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 of Tibetan Buddhism and Maitreya of Korea.
Abstract: Origin of Tibetan Buddhism and Maitreya (미륵신앙, 彌勒信仰) of Korea is explored. Taoism (道敎) is originated from the mythical yellow emperor whom the Chinese made out of the legendary god-king of Gojoseon. Elder refers the followers of Baek-Ik(伯益) who had the title Dangun Wanggeom (壇君王儉). One band of Baek-Ik followers had moved through the Sichuan Basin (四川省, 益州) to southwest and reached to the eastern slope of Himalaya Mountains that was the barren land (隨地) to the Indian ruling class and spread their faith to the local Hu. The locals believed the elders came from the earthly paradise Shangri-La. Tibetan Buddhism spread down to the Mainland of India and further west during the heyday of King Ashoka. Tibetan monk Jia Yemoteng (迦葉摩騰) took pilgrimage to the birth place of Golden Idol (金人), through the ancient Tea and Horse Route((茶馬古道) arrived in the Capital (洛陽) of Han dynasty and found the mystical sacred lake (神池) that is the PSMC of Xiechi Lake (解池) in the east of Yellow River. The mythical sacred lake is the Dian Lake (滇池), also known as Kunming Lake (昆明湖) in the Yunnan, China. The SW mountainous region was called Nanzhao (南詔) and out of Chinese domain. During the era of Eastern Jin, primitive Tibeta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China through the sea route and reached to the southern part of Korea. Along the long trail, Tibetan Buddhism assimilated to the local faith. It is current Korean sect of Buddhism known as Maitreya(彌勒信仰).
ps: 앞서 장구하게 설명 했던 “Origin of Tibetan Buddhism and Maitreya of Korea.” 과 미륵신앙 (彌勒信仰)의 유래 내용을 정리하여 몇차례에 걸처 올립니다.
서쪽에서 나타난 불교가 후한 명제 (明帝, 58~75년) 때에 전래 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와 여러 불교 경전 또는 역사서에도 그렇게 설명 했다.
불교는 크게 세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 왔다. 서역불교와 남방불교의 전래는 경로와 시대가 밝혀 졌다. 그러나 중원 세력에 알려지지 않았던 차마고도를 통해 운남성 일대에 전래된 원시불교에 관한 기록은 미흡하다.
황로 사상이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 동북쪽 산악 지대 수지(隨地)에 전래 되었다. 현지인들은 촉국 사람들이 사는 수지를 하나의 국가로 인식 했다.[1] 수지 사람들은 새로 정착한 곳을 좋은 뜻으로 인도 (印度)라 했다. 인도 지도자에게는 수지 사람들이 믿던 종교가 세로웠다 하여 무위지교 미신 (無為之教彌新)이라 했다. 그곳에서 원시 불교가 나타 났다. 미륵(彌勒) 이란 “말굴래를 체운 지도자”란 뜻이다. 이를 “Maitreya,新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昧怛[口*履]曳。菩薩之姓也。譯曰慈氏。 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稱”라고 풀이 한다. 산서성 태원에 자씨 현(太原故慈氏縣)이 있었다. 남흉노가 자리 잡은 산서성 분수연안 (汾:水名在太原本漢兹氏縣地屬西河郡魏於兹氏縣置西河郡今州城是也)이다. 그 지역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토속 신앙에서 미륵 신앙이 나타났다.
같은 길을 따라 낙양에 전래 되여, 서진 말기에 불교 경전이 번역 되기 시작 했다.
당나라 초기에 당태종(唐 太宗 李世民: 599-649년)의 지시에 따라 현장 (玄奘:602-664년)이 서역을 다녀온 견문록이 대당 서역기(大唐西域記)다. 서진 시대에 나타난 루탄경(樓炭經)에 실린 옛적 불교식 이름(舊曰,舊云)을 현장이 토를 달아 당나라 언어 (唐言)로 풀이 했다.[2] 부도(浮屠)란 글자는 없고, 유목민의 지도자를 뜻하는 한 (韓, Kahan, Khan)을 한나라 한자 (漢)로, 노자 도덕경과 도가 에서 쓰는 문구를 인용한 자를 이노 (李老)와 한자(韓子曰) 라 했다.[3]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불경에 많이 나오는 수미 도솔 하는 글자는 옛적 변역당시의 사음자라고 설명하느라 단 한번씩 나타났다.[4] 수미산은 옛적에 묘고산(唐言妙高山。舊曰須彌)을 뜻하고, 동서남북 네곳을 통치하며 수미를 보호하는 자를 사천왕(四天王)이라 했다. 금은동철륜왕(輪王)이라 이름했다. 금륜왕 (金輪王)이 사방(四方)을 모두 다스린다.[5] 불상을 황금 으로 입히는 연유다. 그 곳에 전륜성왕(輪王之苑囿)이 기거 했다. 인도 동북 쪽 차를 많이 생산 하는 지역(烏鐸迦漢荼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6]
도솔타 또는 도설술이란 용어는 [제일 높은 미로(迷路 Maze)가 되살아 났다는 산 (蘇迷盧山)에서 친히 묘상을 보았다]는 뜻이 라고 했다. 제일 높은 산에 다시 나타났다는 묘상이란 표현은 [요순시절에 삼묘 환두(驩兜) 를 북쪽 공공국에 있는 항산에 귀양을 보냈던 무리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아라한(阿羅漢, 阿羅呵,阿羅呵) 이라고 기록된 인물 설명에 나온다.
여정을 마치고는 운남성과 사천성을 지나는 곤명도가 막혀(昆明道閉) 먼 길을 돌아 처음 불경을 전한 스님(摩騰入洛)이 경전을 보관했던 석실 (經藏石室)은 후한의 수도 (東京明帝之初,낙양 가까이에 있었다.[7] 설문해자에 스님을 부도도인(僧:浮屠道人也), 루탄경에는 (浮圖)이라 했다. 삼국지 왜인전에 노자가 가르쳐서 임아국의 호가 부도사 되었다 (胡為浮屠)란 떠돌이 생활을 부랑민 (vagabond)이란 뜻이 있다. 시경 조풍에 나온다. 글자와 그림이 나왔다는 황하문명 발생지를 뜻했다.
