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신앙 (彌勒信仰)의 유래.
Origin of Tibetan Buddhism and Maitreya of Korea.
Abstract: Origin of Tibetan Buddhism and Maitreya (미륵신앙, 彌勒信仰) of Korea is explored. Taoism (道敎) is originated from the mythical yellow emperor whom the Chinese made out of the legendary god-king of Gojoseon. Elder refers the followers of Baek-Ik(伯益) who had the title Dangun Wanggeom (壇君王儉). One band of Baek-Ik followers had moved through the Sichuan Basin (四川省, 益州) to southwest and reached to the eastern slope of Himalaya Mountains that was the barren land (隨地) to the Indian ruling class and spread their faith to the local Hu. The locals believed the elders came from the earthly paradise Shangri-La. Tibetan Buddhism spread down to the Mainland of India and further west during the heyday of King Ashoka. Tibetan monk Jia Yemoteng (迦葉摩騰) took pilgrimage to the birth place of Golden Idol (金人), through the ancient Tea and Horse Route((茶馬古道) arrived in the Capital (洛陽) of Han dynasty and found the mystical sacred lake (神池) that is the PSMC of Xiechi Lake (解池) in the east of Yellow River. The mythical sacred lake is the Dian Lake (滇池), also known as Kunming Lake (昆明湖) in the Yunnan, China. The SW mountainous region was called Nanzhao (南詔) and out of Chinese domain. During the era of Eastern Jin, primitive Tibeta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China through the sea route and reached to the southern part of Korea. Along the long trail, Tibetan Buddhism assimilated to the local faith. It is current Korean sect of Buddhism known as Maitreya.
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 황로 사상이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 동북쪽 산악 지대에 전래 되었다. 그곳에서 무위(無為之教彌新)의 사상에서 원시 불교가 나타나, 같은 길을 따라 낙양에 전래 되었다.
불교는 크게 세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 왔다. 서역불교와 남방불교의 전래는 경로와 시대가 밝혀 졌다. 그러나 차마고도를 통해 운남성 일대에 전래된 전통 불교에 관한 기록은 미흡하다.
당나라 초기에 당태종(唐 太宗 李世民: 599-649년)의 지시에 따라 현장 (玄奘:602-664년)이 서역을 다녀온 견문록이 대당 서역기(大唐西域記)다. 수미산은 옛적에 묘고산(唐言妙高山。舊曰須彌)을 뜻하고, 울단 (鬱單越) 을 지나, 그 서쪽을 북구로(北拘盧)주 라 했다.[1]
한무제 때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이 다녀온 천산 남로를 따라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다. 그 길로 서역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 왔다고 인식한다. 잘못이다. 장건이 대하에서 촉국 상품(見邛竹杖,蜀布) 보았다. 촉국상인이 천독(身毒)국과 교류가 있다는 예기를 들었다.[2] 현장이 천축국에서 들은 인도 동북쪽, 아쌈 (Assam) 지역 에서 운남성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있던 나라들을 지자에 종 복자를 넣어 여러 지나국 (至那僕底國, 至那僕氏國, 至那揭羅曷國) 으로 기록 했다. 인도 동북쪽 지나(支那)가 China의 어원이란 번역이 잘못된 결과다.
당 현종이 정복하지 못한 서남지역을 읊은 시문 제범서(題梵書)에서 대당서역기에 실린 지나 (至那)를 지나 (支那)로 바꾸었다.[3] 훈역하면 풍요로운 땅 나(那)에 이른다 뜻이다. 영어로 풀이 하면 “reach to (至) Shangri-La(那)”가 된다. 지상낙원 Shangri-La라는 곳이 운남성에 있다.
현장은 아쌈 동쪽 큰강을 지나 불교가 번창 했던 지역을 지나 (至那)로 기록 했다.[4] 장병린은 진단 지나 (震旦,支那) 모두 진나라 어음(皆言秦)으로 “silk”란뜻이 있다고 했다.[5] 아쌈 지역까지 삼한의 후손이 진출 했었다.
현장이 먼 여정을 마치고 천산 남로를 따라 귀국한 곳을 진단(振旦) 이라 했다.[6] 현장이 처음“震旦을 振旦, 支那을 至那”로 기록 했다. 인도를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그 하나가 시(斯)자다. 사마상여는 천자가 다스리는 지역을 대표한 가상 인물을 음으로 무시공(無是公)이라 했다.
