轉,所指微差。晉亂復亡 東晉義熙十三年,劉裕平長安,始得此車,復修之。一名司南車。駕駟其下,制如樓,三級,四角金龍銜羽葆。刻木為仙人,衣羽衣,立車上,車雖迴運,而手恒指南
[28]. 十六國春秋 卷二十二後趙錄十二: 解飛,不知何許人。機巧若神,妙思竒發。虎至性好佛,眾巧奢麗,不可勝紀。飛嘗為虎作檀車,廣丈餘,四輪作金佛像,坐於車上,九龍吐水灌之。又作一木道人恒,以手摩佛心腹之間。又十餘木道人,長二尺餘,皆被袈裟繞佛,行當彿前,輒揖禮佛。又以手撮香投爐中,與人無異。車行,則木人行龍吐水,車止則止。又有指南車及司理車 https://bf.wiki2.wiki/wiki/Xie_Fei_(inventor)
[29]. 太平御覽 新羅: 龍朔三年,詔以新羅國為雞林州都督,授其王金法敏為雞林都督。法敏卒,其子政明嗣位
[30]. Wikipedia: The 1,500-Year-Old Love Story Between a Persian Prince and a Korean Princess that Could Rewrite History。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왜오왕.
[31]. Wikipedia: 鬱林郡,為中國古代行政區劃之一,秦朝時置「桂林郡」,漢武帝以後改稱「鬱林郡」。秦、漢時郡治設於布山縣,即今廣西桂平市西,轄境集中在今天的廣西壯族自治區境內
大越史記全書/外紀卷之二:九真、日南三郡戶籍迎降。路博德因拜三使者為三郡太守,治民如故〉。遂以其地為南海〈秦故郡。今,明廣東是也〉、蒼梧〈唐曰益州,古甌貉,我越之地〉、鬱林〈桂林郡,漢武更名〉、合浦〈秦象郡,廉州之屬郡〉、交趾、九真、日南〈秦象郡〉、珠崖、儋耳〈並在大海中〉九郡。自是漢始置刺史
[32]. 逸周書 王會解: 青丘狐九尾,周頭煇羝,煇羝者。黑齒白鹿白馬. 太平御覽 南蠻五 黑齒諸蠻:《南夷志》曰:黑齒、金齒、銀齒、繡腳四蠻,并在永昌關南,雜種類也。黑齒,以漆漆其齒
[33]. 水經注 淇水:《山海經》曰:淇水出沮洳山. 右則淇水,自元甫城東南逕朝歌縣北. 濊水出焉. 清漳逕章武縣故城西,故濊邑也,枝瀆出焉,謂之濊水.《魏土地記》曰:章武郡治。故世以為章武故城,非也。又東北分為二水,一右出為淀,一水北注滹沱,謂之濊口。清漳亂流,而東注于海。《地理志》:勃海之屬縣也。《魏土地記》曰:章武郡治。故世以為章武故城,非也。一右出為淀,一水北注滹沱,謂之濊口。清漳亂流,而東注于海。
[34]. 大越史記全書序: 安南與暹羅,地相近也,風土相似也,疆域、人口相若也. 我日本嘗同文軌者,為支那、為朝鮮、為安南。支那、朝鮮於我有舊好;而安南古或有我船舶至其國者,蓋西邊商估以財貨往來耳
[35]. 方言 第八: 雞,陳楚宋魏之間謂之鸊𪀍,桂林之中謂之割雞,或曰𩀨。北燕朝鮮洌水之間謂伏雞曰抱。爵子及雞雛皆謂之𪅏。其卯伏而未孚始化謂之涅
[36]. 康熙字典 隹部: 鷄:鷄者,稽也。能稽時也。《易·說卦》巽爲鷄。《詩·鄭風》女曰鷄鳴。《禮·曲禮》鷄曰翰音。《韓詩外傳》鷄有五德:首帶冠文也,足搏距武也,敵在前敢鬭勇也,見食相呼仁也,守夜不失信也. 魯鷄又其大者。李時珍曰:鷄類甚多。朝鮮一種長尾鷄。遼陽一種食鷄。南越一種長鳴鷄,晝夜啼叫。南海一種石鷄。蜀中一種鶤鷄,楚中一種傖鷄。江南一種矮鷄。廣志云:大者曰蜀,小者曰荆,其雛曰𪅏。《爾雅·釋畜》鷄大者蜀,蜀子雓。《郭註》今蜀鷄也
[37]. 大越史記全書序: 安南與暹羅,地相近也,風土相似也,疆域、人口相若也. 我日本嘗同文軌者,為支那、為朝鮮、為安南。支那、朝鮮於我有舊好;而安南古或有我船舶至其國者,蓋西邊商估以財貨往來耳
[38]. 三國志 吳主傳:亶洲在海中,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世相承有數萬家,其上人民,時有至會稽貨布,會稽東縣人海行,亦有遭風流移至亶洲者。所在絕遠,卒不可得至,但得夷洲數千人還.