한무제 때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이 다녀온 천산 남로를 따라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다. 그 길로 서역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 왔다고 한다. 잘못이다. 장건이 대하에서 촉국 상품(見邛竹杖,蜀布)을 보았다. 또한 촉(蜀)국 상인이 천독(身毒)국과 교류가 있다는 예기를 들었다.[8]
인도 동북쪽, 아쌈 (Assam) 지역과 운남성 접경에 서는 서로 의사 소통을 자유로이 했다는 뜻이다. 인도를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그 하나가 시(斯) 자다. 사마상여는 천자가 다스리는 지역을 대표한 가상 인물을 무시공 (無是公)이라 했다. 인도 북부(北印度境)는 높은 산이 눈으로 덥혔다. 그 곳에 이를 지 (至) 나(那) xx 하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그 나라를 당나라 말 (唐言)로는 xx 라 한다고 설명 했다. 뒤에는 지나 (至那)는 예적 왕의 국호라고 했다.
중원세력의 제일 서쪽 지역을 진시황의 선조가 다스렸다. 인도의 아소까왕 때에 중앙아시아 에 살던 사람들이 [아침 햇님이 뜨는 동쪽 땅이란 뜻에 진단(震旦)이라] 했다. 하여 지나(至那)는 진시황이 다스리던 영역이란 뜻라고 풀이 했다.
현장은 아쌈 동쪽 큰강을 지나 불교가 번창 했던 지역 또한 지나 (至那)로 기록 했다.[9] 루탄경 (樓炭經)에 있다는 “震旦을 振旦”으로 기록 하고 지나 (至那)란 글자를 남겼다. 지(至)자는 [몹시. 극진히, very, extremely,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훈역하면 풍요로운 땅 나(那)에 이른다 뜻이다. 지나(至那)는 지상 낙원을 묘사한 글자다. 영어로 풀이 하면 “reach to (至) Shangri-La(那)”가 된다. 지상낙원 Shangri-La라는 곳이 운남성에 있다.
후에 나타난 당 현종이 정복하지 못한 서남지역, 당시 남조(南詔)를 읊은 시문 제범서 (題梵書)에서 대당서역기에 실린 지나 (至那)를 지나 (支那)로 바꾸었다.[10] 파촉으로 알려진 서남쪽에는 현장 스님 이전 부터 강력한 국가 남조(南詔) 가 있었다. 수서에는 양자강 남쪽으로 피란 간던 백제에는 승려와 불탑이 많다(僧尼,多寺塔)라 했다. 그들이 차마고도를 따라 인도 동북쪽 사람들(胡)에게 황노사상을 전달 하여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백익이 받았던 제정일치 통치권이 현제 달라이라마의 가 인도 하는 티뱃 불교 에 남아 있다. 티뱃에 전래 되었던 도교사상이 원시불교로 변신하여 중국에 들어와 토착 신앙을 흡수하여 대승 불교 가 나타났다.
다음에 계속. November 26, Revised December 5th 2021
도교(道教)에 심취 했던 동진(東晉)의 갈홍(葛洪, 283년 ~ 343년)이 서경잡기에서 곤명호수 (昆明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이 어려서 다녀왔다고 했다.[11] 서역기에 무위지교미신(無為之教彌新)이란 문구가 있다. 도덕경의 핵심이 인도의 지도자에게는 새롭다는 뜻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석가모니 탄생지 임아국(臨兒國lín ér guó[梵Lumbinī] 佛)에 관한 기록이 있다.[12] 그곳에 [老子가 가서 胡, 즉 천축국 지도자에게 도덕경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동진의 도안(道安: 312-385) 이 인용 했다. 언어를 서로 이해 할수 있었고, 스님들이 도덕경 두편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見譯家用道德二篇)라 했다.[13] 무위(無爲) 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한때 인도 전역을 통치 했던 마우리아 제국(Maurya Empire:기원전 320년-기원전 185년) 왕의 호칭으로 사용 했다.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지도자를 인도어로 아수가 (Aśoka, 阿輸迦)라 했다.
그가 진시황 이전에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여 아프카니스탄을 거처 중앙 아시아에 까지 이르서 서역 불교가 나타났다.[14] 쇠약해 가던 인더스 계곡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이 원시 불교로 바뀌었다.
아수가 (Aśoka, Ashoka:阿輸迦)를 당나라에서 아육왕 (阿育訛也王) 으로 기록 했다.[15]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을 시황 (秦始皇) 이란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듯, 인도에서는 최고의 지도자를 무우왕 (無憂王, 阿育王) 이라 했다. 불교국가 다섯을 해초가 다녀와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을 남겼다.[16] 중앙아시아 불교국 사람들이 아침에 해가 뜨는 동쪽 땅을 진단 (震旦)이라 했다. 서역 대월지국에서 온 사신으로 부터 불경 내용을 말로 전해 들엇다. 단 (旦)이란 어음이 탄(Tan)으로 전해온다.
글자 속에 사실이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칭호에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의 상형글자”라는 글자에 유목민(牟)이란 뜻이다. 대당서여국기에는 뜬금 없이 명나라 때(大明永樂; 1405) 인도양을 항해 했던 정화(鄭和) 예기가 실렸다.[17] 진귀한 보물이 많이나는 섬나라 스리랑카(Sri Lanka)를 돌아 왔다. 나라국자 앞에 붙은 가라(伽羅)는 타가라(Tagara; 多伽羅) 란 향목 을 간략해서 적은 사음자다. 이 나무多伽羅之略,香木名 태운 냄새를 뜻한 글자다. 현장이 다녀온 여러 곳에 가라국이 있었다. 이를 무우왕(無憂王)이 다스렸다. 낙양에 불경을 전했다는 마등(摩騰)이란 글자는 석가모니와 같은 유목민(摩, 牟, 坶野.牧野之戰)이었다. 루탄경에는 震旦, 불어비구 그산심요 (佛語比丘.其山甚樂)란 문구가 있다. 이러한 글자속에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인도(印度)의 어원: 송고승전에 인도란 글자가 보인다. 그러나 수당 역사서 남조의 송서 宋書 양서 陳書에는 없다. 강희자전 에도 없다.
광동성에 부임했던 임칙서 (林則徐)가 사주지(四洲志)를 만들었다. 이를 근거로 위원(魏源; 1794년 ~ 1857년) 이 편술한 해국도지 (海國圖志)에 인도가 실렸다. 그 전에 일본에서 인도란 이름을 사용 했다. 인도란 글자는 따를 수, 게으를 타 라고 읽는 곳 (隨地) 불가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18] 현장이 활동한 시절의 역사서 구당서에는 “隨地之宜, 隨地治畜牧” 하는 글자가 보인다. 인도(印度)란 글자는; 그지역에 살던 현명한 최고의 지성인 현두 (賢豆 Hindu)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도덕경(道德經) 내용을 인용 했다. 천부인 (天符印)을 전(度)한 곳이다. 수지(隨地)에 갔던 노자가 전했다.