불가에서 진시황이 병장기를 녹여 금인 (金人) 을 만들었던 사실과, 휴도왕이 소유 했던 금인 (金人)을 불상으로 잘못 인식 하여, 후한 초에 처음 들어온 불교가 진시황 이전에 전래 되었다는 증거로 쓰이고 있다. 파촉으로 알려진 서남쪽에는 현장 스님 이전 부터 강력한 국가 남조(南詔) 가 있었다. 후한 때에 마등(摩騰)이 처음으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왔던 곤명도가 막혀 (昆明道閉) 서쪽으로 되돌아 왔다.[7] 도교(道教)에 심취 했던 동진(東晉)의 갈홍(葛洪, 283년 ~ 343년)이 서경잡기를 보충 했다. 그는 곤명호수(昆明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이 어려서 다녀왔다고 했다.[8]
서역기에 무위지교미신(無為之教彌新)이란 문구가 있다. 도덕경의 핵심이 인도의 지도자에게는 새롭다는 뜻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서가모니 탄생지 임아국(臨兒國lín ér guó[梵Lumbinī] 佛)에 관한 기록이 있다.[9] 그곳에 [老子가 가서 胡, 즉 천축국 지도자에게 도덕경을 가르쳤다]는 무위(無爲) 를 한때 인도 전역을 통치 했던 마우리아 제국(Maurya Empire:기원전 320년-기원전 185년) 왕의 호칭으로 사용 했다.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지도자를 인도어로 아수가 (Aśoka, 阿輸迦)라 했다. 이를 당나라에서 아육왕 (阿育訛也王) 으로 기록 했다.[10]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을 시황 (秦始皇) 이란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듯, 인도에서는 최고의 지도자를 무위 (無爲)의 경지에 이른 사람란 음과 뜻이 비슷한, 무우왕 (無憂王) 이라 했다. 아육왕이 방대한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여 아프카니스탄을 거처 중앙 아시아에 까지 이르렀다.[11]
사기에 서남 파촉지역을 설명 했다. 은유풍으로 알려진 사마상여전 에는 세 지역; 산서성과, 산동 제나라의 오유선생(烏有先生), 그리고 남쪽 초나라 를 사마상여 자신이 거짓말 쟁이 자허(子虛)로 등장 한다.[12] 사천성 촉군 사람이었던 그는 산서성 사람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하여 상여란 이름을 택했다. 천자의 나라를 대표한 사람을 무시공 (無是公)이라 했다. 무시공은 무시 사람이다. 현명한 천자란 뜻이다. 무시 (無是; shì, zhiɛ̌, xi)공이 서역전에 나오는 무우왕 (無憂王)과 같은 뜻이다.
불학대전에는 천축국을 산해경에 나온 신독(身毒)이라 했다. 그곳에 가상인물 황제헌원(軒轅)이 살았다.[13] 해내경에 천독 (天毒) 이 다스리던 조선을 뜻했다.[14] 천독이 북쪽에서 상나라를 괴롭 혔다. 한 무제 때에 촉국의 상인이 인도 동북부에 있었다.[15] 남만의 지도자는 황옥에 살면서 천독, 즉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곳이란 뜻의 둑기(纛)를 달았다. 고조선의 한 분파가 한무제 (漢武帝) 당시 서역을 다녀온 장건(張騫.?~BC 114) 보다 앞서 촉국 상인이 차마고도를 거쳐 인도 동북부, 신독국(乾毒,身毒國) 즉 곤륜(昆崙)이 사는 인도 동북부 수미산(須彌山)이 있는 천축국(天竺國)과 교류 했었다. 소미로 (蘇迷盧) 또는 수미(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 란 글자는 중원에서 신선 (神僊)이라고 부르던 단군을 전주한 글자다.
사기 사마상여(司馬相如: 179년 ~BC 117년) 전에 실린 무시공이 현명한 천자란 뜻이 “無是公, 無是人也,明天子之義”라는 문구다. 사천성 (益州)에 살던 백익의 후손들이 차마고도를 따라 천축국과 교류를 했었다. 그길을 따라 도교로 알려진 단군왕검의 가르침이 천축국에 전도 되었다. 삼국유사에 천축국의 왕이 동이 공공지족 (東夷 共工之族)과는 다르다고 했다.[16] 중원의 서남 산간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은 도교와 토속신앙을 믿고 있다. 그들을 이족(彝族)이라 한다. 매콩강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 했다.