[39]. 隋書: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歷十餘代,代臣中國,前史載之詳矣。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經于百濟. 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
[40]. 三國史記 百濟本紀第四 涉羅為百濟所. 耽羅,卽耽牟羅。隋平陳。有一戰船,漂至耽牟羅國, 其船得還. 雜志第六: 右百濟州郡縣,共一百四十七,其新羅改名及今名,見『新羅志』
[41]. 三國遺事 卷第二: 太祖出郊迎勞。賜宮東一區今正承院以長女樂浪公主妻之。以王謝自國居他國. 侍從員將皆錄用之。改新羅為慶州。以為公之食邑。初王納土來降.
[42]. 高麗史: 於是 拜金傅為政丞位太子上歲給祿千碩創神鸞宮賜之其從者 收錄優賜田祿除新羅國為慶州仍賜為食邑。
[43]. 高麗圖經 新羅遺民散奔突厥靺鞨高氏旣絕久而稍復至唐末遂王其國後唐同光元年遣使來朝國王姓氏史失不載長興二年王建權知國事遣使入貢遂受爵以有國云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一
[44]. 水經注 淇水:《山海經》曰:淇水出沮洳山. 右則淇水,自元甫城東南逕朝歌縣北. 濊水出焉. 清漳逕章武縣故城西,故濊邑也,枝瀆出焉,謂之濊水.《魏土地記》曰:章武郡治。故世以為章武故城,非也。又東北分為二水,一右出為淀,一水北注滹沱,謂之濊口。清漳亂流,而東注于海。《地理志》:勃海之屬縣也。《魏土地記》曰:章武郡治。故世以為章武故城,非也。一右出為淀,一水北注滹沱,謂之濊口。清漳亂流,而東注于海。
[45]. 孟子 告子下: 五霸者 入其疆,土地辟,田野治,養老尊賢,俊傑在位,則有慶,慶以地。 顯示全文. 通典州郡三 古雍州: 慶州今理安化縣。周之先不窋所居。春秋時義渠戎之地。秦滅之,始皇以屬北地郡。二漢因之。西魏置朔州。後周廢。隋文帝置慶州,煬帝初置弘化郡。大唐復為慶州,或為安化郡。領縣十.
[46]. 舊唐書 卷一百九十六下 吐蕃下:語在《南詔傳》黃少卿攻陷欽、橫、潯、貴四州,吐蕃渠帥論乞髯蕩沒藏悉諾律以其家屬來降。十二年九月,吐蕃寇慶州及華池縣,殺傷頗甚。
[47]. 舊唐書: 天寶末,楊國忠用事,蜀帥撫慰不謹,蠻王閣羅鳳不恭,國忠命鮮於仲通興師十萬,渡瀘討之,大為羅鳳所敗。鎮蜀,蠻帥異牟尋歸國,遂以韋皋為雲南安撫大使,命使冊拜,謂之南詔。咸通中,結構南海蠻,深寇蜀部。西南夷之中,南詔蠻最大也。領縣二。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