히말리아 (Himalayas ) 동쪽에서 산맥의 남서쪽을 지나 인도양에 이르는 인더스(Indus River, Hindus) 강이 있다. 흰두교 (Hinduism) 의 발생지다. 만(卍)자와 옴(Aum)이란 문양이 있다. 온 새상에 가득 하다는 한글로 옛적에 백(百, one hundred)을 온으로 읽었다. 이는 모두 밝은 햇볓을 뜻하던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어음(語音)에서 류래했다.
흰눈에 덥힌 히말라야 (Himalaya) 산맥을 등지고 흐르는 인더스(Indus 흰두)강 이란 어음을 불교 발생지에 붙인 이면에 그 어원이 있다. 영어로 기록한 어음 에는 “흰 머리, white haired head, elder, 老子”란 뜻이 있다. 치수 하업을 하조던 융우의 혈통을 밝혀 禹를 소우(cow)로 인식하여 소를 신성시하는 풍습이 되었다.
천축(天竺)국을 부르는 이름이 많았다. 인도를 당나라 언어로 달(月)이라 했다. 달의 모양이 변하듯 이름 또한 다양하다. 옛적에 신독 또는 현두(身毒 或曰賢豆) 라고 부르던 곳이다. 그 중에 하나가 천할 시(斯) 라고도 했다.[19] 원시불교가 탄생한 지역은 인도의 지도층 파라문(Brahmin, 婆羅門)이 다스리던 지역 밖이다. 히말라야 산맥 동남 쪽 운남성 경계의 오지를 타지 (隨地)라 했다. 이곳에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촉국 사람들이 정착 했다. 제사고기 나눌수 (隋)자에 멀리서 왔다(辶)는 뜻이다. 그 곳에서 석가모니 (釋迦牟尼)가 죽은 후에 미륵(彌勒)이 나타났다. 미륵을
자씨 (慈氏) 이름은 아릴다(名阿逸多), 무능하여 이길수 없다는 뜻(譯曰無能勝)이라 했다. 예맥족(斯)의 지도자란 뜻을 자석(magnet) 에 비유한 표현이다.[20]
국종사 장병린은 청말에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난 자칭 애국자라한 자들을 석가모니가 죽은 후에 나타난 미륵이라 부르던 자들과 같다고 통탄 했다.
불교 문양(佛教Logo)에는 삼태극 문양(文樣, 紋樣)이 있다. 한국에서 국기로 쓰는 태극기의 원조가 삼태극이다. 단군설화에 나오는 세 보좌관 風伯 雨師 雲師가 삼랑신(三郞神; 𣬛郞神), 삼극(三極)으로 표기 되었다.[21] 삼랑(𣬛郞) 은 장도(銀粧刀)를 지닌 세 유목민 이란 뜻이다. 이들이 백익을 수호하다 죽어 모두 별이 되었다. 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삼태성 (三台星), 북두칠성과 젼우직녀 설화가 모두 백익 살해로 나타났다. 천부경 (天符經) 에 실린 무시일시(無始一析)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무우왕 無憂王 이란 칭호가 나왔고, 만卍자와 태극 문양을 원시 불교에서 인용 해 갔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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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첫 불교 경전:
황로사상, 즉 왕검조선의 가치관이 차마고도를 따라 히말라야 동쪽에서 원시 불교로 나타났다. 그지역 사람들은 운남성 사람들과 언어가 통했다. 불경에는 운남성에서 들어간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어휘가 있다. 언어학자 들이 분류한 “Sino-Tibetan Language”의 근간이 되었다. 불경이 같은 길을 따라 후한 초에 중원에 전래 되었다.
그에 앞서 인도 아소까(Aśoka)왕 시절에 인도서쪽을 지나 중앙 아시아에 까지 원시 불교가 파급 되었다. 당시에 동서남북 사방에 마명(馬鳴) 시파 (提婆) 용수(龍猛 龍樹) 동수(童受) 네사람의 현명한 스님이 있어 사일조세 (四日照世) 라 한다.[23] 마명(馬鳴)은 인도의 최초의 불교 시인이다.
남인도(南天竺)의 브라만(Brahmin,婆羅門) 출신의 용수 (龍樹)가 불교 발생지에 올라가 노승 (老比丘. 李老; 妙雲相佛) 으로 부터 들은 원시불교 내용을 경전으로 만들어 중앙아시아에 알려 졌다.[24]
산스크리트어(saṃskṛtā)를 범어(梵語)라 한다. 삼시(三示, 參斯, 參禪) 라는 어음이 들어 있다. 불경 비구 梵語 梵文 등등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많은 고유명사 또는 형용사는 왕검조선과 관계 있는 사연들을 가차전주한 글자다. 고조선 땅이었던 진(晋)나라의 범선자(范宣子)는 洪範의 범자에서 성씨를 택했다고 한다. 같은 어음의 범(范,範)씨가 남긴 글자가 범문(梵文) 이라고 본다. 운남성에는 불교 스님이 쓰는 부적(符籍)의 글자와 비슷한 문자가 있다. 홍산문화권전욱고양씨가 남겼다는 록도(綠圖, 錄圖)란 글자의 변형이 범문(梵文)이란 뜻이다.
사기에 서남 파촉지역을 설명 했다. 은유풍으로 알려진 사마상여전 (司馬相如:179년 ~BC 117년)에는 세 지역; 산서성과, 산동 제나라의 오유선생(烏有先生), 그리고 남쪽 초나라 를 사마상여 자신이 거짓말 쟁이 자허(子虛)로 등장 한다.[25] 사천성 촉군 사람이었던 그는 산서성 사람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하여 상여란 이름을 택했다. 주 무왕을 도았던 강태공, 태공망이 강성 여씨(姓姜, 氏呂)로 산서성 사람이다. 산서성 진양을 지나는 분수(汾水) 로 이어지는 강수(降水)를 여러 글자로 썼다. 그 곳이 백의민족의 시원이다.[26]
무시공(無是公)에서 무우왕 (無憂王)으로:
사마상여는 “無是公, 無是人也,明天子之義”라는 문구를 남겼다. 무시공은 현명한 천자란 뜻이다. 무시공 (無是; shì, zhiɛ̌, xi)이 서역전에 나오는 무우왕 (無憂王)과 같은 뜻이다.
불학대전에는 천축국을 신독(身毒)국이라 했다. 신독국에 가상인물 황제헌원 (軒轅)이 살았다.[27] 산해경에 나온 천독 (天毒)이 다스리던 조선을 신독국 이라 했다.[28] 천독이 북쪽에서 상나라를 괴롭 혔다. 상 무정이 도깨비가 사는 북쪽지역 괴방(高宗伐鬼方)을 정벌 했다. 황제와 싸웠다는 치우 (蚩尤) 천왕을 도깨비로 묘사 한다. 남월왕 조타 (趙他南越王),즉 남조의 지도자는 황옥에 살면서 치우천왕이 들었던 둑기(纛)를 달았다. 조(趙) 씨는 까마귀烏에서, 새 조자 鳥로, 다시 나라 조자로 바뀌었다. 사천성 서남쪽 남월의 선조는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삼서성 에서 나왔다.