청 강희 25년(1686년)부터 도광 22년(1842년)까지 거의 2세기에 걸쳐 편찬되었다는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와 (淸)나라 말기에 위원 (魏源, 1794년 ~ 1857년)이 1844년 저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에는 지나(支那 와 至那) 가 여러 곳으로 나온다. 그는 이태리 선교사가 만든 만국지도 내용을 인용하여 현지음으로 적은 태국을 섬라(暹羅)라 했다.[17] 지나(支那 와 Sayam)의 출원지다. 사전에는 중국어로 진시황(秦始皇 Qin)의 성씨를 백익의 후손을 봉했던 곳(秦:伯益之後所封國) 이라 했다. 천축국에서 해안을 따라 태국을 지나 월남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지나(支那)라고 했다.[18] 그곳에서 서양 열국이 세력 다툼을 했다. 지나(支那)에서 싸워 패했다고 했다.[19] 하노이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 나타난 지나(支那)는 광동 광서 장족 자치구 (廣西壯族 自治區)와 운남성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지나(支那)라 했다.[20]
송고승전(宋高僧傳)은 발해 고씨(渤海髙氏) 찬녕(釋贊寧:919-1001 년)이 양자강 하류에서 해로를 따라 동남아를 돌아 남천축국에 다녀온 기록이다. 남천축국 사람들은 지나(支那)를 [인도에서는 사자국(師子國, 獅子國)의 동쪽, 중국동남부 지명으로, 지도자를 천자 (支那天子)라] 했다.[21]
운남성에 남조(南詔 Nanzhao)를 세웠던 이족 (彝族, 夷族)은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황금시대를 이루어 었다. 이를 대리국 (大理國)이라 한다.[22] 대리(大理)란 순임금 때 현명한 법관 고요 (皐陶. 咎繇)에게 붙였던 이름이다.[23] 고요의 아들이 백익(伯益)이라 한다. 앞서 언급한 산서성의 범(凡伯, 范伯)씨는 홍범의 사음자요, 이윤 (彝倫)은 백익의 가름침이다. 이괘명문에는 백익을 뜻한 글자(彝)가 있다.
운남성에서 참패한 당현종(玄宗)이 고요를 덕명황제 (德明皇帝)로 추존 했다.[24] 그 때에 남조에 있던 호수를, 백익 이기씨(伊耆氏)가 살던 마을을 지나던 이수 (伊水 洛水)와 음이 같은 이해(洱海, Erhai)라 했다. 이원현 (洱源縣) 이라던 고을에 있는 도시를 대리 (大理)라고 이름 했다. 원시 불교는 후한 초에 촉국 상인이 개척한 차마고도를 통해 운남성으로 들어 왔다. 그로 부터 사천성을 거쳐 낙양에 들어 왔다.
남소(南昭)와 지나 (支那) 대리국(大理國)의 어원을 찾아 보면 닭 계자 계림 (鷄林)을 꼬리가 없는 작은 새 계림(雞林)으로, 닭이 울던 숲이란 뜻에서 울림(鬱林), 이를 다시 계수나무 계자 계림(桂林)으로 바꾸었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살던 숲속:
앞서 신라의 첫 수도 계림 (鷄林)에 관해 설명 했다. 뜻과 음을 뒤섞어 여러 글자로 바꾸어 썼다. 산울림이란 한국어의 어원이 울림이다. 어음 울을 “鬰 𦉚 欝 郁”등 여러 글자로 썼다. 산서성 우부풍에 살던 사람들을 욱리(右扶風郁夷)라 했다. 강서고분이 있는 한반도 대동강 하류가 백제수도 한성이었다. 백제 개로왕조이 욱리하(郁里河) 연안에 성을 쌓고 그곳에서 죽었다. 욱리하 (郁里河)는 산동성에도 있다.
울림(鬱林)이란 이름이 나타난 지역을 한서 지리지에는광동어를 쓰는 지역을 월지(粵地)라 했다.[25] 같은 월(粵地)자가 주본기 초에 실렸다.[26] 서남지역에 관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 서역전, 서남이전, 사마상여 열전에 설명 되었다. 백익을 수호하던 사람들이 죽어 견우직녀의 비화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 하여 견우성이 남쪽에 있다고 한다. 단군왕검을 시조로 하는 사람들이 슷로 치우천왕의 후손이라 한다. 그 곳에는 아직도 전통 신앙을 유지하고, 도교 사원이 많이 남아 있다. 한령방현 (漢嶺方縣) 이란 곳은 찾을 수 없다. 큰 산령이 있던 남쪽을 떳한 글자다.