한무제 (漢武帝) 당시 서역을 다녀온 장건(張騫.?~BC 114) 보다 앞서 촉국 상인이 차마고도를 거쳐 인도 동북부, 신독국(乾毒,身毒國) 즉 곤륜 (昆崙)이 사는 인도 동북부 수미산 (須彌山)이 있는 천축국(天竺國)과 교류 했었다. 소미로 (蘇迷盧) 또는 수미(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 란 글자는 중원에서 신선 (神僊) 이라고 부르던 단군신화를 전주한 글자다.
모름지기 수, 수염 수(須) 라고 읽는 글자는 유목민을 뜻한다. 그 지도자를 수미(須彌山)라 했다. 곤륜과 같은 뜻이다. 수미산 (須彌山)이 곤륜산이 (崑崙山)이다. 뫼산자와 사람인자를 겸하여 여러 글자로 기록에 나타난다. 곤륜이란 글자가 나타나는 지역은; 산서성 분수 여안, 칸 탱그리가 있는 중앙 아시아, 그리고 운남성 서북쪽에 있다. 수서에 나오는 곤륜인(昆侖人) 이란 그 당시 토속 신앙을 주관하던 단군이라고 본다. 중원 사람들은 수나라 초기에 처음으로 한해를 건너다 전함이 탐라도 에 표류 했던 때에 유구(流求國)를 점령 했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라도 [왕의 성이 환사씨 (歡斯氏) 이름은 갈라도(渴剌兜), 눈이 깊고 코가 큰 사람이 고조선 사람 (胡)과 비슷하고, 또한 작고 빠릿빠릿한 사람도 있었다. “人深目長鼻, 頗類於胡” 말이 통하지 않아 곤륜인(昆侖人)을 시켰드니 약간 말이 통하더라]고 했다. 발해 고씨가 세웠던 북제 유민들은 해양으로 또는 구름에 덮힌 큰 산맥 너머 지역이란 뜻의 “남월 동월” 지역에 정착 했다. 후에는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이주 시켰다. 대만에는 발해왕으로 봉해 졌던 발해고씨(渤海高氏) 북제시조 고환(北齊高歡)을 모신 발해당(渤海堂)이 있고, 동남아에는 고씨가 많이 산다.
삼국유사에 천축국의 왕이 동이 공공지족 (東夷 共工之族)과는 다르다고 했다.[29] 중원의 서남 산간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은 도교와 토속신앙을 믿고 있다. 그들을 이족(彝族)이라 한다. 그들이 촉蜀이라고 알려진 서남지역에 살았다. 촉국 상인이 개척한 차마고도를 따라 도교로 알려진 단군왕검의 가르침이 천축국에 전도 되여 원시불교의 기원이 되었다. 단군왕검 백익이 받았던 제정일치 통치권이 달라이라마가 인도 하는 티뱃불교에 남아 있다.
운남성에 남조(南詔 Nanzhao)를 세웠던 이족 (彝族, 夷族)은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황금시대를 이루어 었다. 이를 대리국 (大理國)이라 한다.[30] 그 곳을 한때는 석가모니와 같은 글자 모주(牟州)라고도 했다. 대리(大理)란 순임금 때 현명한 법관 고요 (皐陶. 咎繇)에게 붙였던 이름이다.[31] 고요의 아들이 백익(伯益)이라 한다. 앞서 언급한 산서성의 범(凡伯, 范伯)씨는 홍범의 사음자요, 이윤 (彝倫)은 백익의 가름침이다. 이괘명문등 여러 곳에는 백익을 뜻한 글자 이(彝)가 있다.
운남성에서 참패한 당현종(玄宗)이 고요를 덕명황제 (德明皇帝)로 추존 했다.[32] 그 때에 남조에 있던 호수를, 백익 이기씨(伊耆氏)가 살던 마을을 지나던 이수 (伊水 洛水)와 음이 같은 이해(洱海, Erhai)라 했다. 이원현 (洱源縣) 이라던 고을에 있는 도시를 대리 (大理)라고 이름 했다.
이씨 왕조 후기에 도참설이 흥행 하여 민간 신앙으로 변모 했다. 그들의 경전으로 취급 되던 정감록(鄭鑑錄) 에는 남쪽에 조선 (南朝鮮) 이라는 낙원경 (樂園境; Shangri-La)이 있다고 기술 되었다. 남조 대리국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원나에게 망했다. 지나란 별명이 붙은 잔여세력이 매콩강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하여 지나(支那)란 이름이 동남아 해안 여러 곳에 나타나 서양에 Cina로 알려 졌다. 중원 세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지나라고 불러 China의 어원 이란 낭설(Fallacy)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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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미륵신앙 (彌勒信仰)과 화랑의 유래:
미륵 (彌勒)의 유래.
미륵이란 명사는 불교 용어라 선진 문헌에는 없다. 불가에서는 도솔(兜率) 이란 글자와 같이 설명 한다. 시경에 실렸다. 미륵의 미(彌) 자는 큰 활을 든 사람이란 상형자로 유목민이었던 동이의 지도자를 칭한 글자다. 단군왕검 백익을 뜻해 “彌:益也,長也,久也” 하는 풀이가 있다. 계사(繫辭) 에 미륜천지지도 (彌綸天地之道)란 문구가 있다. 홍범구주 이윤유서를 여러글자로 부꾸었듯이, 이윤 (彝倫)을 미륜(彌綸)으로 바꾸었다.[33] 륵 (勒:馬頭絡銜)자는 말굴래를 뜻한 글자로 통치, 또는 가죽 제품을 뜻한다. 왜왕 비미호, 미추홀, 우륵 (于勒), 미륵사(彌勒寺) 등등 한국상고사에 많이 나타나는 글자다. 도솔(兜率)이란 글자 또한 한나라 이전 문헌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단군신화에 여러 무리를 이끌고 내려 왔다는 개천절에 관한 예기를 인용한 글자다. 삼국사기에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향가, 즉 국풍(國風)의 시초가 되였다. 회소(會蘇)곡과 같이 고난에서 벗어난다는 개천철 개념을 불가에서 인용 했다 [34]
원주민 (고조선 사람들 黎民, 驪戎)폭동으로 황하문명의 발생지에 있던 서주가 함곡관 동쪽으로 도망을 와 춘추시대가 시작 되었다. 그 시대의 초기상황을 기록한 관자에는 금국미란 (今國彌亂)이라는 표현을 했다. 제 환공의 영역을 둘러 싸고 있던 나라들이 불복 (四夷不服)하여 이들을 토벌 하려는 계획(欲繕兵)을 세운다. 우씨, 발조선과 같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 여러 지역중에 곤륜지허 (崑崙之虛)가 있다.[35] 그곳의 특산물을 (璆琳琅玕) 라 했다. 목천자전에 나오는 최고의 제사장을 뜻한 곤륜(昆侖 崑崙)은 북 쪽에만 있었다. 남쪽에는 오월이었다. 북적이 분수를 건너 곤도(昆都)를 침략하여 진이 망했다는 문구가 좌전에 있다. 중원의 북쪽 지도자를 곤오(昆吾)라 했다. 그후 곤륜(崑崙)이 사기 대완열전 에는 서역에, 사마상여전에는 사천성 서쪽 높은 산을 묘사 했다.[36] 그들의 후손이 동서남북으로 흐터 졌다. 수양제가 처음으로 유구에 도착 했다. 그곳에는 곤륜인과 흡사히 생겼던 지도자와 대화가 통했다.[37] 시대가 흐르면서 오월이란 영역이 점차적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 갔다.
몽고가 처음으로 남조를 정벌 했다. 원사에는 세조 (Kublai Khan)4년에 백제 양호(梁浩)와 고려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38] 또한 고씨전 대리국정 (高氏專大理國政), “其孫阿羅仕大理國主高泰” 란 문구가있다. 대리국을 고병이 통치 했다. 그 곳에는 산에 세운 서낭(Totem pole)을 무정공 영주후 (武定公.靈淵侯) 하는 이름을 붙였다. 자세한 설명은 앞서 올린 [Etymology of China Part II 南詔.운남성에 있던 支那皇帝가 Cina 의 어원이다.]에 있다.
남소(南昭)와 지나 (支那) 대리국(大理國)의 어원을 찾아 보면 닭 계자 계림 (鷄林)을 꼬리가 없는 작은 새 계림(雞林)으로, 닭이 울던 숲이란 뜻에서 울림(鬱林), 이를 다시 계수나무 계자 계림(桂林)으로 바꾸었다.
백익을 뜻한 떳떳할 이(彝)자 설명에 이에는 계이雞彝, 조이鳥彝등등 6종이 있다고 주례(周禮)에 실렸다.[39] 제정일치 통치권을 갖고 있던 단군왕검 백익의 후손이 사방팔방으로 흐터졌다는 뜻이다.
운남성에 있던 지나 황제(支那皇帝)는 삼한의 후손:
태평광기 남조 (南詔) 에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 란 문구는 남조왕 발해왕 (渤海郡王) 고병(高駢)이 읊은 시문이다.[40] 표신이란 시인이 남조 (南詔驃信著)를 읊었다는 시문에 같은 문구가 있다.[41] 표신이란 군주를 칭한 그 지방어(自稱驃信 夷語君)라 했다. 나 짐朕 하는 표현과 같다. 그 시문에 “翊衛類夔 契. 伊昔經皇運”란 문구가 있다. 치수 사업을 하던 북쪽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온 사람들(夔 契)에게 밀려 내여 왔다는 뜻이다. 그 지역으로 삼한의 후손들을 많이 이주 시켰다. 남조/소(南詔)는 당나라 남쪽에 있던 제왕이 다스리던 지역이란 뜻이다. 표신이 당나라 말기에 발해군왕 연국공으로 불리던 선비족 지도자였다. 송대 사마광의 자치통감 (資治通鑑) 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연국공 고병 (燕國公高駢) 이 여러 곳에 실렸다. 그 세력이 남조에서 내려가 안남(安南)을 정벌 했다.
남조 지역은 옛적부터 살던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한무제 이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삼위산에 귀양을 보냈던 삼묘(三苗于三危)의 후예로 알려진 묘족 (苗族; Miao, Hmong) 요족(瑤族; Yao People) 또한 서남지역에 산다. 서남이중에 가장 방대한 영역을 다루어 남조 (南詔) 라 했다. 그곳에 전해오던 전설을 남조왕 고병이 읊었다.
오호 십육국시대 내륙에 살던 삼한의 후손들이 운남성에서 번창 했다. 수나라때 단합하여 당나라 세역을 물리 쳤다. 원나라에 패망하여 매콩강 물길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 했다. 동남아 사람들의 풍속에 전해 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남조(南詔, 653년 ~ 902년)란 당나라 때에 처음 나타난다.[42] 두 큰 세력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쪽지역을 통치 하던 자를 지나황제 (支那皇帝) 라 했다.
당현종(唐玄宗; 685년 ~ 762년)은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 (楊國忠: ? ~ 756년)을 보내서 서남이를 토벌 하러 갔다가 751년 753년 두차례 전쟁에서 패했다.[46] 당현종이 읊은 제범서 (題梵書)에 “支那弟子無言語” 란 시귀가 있다. 글자 뜻 풀이 또한 [지나란 곳을 흠모의 대상, 또는 혐오의 뜻]이라 한다.
단군왕검 백익을 추종하던 고조선 사람들이 중원세력이 미치지 않는 남쪽 산간지대에서 평화로이 살았다. 이곳에 삼한의 후손들이 계속하여 들어와 남조(南詔 Nanzhao)를 세웠다. 태평광기 남조 (南詔) 에 “謂天子為震旦” 란 문구는 그들이 옛 구주땅에 살때는 단군(壇君)이 사재권과 통치권을 겸한 지도자 였다는 뜻이다. 천자 (天子)는 왕중왕이 된 백익(伯益, 伯翳, 彝)을 뜻했다. 백익의 후손이라 하여 이족(彝族, 夷族) 이라고 이름 했다. 그들이 사는 사천성 이남에서 동서로 흐르는 방대한 지역을 당나라 때 남조(南詔) 또는 지나 (至那) 라 했다. 도덕적 최고 지도자란 뜻의 곤륜, 곤명(昆明) 대리 (大理)란 이름이 있다.
처룡가, 풍월주 화랑의 유래
위진시대에 동남아 해로가 개발 되여, 중원 동남 해안 일대에 있던 삼한의 후예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 했다. 이들이 발해만을 떠나 양자강 하류를 중심으로 웅거 했을 시대에 “倭·新羅· 任那·加羅·秦韓·慕韓”를 왜 5왕 (倭五王), 즉 부여씨가 통치 했다. 그후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의 남조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陳)의 역사서 진서(陳書)에는 新羅와 扶南,林邑 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역사서에는 대만섬을 백제 땅이라 했다. 백제와 신라는 강남 복건성에서 통킹만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다. 월남 역사서에는 지나와 조선이 구호 (舊好), 즉 옛적 우방이라 했다. 부여의 후손이 동남아 해안선에 있었다.