후한말 부터 동서진 교차기 불교가 번창해 갔다. 서진 말기에 불경 번역서 가 나타났으나 기록이 혼미하다. 대당서역기에 불경의 수미산, 비구 등 여러 명사를 설명 했다.[27] 도덕적 최고 지도자가 사는 곳을 수미(須彌山)산 이라 했다. 북쪽을 울단(欝單), 동쪽을 불우체(弗于逮) 서쪽은 구야니 (俱耶尼)인대 반월형이다. 남쪽을 염부리 (閻浮利)라 했다. 울단/선 (欝單; 우선) 이란, 혼인을 않고 홀로사는 남자 (欝單曰 人無有婚姻), 즉 수도자를 부르던 이름이다.
태평광기 남조 (南詔) 에 “謂天子為震旦” 란 문구는 그들이 옛 구주땅에 살때는 단군(壇君)이 사재권과 통치권을 겸한 지도자 였다는 뜻이다. 천자 (天子)는 왕중왕이 된 백익(伯益, 伯翳, 彝)을 뜻했다. 백익의 후손이라 하여 이족(彝族, 夷族)이라고 이름 했다. 그들이 사는 사천성 이남에서 동서로 흐르는 방대한 지역을 당나라 때 남조(南詔) 또는 지나(支那)라 했다. 도덕적 최고지도자란 뜻의 곤륜, 곤명(昆明) 대리(大理)란 이름이 있다.
앞서 지나의 동서남북 경계를 논술 했다. 동남쪽 끝이 중국의 동남쪽 해안에서 동남아 해안을 지나 뱅갈만에 이른다.
한 무제 뒤를 이은 (漢 孝昭皇帝; 기원전 94년 ~ 기원전 74년) 때에 담이와 진번儋耳 真番)을 폐지 했다. 남월 울림군(鬱林郡)에 옹계현 (雍雞縣)이 속했다. 계자는 산서성 사람들이 태사 주의 지도 믿에서 금석문으로 남긴 글자에는 “籀文作鷄” 계(鷄)를 계(雞)로 적든 글자로 백익의 후손(夏后氏以雞彝)을 뜻한 상형글자 였다.[28] 계(鷄)의 어근이 되는 해(奚)자는 서쪽에서온 해를 숭상하던 부족으로 풀해(解)자로도 쓰이던 부족이다. 울림(鬱林郡)을 계림(桂林)군으로 바꾸었다.
음이 같은 계림(桂林, 鷄林, 雞林)은 모두 백익의 후손이 살던 지역에 붙인 이름이다. 현장이 계림(雞林)이라한 지역으로 당태종의 영향력이 미약했던 변두리를 뜻했다.[29]
현장은 불교가 중원으로 들어온 지역, 천축국 즉 인도를 설명 했다. 옛 신독(身毒) 또는 현두 (賢豆)라고 부르던 지역을 수지(隨地) 좋은 뜻으로 인도 (宜云印度) 라 했다.[30] 인도는 당나라 말로 달(唐言月), 달 (표현)에는 여러 이름(月有多名)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시 또는 사라고 읽는 斯; 천할 시. 쪼개다. 떠나다. 희다]를 뜻했다. 그 곳의 최고 지도층을 당나라 언어로 파라문(Brahmin,婆羅門) 이라 했다. 천축국이란 어음은 인도 사람들이 “따를 수, 게으를 타”라고 하던 지역에 붙인 이름이다. 수지(隨地) 라 한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 동쪽, 타림분지에 이른 방대한 지역, 옛적에 늙은 까마구(烏耆) 또는 아기니 (阿耆尼)나라 라고 부르던 지역을 뜻했다.[31] 그 지도자를 아육왕(阿育王, king Ashoka) 이라 했다. 불교가 앞카니스탄 쪽으로 전파 돠었다. 그곳 사람들이 동쪽 땅을 진단 (震旦, 振旦) 이라 했다.