패르샤 상인들이 인도양을 거처 동남아 에 이르러 화려 했던 불교국을 지나(支那)라고 했다. 그곳에서 신라공주 화랑 (花娘, Farang)을 만났다. 패르샤 왕자와 신라 공주 화랑(Farang, princess Frarang)의 사랑을 읊은 서사시 “쿠쉬나매The Kushnameh”가 전해 온다. 패르샤 왕자가 피란을 갔다는 신라 (新羅)는 풍요롭고 코끼리가 있었다. 이 지역이 폴투갈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알려 졌다. 인도에 관해 깊히 연구했던 독일사람 맥스 뮬러( Friedrich Max Müller: 1823 – 1900)와 스코틀란드 선교사 제임스 래게(James Legge; 1815 – 1897)가 같이 “Sacred Books of the East series” 란 동방에 기록서를 출판 했다. 화랑 (Farang) 과 Zhina (支那)란 어음이 유롭에 알려졌다. 청 강희 25년(1686년)부터 도광 22년(1842년) 까지 거의 2세기에 걸쳐 편찬되었다는 대청일통지 (大清一統志)와 청(淸) 나라 말기에 위원 (魏源, 1794년 ~ 1857년)이 1844년 저술한 해국도지 (海國圖志) 에는 지나 (支那 와 至那) 가 여러 곳으로 나온다. 그는 이태리 선교사가 만든 만국지도 내용을 인용하여 현지음으로 적은 태국을 섬라 (暹羅)라 했다.[43] 지나(支那 와 Sayam)의 출원지다. 사전에는 중국어로 진시황 (秦始皇 Qin)의 성씨를 백익의 후손을 봉했던 곳이 익주 즉 산서성 (秦:伯益之後所封國. 益州) 이라 했다. 관중 분지에서 사천성을 지나 운남에 흐터져 살았다. 그들이 매콩강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 왔다. 그 곳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온 왜왕이 다스렸다는 삼한의 후손들이 천축국 으로 알려진 뱅갈만에서 해안을 따라 태국을 지나서 월남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하여 동남아 연안을 지나(支那)라고 했다.[44]
송고승전(宋高僧傳)은 발해 고씨(渤海髙氏) 찬녕(釋贊寧:919-1001 년)이 양자강 하류에서 해로를 따라 동남아를 돌아 남천축국에 다녀온 기록이다. 남천축국 사람들은 지나(支那)를 [인도에서 는 사자국(師子國, 獅子國)의 동쪽, 중국동남부 지명으로, 지도자를 천자 (支那天子)라] 했다.[45]
도교경전으로 알려진 노자 서승경(老子西升經)은 노자가 운남성에서 서쪽 높은 지역으로 갔다는 뜻이다. 왜인전에 노자가 호를 가르쳤다는 경로다.[46] 후한 (桓帝 劉志, 132년 ~ 168년)시대 산동성 사람으로 강남에 정착 했던 사람이 남긴 모자(牟子)에는 광동성 지역에는 불교가 성행 했다고 했다.[47] 운남성 서쪽에서 육로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본다.
동진(東晉:317 ~ 420)시절에 해상로를 따라 중국 동해안에 확산 되었다. 발해만 연안에 있던 백제 신라 휴인(百濟及薛羅 休忍)이 남방불교에 나오는 가라(加羅)를 나라 이름으로 바뀌어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났다.
혜초(慧超)가 동남아 해상로를 따라 인도에 갔다. 인도 서쪽으로 가서, 씰크로드 를 따라 장안에 도착했다. 삼한의 후손들이 동남아 해안 지역에 세운 나라들과 해상 교류가 활발하여 통일 신라의 전성기를 이루 었다. 원시 불교가 고조선의 고유 신앙을 본따 미륵 (彌勒) 신앙이 나타났다.
월남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 에 나타난 지나(支那)는 광동 광서 장족 자치구 (廣西壯族 自治區)와 운남성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지나(支那)라 했다.[48] 청조 말의 국종사로 알려진 장병린 또한 서양과 일본에서 풀이한 진단 지나 (震旦,支那) 모두 진나라 어음(皆言秦)으로 “silk”란 뜻이 있다고 했다.[49] 대리국 고태(大理國主高泰)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태국이라 본다.
운남성에 있던 지나황제 천자支那皇帝, 支那天子가 다스리던 땅이Cina 의 어원이다. 진시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지역이 중원을 다스리던 사람들이 꿈꾸고 조용이 실천 했던 중국몽(中國夢, Clandestine Chinese Expansionism)에 흡쓸려 “China 中國” 의 어원으로 알려 졌다.