현장이 기술한 내용을 보면 당시 천축국과 당나라의 어음을 이리저리 돌려 기록 했다. 삼국 유사에는 수미(須彌) 아육(阿育) 하는 글자들이 다른 불교 에서 유래된 이름과 함께 여러 곳에 실렷다. 인도를 뜻한 수(隨地; 斯 須) 자는 천부경에 나오는 무시(一始無始)의 사음자다. 그에서 도덕경의 무위(無爲), 왕의 칭호 무우 (無憂) 하는 글자가 나타 났다. 천축이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 이란 뜻으로 수미산(須彌)이 있었다.[32] 그 곳에 무우왕 (無憂王) 즉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성을 쌓았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여러 곳에 있었다. 서역승이 낙양에 들어 왔다 (摩騰入洛) 황제는 그를을 극진히 환대하고 낙양 근처에 백마사 (白馬寺)를 건립하였다. 그가 성지로 찾은 곳을 신지 (神池)라 했다.
사전에 설명이 없는 “摩騰”란 글자는 서역승이 분명하다. 그가 활동 하던 시절을 현장은 가옆파불시(迦叶 迦葉波佛時)라 했다. 한서를 남긴 반고 (班固, 32-92)는 방불(仿佛)이란 글자가 여러 곳에 실렸다. 촉군 사람 사마상여 또한 “若神僊之仿佛”란 문구를 썼다. 사천성 남주에 토속 불교가 정래 되었다고 본다. 당시 불상이 알려 졌다고 본다. 처음 운남성을 통해 황노 사상이 천축국에 알려져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같은 길을 따라 불교가 후한초에 중원에 들어 왔다.
신지란 신선(神仙, 神僊)이 사는 곳에 있는 호수란 뜻의 가상 이름이다. 선진문헌에는 보이지 않고 후한 대에 나타났다. 단군왕검 백익이 고조선의 수도를 정하고 있던 하동 해지(解池) 연안에 정했다. 제정일치를 겸한 최고 지도자를 곤륜 (昆倫, 昆侖)이 살던 마을에 있는 호수라 하여 곤지(昆池)라 했다. 백익을 따르던 사람들이 사는 운남성에 있는 곤명지 (昆明池)를 신지라 했다. 이를 백익과 음이 같은 이해(洱海, Erhai) 라고도 한다.
인도(印度)란 글자는; 그지역에 살던 최고의 지성인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인도 (人道,仁道)란 뜻, 또는 천부인(天符印)을 전(度)한 곳이다. 원시불교 가 탄생한 지역은 인도의 지도층 파라문(Brahmin, 婆羅門)이 다스리던 지역 밖이다. 히말라야 산맥 동남 쪽 운남성 경계의 오지(隨地)를 뜻했다.
원시 불교의 고승 (迦叶摩腾)이 금인(金人)의 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운남성을 통하는 길이 막혀 먼 길을 돌아 양산 가까이 흐르던 낙수 가까이 있던 수도 낙양(洛陽)에 들어 왔다. 같은 음 떠러질 낙 낙양(落陽)이 아니다. 불교가 후한 명제 (明帝, 58~75년) 때에 전래 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와 여러 불교 경전 또는 역사서에도 그렇게 설명 했다.
도교경전으로 알려진 노자 서승경(老子西升經)은 노자가 운남성에서 서쪽 높은 지역으로 갔다는 뜻이다. 왜인전에 노자가 호를 가르쳤다는 경로다.[33] 후한 (桓帝 劉志, 132년 ~ 168년)시대 산동성 사람으로 강남에 정착 했던 사람이 남긴 모자(牟子)에는 광동성 지역에는 불교가 성행 했다고 했다.[34] 운남성 서쪽에서 육로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본다. 남북조 시대 부터는 주로 해상로를 통해 강남에 전래 되었다. 연안을 따라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휴인(休忍)이 있던 발해만 연안에 남방불교에 나오는 가라(加羅)를 나라 이름이 나타났다.
백익의 후손들이남조(南詔 Nanzhao)를 세웠다: 백익의 후손들이 사천성(益州) 운남성에 흐터져 살았다. 중원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남쪽 평화스러운 곳이었다. 지상의 낙원에 이르렀다(至那)는 뜻으로 Shangri-La라 했다. 그들이 황노사상을 전달 하여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백익이 받았던 제정일치 통치권이 현제 달라이라마가 인도 하는 티뱃 불교에 남아 있다. 티뱃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토착 신앙을 흡수하여 대승 불교가 나타났다. 동진(東晉317년 ~ 420년)시절에 해상로를 따라 중국 동해안에 확산 되었다. 혜초(慧超)가 이 해상로를 따라 인도에 갔다. 인도 서쪽으로 가서, 씰크로드를 따라 장안에 도착했다. 삼한의 후손들이 동남아 해안 지역에 세운 나라들과 해상 교류가 활발하여 통일 신라의 전성기를 이루 었다. 원시 불교가 고조선의 고유 신앙을 본따 미륵 (彌勒) 신앙이 나타났다. 인도 동쪽에는 아직도 한국어휘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끝
November 20, 2021. Revised November 25, 2021
[1]. 大唐西域記 序:妙窮津會。於是詞發雌黃。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載佇風徽。召見青蒲之上。乃眷通識。前膝黃屋之間。手詔綢繆。中使繼路。俯摛睿思。乃制三藏聖教序。凡七百八十言。今上昔在春闈。裁述聖記。凡五百七十九言。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凡六百五十七部。具覽遐方異俗
[2]. 史記 大宛列傳: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問曰:『安得此?』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其俗土著,大與大夏同,而卑溼暑熱云。其人民乘象以戰。其國臨大水焉。』
[3]. 《題梵書》:鶴立蛇形勢未休,五天文字鬼神愁。支那弟子無言語,穿耳胡僧笑點頭。
[4]. 大唐西域記 卷第十: 渡大河至迦摩縷波國東印度境。斯則王化所由國風尚學。今印度諸國多有歌頌。摩訶至那國秦王破陣樂者。聞之久矣。豈大德之鄉國耶。曰然。此歌者美我
[5]. 訄書:遠藤隆吉曰:「孔子之出於支那,實支那之禍本也. 支那以蠶絲名,世謂震旦、支那,譯皆言秦。今人考得,實為蠶義
[6]. 大唐西域記: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雞林. 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凡六百五十七部。具覽遐方異俗。
[7].大唐西域記:山經莫之紀。王會所不書。博望鑿空。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 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8].大唐西域記:山經莫之紀。王會所不書。博望鑿空。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 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9]. 三國志 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不能詳載,故略之如此
[10].大唐西域記: 卷第八:是無憂王作地獄處。釋迦如來涅槃之後。第一百年有阿輸迦 唐言無憂舊曰阿育訛也王者。頻毗婆羅唐言影堅。舊曰頻婆娑訛也王之曾孫也
[11].https://ctext.org/zh: 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紀元前二百七十年頃,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使之宣布各地。
[12]. 史記 司馬相如列傳: 相如以「子虛」,虛言也,為楚稱;「烏有先生」者,烏有此事也,為齊難;無是公者,無是人也,明天子之義。故空藉此三人為辭,以推天子諸侯之苑囿。其卒章歸之於節儉,因以風諫。奏之天子,天子大說。其辭曰:「『將息獠者,擊靈鼓,起烽燧,車案行,騎就隊,纚乎淫淫,班乎裔裔。於是楚王乃登陽雲之臺,泊乎無為,澹乎自持,勺藥之和具而後御之。不若大王終日馳騁而不下輿,脟割輪淬,自以為娛。臣竊觀之,齊殆不如。』於是王默然無以應仆也。」
[13].三國佛學大辭典: 卷第三:【身毒】 (國名)即天竺也。山海經曰:「身毒之國,軒轅氏居之。郭註,天竺國也。」史記大宛傳曰:「大夏東南有身毒國。」索隱曰:身音乾,毒音篤。孟康曰:即天竺也。漢書西域傳作天篤,後漢書杜篤傳作天督。玄應一切經音義曰:「天竺或言身毒,或言賢豆,皆訛也。正言印度。印度名月,月有千名,斯一稱也。」
[14].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尚書 商書 微子: 父師若曰:「王子!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今殷民乃攘竊神祇之犧牷牲用以容,將食無災。
[15]. 史記 西南夷列傳: 蒙歸至長安,問蜀賈人,賈人曰:「獨蜀出枸醬,多持竊出市夜郎。夜郎者,曰「從東南身毒國,可數千里,得蜀賈人市」。或聞邛西可二千里有身毒國。騫因盛言大夏在漢西南,慕中國. 南越王黃屋左纛,地東西萬餘里,名為外臣,實一州主也。
[16].三國遺事 卷第三: 善德王代。寺初主真骨歡喜師。第二主慈藏國統。次國統惠訓 貞觀十年丙申。慈藏法師西學。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文殊又云。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
[17].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長二萬四千裏,闊一萬二千三百裏。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自二十六至一百九十度。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18]. 海國圖志 “支那”: 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
[19]. 海國圖志 -> 檢索 “支那” 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甫六年,與佛蘭西戰,敗績於支那,國幾不守。近日乘佛蘭西為俄羅斯所敗.