인도 동쪽에는 아직도 한국어의 어휘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끝
November 20, Revised November 25, December 4, 2021
[1]. 大唐西域記: 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異政殊制隨地別敘. 。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
[2]. 大唐西域記: 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又曰須彌婁皆訛略也四寶合成. 海中可居者。大略有四洲焉。東毗提訶洲舊曰。弗婆提。弗于逮訛也南贍部洲舊曰。閻浮提洲。剡浮洲訛也西瞿陀尼洲舊曰。瞿耶尼。的伽尼訛也北拘盧洲舊曰。鬱單越。鳩樓。訛也金輪王乃化被四天下。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
[3]. 大唐西域記: 則可無大過矣。始可與言譯也。李老曰。美言者則不信。信言者則不美。韓子曰。理正者直其言。言飾者昧其理。是知垂訓範。物義本玄同。庶袪蒙滯。
[4]. 大唐西域記: 末田底迦舊曰末田地訛略也阿羅漢之所造也。羅漢以神通力攜引匠人.升睹史多天舊曰兜率他也。又曰兜術他。訛也親觀妙相。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
[5]. 大唐西域記: 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又曰須彌婁皆訛略也四寶合成。在大海中。海中可居者。大略有四洲焉。東毗提訶洲舊曰。弗婆提。弗于逮訛也南贍部洲舊曰。閻浮提洲。剡浮洲訛也西瞿陀尼洲舊曰。瞿耶尼。的伽尼訛也北拘盧洲舊曰。鬱單越。鳩樓。訛也金輪王乃化被四天下。
[6]. 大唐西域記: 從烏鐸迦漢荼城北踰山涉川。行六百餘里至烏仗那國。唐言苑。昔輪王之苑囿也。舊云烏場。或曰烏茶皆訛北印度境遂
[7]. 日知錄:隋書《經籍志》言:「漢哀帝時博士弟子秦景,使伊存口授浮屠經。」又云:「後漢明帝,遣郎中蔡及秦景使天竺,得佛經四十二章及釋迦立像。」按自哀帝之末至東京明帝之初,垂六十年,使秦景尚存,亦當八十餘矣,
[8]. 史記 大宛列傳: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問曰:『安得此?』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其俗土著,大與大夏同,而卑溼暑熱云。其人民乘象以戰。其國臨大水焉。』
[9]. 大唐西域記 卷第十: 渡大河至迦摩縷波國東印度境。斯則王化所由國風尚學。今印度諸國多有歌頌。摩訶至那國秦王破陣樂者。聞之久矣。豈大德之鄉國耶。曰然。此歌者美我
[10]. 《題梵書》:鶴立蛇形勢未休,五天文字鬼神愁。支那弟子無言語,穿耳胡僧笑點頭。
[11].大唐西域記:山經莫之紀。王會所不書。博望鑿空。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 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12]. 三國志 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不能詳載,故略之如此
[13]. 大唐西域記: 卷第三: 故道安云。斯為不易矣。或曰。漢魏之際盛行斯意。致使陳壽國志述臨兒國云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而相出入。蓋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竺教胡為浮屠。此為見譯家用道德二篇中語。便認云與老子經互相出入也。設有華人能梵語與西僧言說。兩相允會。
[14].https://ctext.org/zh: 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紀元前二百七十年頃,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使之宣布各地。
[15].大唐西域記: 卷第八:是無憂王作地獄處。釋迦如來涅槃之後。第一百年有阿輸迦 唐言無憂舊曰阿育訛也王者。頻毗婆羅唐言影堅。舊曰頻婆娑訛也王之曾孫也
[16]. 三國志 倭人傳: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父曰屑頭邪,母云莫邪。此國在天笁城中。天笁又有神人,名沙律。昔漢哀帝元壽元年,博士弟子景盧受大月氏王使伊存口受浮屠經曰復立者其人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昔漢哀帝元壽元年,博士弟子景盧受大月氏王使伊存口受浮屠經曰復立者其人也
通典 天竺:後漢通焉,即前漢時身毒國. 大夏國人曰:「吾賈人往身毒國市之。」即天竺也。或云摩伽陀,或云婆羅門。在蔥嶺之南,去月氏東南數千里,地方三萬餘里。其中分為五天竺.
[17].大唐西域記: 卷第十一: 僧伽羅國雖非印度之國路次附出茶建那補羅國 「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大明永樂三年。皇帝遣中使太監鄭和。奉香華往詣彼國供養。鄭和勸國王阿烈苦柰兒。敬崇佛教遠離外道。攻戰六日. 永樂九年七月初九日至京師。
[18]. 大唐西域記 序:妙窮津會。於是詞發雌黃。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載佇風徽。召見青蒲之上。乃眷通識。前膝黃屋之間。手詔綢繆。中使繼路。俯摛睿思。乃制三藏聖教序。凡七百八十言。今上昔在春闈。裁述聖記。凡五百七十九言。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凡六百五十七部。具覽遐方異俗
[19]. 大唐西域記 :詳夫天竺之稱。異議糾紛。舊雲身毒。或曰賢豆。今從正音。宜云印度。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
[20]. 大唐西域記 :三佛經行側有窣堵波。是梅呾麗耶唐言慈即姓也。舊曰彌勒訛略也菩薩受成佛記處.馗書:佛書言「釋迦去後,彌勒出世」。此亦無與中夏革命之事。而凡謀反者,皆喜自稱彌勒
[21]. https://ctext.org/zh 𣬛:《字彙》蘇甘切,音三。《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又村名。行唐西有𣬛趙村.
[22]. 宋高僧傳 :玄奘也立五種不翻。謂譯字譯音為一例。胡語梵言為一例。重譯直譯為一例 一譯字不譯音。即陀羅尼是。二譯音不譯字。如佛胸前卍字是。三音字俱譯. 其書豎讀。 同震旦歟。 至吐貨羅言音漸異 度蔥嶺南迦畢試國。言字同吐貨羅
[23].龍樹菩薩之本地,謂為過去之妙雲相佛,又曰妙雲自在王如來,今為垂迹之身,在初歡喜地之位云。三寶感應錄下曰:「金剛正智經中:馬鳴過去成佛號大光明佛,龍樹名妙雲相佛。大莊嚴三昧經中:馬鳴過去成佛號日月星明佛,龍樹名妙雲自在王如來。」弘法之付法傳上曰:「尋本則妙雲如來,現迹則位登歡喜。」八宗綱要上曰:「龍樹則昔之妙雲相佛,今則寄位於初歡喜。」(但三寶感應所引二經藏經中無之)舊稱,那伽曷樹那,那伽阿周陀那Nāgārjuna,
[24].龍樹菩薩之本地,謂為過去之妙雲相佛,又曰妙雲自在王如來,今為垂迹之身,在初歡喜地之位云。三寶感應錄下曰:「金剛正智經中:馬鳴過去成佛號大光明佛,龍樹名妙雲相佛。大莊嚴三昧經中:馬鳴過去成佛號日月星明佛,龍樹名妙雲自在王如來。」弘法之付法傳上曰:「尋本則妙雲如來,現迹則位登歡喜。」八宗綱要上曰:「龍樹則昔之妙雲相佛,今則寄位於初歡喜。」(但三寶感應所引二經藏經中無之)舊稱,那伽曷樹那,那伽阿周陀那Nāgārjuna,
[25]. 史記: 相如以「子虛」,虛言也,為楚稱;「烏有先生」者,烏有此事也,為齊難;無是公者,無是人也,明天子之義。故空藉此三人為辭,以推天子諸侯之苑囿。其卒章歸之於節儉,因以風諫。奏之天子,天子大說。其辭曰:「『將息獠者,擊靈鼓,起烽燧,車案行,騎就隊,纚乎淫淫,班乎裔裔。於是楚王乃登陽雲之臺,泊乎無為,澹乎自持,勺藥之和具而後御之。不若大王終日馳騁而不下輿,脟割輪淬,自以為娛。臣竊觀之,齊殆不如。』於是王默然無以應仆也。」
[26]. Screenshot 15:白衣民族의 시원지-1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7].三國佛學大辭典: 卷第三:【身毒】 (國名)即天竺也。山海經曰:「身毒之國,軒轅氏居之。郭註,天竺國也。」史記大宛傳曰:「大夏東南有身毒國。」索隱曰:身音乾,毒音篤。孟康曰:即天竺也。漢書西域傳作天篤,後漢書杜篤傳作天督。玄應一切經音義曰:「天竺或言身毒,或言賢豆,皆訛也。正言印度。印度名月,月有千名,斯一稱也。」
[28].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尚書 商書 微子: 父師若曰:「王子!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今殷民乃攘竊神祇之犧牷牲用以容,將食無災。
[29].三國遺事 卷第三: 善德王代。寺初主真骨歡喜師。第二主慈藏國統。次國統惠訓 貞觀十年丙申。慈藏法師西學。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文殊又云。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
[30]. 康熙字典:《唐書·南詔傳》初鳳迦異築柘東城,諸葛亮石刻故在,文曰:𥓓卽仆,常以石搘捂. 舊唐書:南詔蠻蒙異牟尋大破吐蕃於神川,使來獻捷,語在《南詔傳》。黃少卿攻陷欽、橫、潯、貴四州,吐蕃渠帥論乞髯蕩沒藏悉諾律以其家屬來降。明年,並以為歸德將軍。吐蕃寇慶州及華池縣,殺傷頗甚。《唐會要》曰:《南詔樂》,貞元十六年正月南詔異牟等作《奉聖樂》舞,
[31]. 詩經: 商頌 那: 詩說 商頌: 祀成湯之樂歌.冉,阝:《玉篇》同那). 那:何也,都也.