[20]. 大清一統志: 支那:,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合有二十九,不能詳載,故略之如此
[21]. 宋高僧傳 釋蓮華。本中印度人也. 敕廣州節度使李復修鼓鑄畢.一云梵夾本是南天竺烏荼國王書獻支那天子。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展轉游化漸達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22]. 康熙字典:《唐書·南詔傳》初鳳迦異築柘東城,諸葛亮石刻故在,文曰:𥓓卽仆,常以石搘捂. 舊唐書:南詔蠻蒙異牟尋大破吐蕃於神川,使來獻捷,語在《南詔傳》。黃少卿攻陷欽、橫、潯、貴四州,吐蕃渠帥論乞髯蕩沒藏悉諾律以其家屬來降。明年,並以為歸德將軍。吐蕃寇慶州及華池縣,殺傷頗甚。《唐會要》曰:《南詔樂》,貞元十六年正月南詔異牟等作《奉聖樂》舞,
[23]. 詩經: 商頌 那: 詩說 商頌: 祀成湯之樂歌.冉,阝:《玉篇》同那). 那:何也,都也.
[24]. 通典: 天寶二年 743년,追尊咎繇為「德明皇帝」,涼武昭王為「興聖皇帝」。仍各立廟
[25].舊唐書 桂林: 漢嶺方縣地。屬鬱林郡。秦為桂林郡地. 漢書 志: 粵地。屬鬱林郡。秦為桂林郡地 粵地,牽牛、婺女之分野也。今之蒼梧、鬱林、合浦、交阯、九真、南海、日南,皆粵分也.
[26].史記 周本紀: 我南望三涂,北望嶽鄙,顧詹有河,粵詹雒、伊,毋遠天室。三國史記:道琳曰:「大王之國,四方皆山丘河海,是天設之險,非人為之形也. 又取大石於郁里河,作槨以葬父骨.
[27].大樓炭經 西晉 法立共法炬譯. 法海經 西晉沙門法炬譯. ㅡ唯然世尊。願欲聞知。佛言諸比丘
[28]. 大越史記全書序: 安南與暹羅,地相近也,風土相似也,疆域、人口相若也. 我日本嘗同文軌者,為支那、為朝鮮、為安南。支那、朝鮮於我有舊好;而安南古或有我船舶至其國者,蓋西邊商估以財貨往來耳
[29]. 大唐西域記 序:妙窮津會。於是詞發雌黃。飛英天竺。文傳貝葉。聿歸振旦。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載佇風徽。召見青蒲之上。乃眷通識。前膝黃屋之間。手詔綢繆。中使繼路。俯摛睿思。乃制三藏聖教序。今上昔在春闈。裁述聖記。凡五百七十九言。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豈能緬降神藻以旌時秀。奉詔翻譯梵本。 具覽遐方異俗
[30]. 大唐西域記: 詳夫天竺之稱。異議糾紛。舊雲身毒。或曰賢豆。今從正音。宜云印度。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言諸群生輪回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其猶白日既隱宵燭斯繼。雖有星光之照。豈如朗月之明。茍緣斯致因而譬月。良以其土聖賢繼軌導凡御物如月照臨。由是義故。謂之印度。印度種姓族類群分。而婆羅門特為清貴。從其雅稱傳以成俗。無雲經界之別。總謂婆羅門國焉.
[31]. 大唐西域記 序: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出高昌故地。自近者始。曰阿耆尼國舊曰烏耆.
[32]. 大唐西域記: 城東二里有窣堵波。高三百餘尺。無憂王之所建也。編石特起刻雕奇製。釋迦菩薩值然燈佛: 中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 伽藍側有窣堵波。高數百尺。無憂王之所建也。
[33]. 三國志 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浮屠所載臨蒲塞、桑門、伯聞、疏問、白疏間、比丘、晨門,皆弟子號也。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浮屠屬弟子別號.
[34]. 大唐西域記 序: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出高昌故地。自近者始。曰阿耆尼國舊曰烏耆. 舊唐書:《牟子》二卷牟融撰. 牟子 漢桓帝時蒼梧太守牟融著書號牟子,推美釋氏。見釋門正統四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