[32]. 通典: 天寶二年 743년,追尊咎繇為「德明皇帝」,涼武昭王為「興聖皇帝」。仍各立廟
[33]. 염사치 사건-3 삼국사기에 나타난 염사치 사건: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향가, 즉 국풍(國風)의 시초가 되였다.
[34]. 周易 繫辭上: 易與天地準,故能彌綸天地之道。仰以觀於天文,俯以察於地理,是故知幽明之故。홍익 인간(弘益人間)과 홍범구주 (洪範九疇)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5]. 管子 輕重甲: 桓公曰:「四夷不服,恐其逆政,游於天下,而傷寡人,寡人之行,為此有道乎?」管子對曰:「吳越不朝,珠象而以為幣乎!發朝鮮不朝,請文皮毤。服而以為幣乎!禺氏不朝,請以白璧為幣乎!崑崙之虛不朝,請以璆琳琅玕為幣乎!故夫握而不見於手,含而不見於口,而辟千金者,珠也,然後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一豹之皮容金而金也,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懷而不見於抱,挾而不見於腋,而辟千金者,白璧也,然後八千里之禺氏可得而朝也。簪珥而辟千金者,璆琳琅玕也,然後八千里之崑崙虛可得而朝也;故物無主,事無接,遠近無以相因,則四夷不得而朝矣。」
[36]. 史記 大宛列傳::其山多玉石,采來,天子案古圖書,名河所出山曰崑崙云. 太史公曰:《禹本紀》言「河出崑崙。崑崙其高二千五百餘里. 史記 司馬相如列傳: 時若薆薆將混濁兮,召屏翳誅風伯而刑雨師。西望崑崙之軋沕洸忽兮,直徑馳乎三危。相如雖多虛辭濫說,然其要歸引之節儉,此與詩之風諫何異。楊雄以為靡麗之賦.
[37]. 隋書: 福祿舊置酒泉郡,開皇初郡廢。仁壽中以置肅州,大業初州尋廢。又後周置樂涫縣,尋廢。有祁連山、崆峒山、崑崙山,有石渠。昆侖: 奏太簇,歌應鐘,以祭方澤。太簇所以贊陽出滯,昆侖厚載之重,故奏太簇以祀之。
[38].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四年春正月.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辛亥,封安肅公張柔為蔡國公,以趙璧為樞密副使。癸丑,敕封昔木土山為武定山,其神曰武定公;泉為靈淵,其神曰靈淵侯。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城大都。
[39].周禮 春官宗伯:彝:宗廟常器也。从糸;糸,綦也。廾持米,器中寶「六彝:雞彝、鳥彝、黃彝、虎彝、蟲彝、斝彝。以待祼將之禮。」也。彑聲。此與爵相似。《周禮》:
[40]. 資治通鑑: 高駢: 高駢至成都,發步騎五千追南詔 南詔遣使者詣高駢求和而盜邊不息,駢斬其使者。蠻之陷交趾也,事見二百五十卷懿宗咸通六年。虜安南总部设安南府經略判官杜驤妻李瑤
[41]. 全唐詩 卷七百三十二 :星回節遊避風台與清平官賦 南詔驃信著: 星回節遊 避風善闡台,極目見藤越。 自我居震旦,翊衛類夔契。伊昔頸皇運,艱難仰忠烈. 不覺歲雲暮,感極星回節。元昶同一心,子孫堪貽厥. 太平廣記 蠻夷四 南詔: 驃信詩曰:「避風善闡臺. 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
發步騎五千追南詔 南詔遣使者詣高駢求和而盜邊不息,駢斬其使者。蠻之陷交趾也,事見二百五十卷懿宗咸通六年。虜安南总部设安南府經略判官杜驤妻李瑤。
[42]. 資治通鑑: 高駢: 高駢至成都,發步騎五千追南詔 南詔遣使者詣高駢求和而盜邊不息,駢斬其使者。蠻之陷交趾也,事見二百五十卷懿宗咸通六年。虜安南总部设安南府經略判官杜驤妻李瑤. 玄宗至道大聖大明孝皇帝: 初,儀鳳中,吐蕃陷安戎城而據之,其地險要,唐屢攻之,不克. 戊午,冊南詔蒙歸義為雲南王. 太平廣記 蠻夷四 南詔: 驃信詩曰:「。謂天子為震旦.
[43].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長二萬四千裏,闊一萬二千三百裏。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自二十六至一百九十度。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44]. 海國圖志 “支那”: 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甫六年,與佛蘭西戰,敗績於支那,國幾不守。近日乘佛蘭西為俄羅斯所敗.
[45]. 宋高僧傳: 本中印度人也. 敕廣州節度使李復修鼓鑄畢.一云梵夾本是南天竺烏荼國王書獻支那天子。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展轉游化漸達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46]. 三國志 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臨蒲塞、桑門、伯聞、疏問、白疏間、比丘、晨門,皆弟子號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
[47]. 大唐西域記 序: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出高昌故地。自近者始。曰阿耆尼國舊曰烏耆. 舊唐書:《牟子》二卷牟融撰. 牟子 漢桓帝時蒼梧太守牟融著書號牟子,推美釋氏。見釋門正統四
[48]. 大清一統志: 支那:,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合有二十九,不能詳載,故略之如此
[49]. 訄書:遠藤隆吉曰:「孔子之出於支那,實支那之禍本也. 支那以蠶絲名,世謂震旦、支那,譯皆言秦。今人考得,實為蠶義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