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examination of Imna Gaya
임나가라(任那加羅)설의 새로운 고찰
Abstract: The Book of Song has the same name of characters 任那加羅 as seen in the Gwanggaeto Stele erected in 414 by his son Jangsu. Silla, Imna Gaya, and all other small town-states around the western shore of Balhae Bay were chased out during the era of those two kings. Old name of Silla known as Xiē la(薛羅) was in the region along with Baekjae and Hyu-In(休忍) before the King Gwanggaeto. Phonetic variants of Gaya (加良) and the gayageum appear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Taoist Elders went up to the eastern part of Himalaya Mountains through the Tea Horse Route(茶馬古道) and taught the Taoism. The new religion emerged around the current Bhutan, spread out along the Indus River valley to the entire subcontinent during the 3rd century BC, and evolved to many variant forms of Buddhism. Souther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part of China through the sea route and spread up to the Balhae Bay region during the late stage of Jin (東晉; 317-420)dynasty. It replaced the Buddhism from the west, assimilated with the folk religion, and left a branch of new Buddhism, Maitreyanism.
The sea route through the southern part of Yellow Sea was established around 479. New Buddhism from the southern part of China reached to the Southern part of Korea. The King Beopheung (法興王: r. 514–540 AD) adapted Southern Buddhism. Silla Imna Baekjae and all others together made the Wei strong. Silla unified Korea in 668. Wei changed to Nihon in 670. The people in the Korean peninsula went to the Japanese archipelago, cultivated the locals, and made the new nation strong. Not the other way around Gaya.
주제어:4-5. 백익. 홍산문화. 환단고기. 임나가라(任那加羅). 원시불교. 미륵신앙. 인도. 卍자. 지나. 태국 화랑. 가라의 어원. 남조, 대리국. 삼태극.
I. 머릿말 | IV. 왜오왕의 해상로 개발 |
II. 논란의 시발점. | V. 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
III. 원시 불교의 전래 | VI. 맺음 말 |
I 장: 머릿 말
논란이 많은 임나가라(任那加羅)와 같은 글자가 송서(宋書)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1] 원나라에 멸망된 송나라 역사(宋史) 에는 가라(伽羅)가 불교 국가인 서역에서 나타났다. 사마상여가 파촉 (巴蜀) 에 길을 내고, 오팽이 조선을 멸하여 창해군을 세웠다. 조선 유민들이 사는 천진-당산 일대 에서 신라가 나타났다. 신라 초기에는 “倭 ,백제, 고구려, 낭랑 말갈 임나가라 (任那加羅) 등 여러 부족 국가”로 둘러 쌓였다. 해하 (海河) 수계 하류, 발해만 서남쪽, 삼국지 변진전에 속한 지역이다.[2] 가야금과 비슷한 현악기 가 그지역에 있었다.[3] 후손들이 한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진출 했다.
임나 (任那) 는 같은 글자로, 신라와 가라(加羅)는 음이 같은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가라(加羅)는 불교 발생지의 언어였다는 가설이 성립 된다.
황하문명 발생지 밖이라 중원사람 들이 편찬한 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흔적만 남았다는 뜻에 “Silent Majority; SMa”라고 표현 했다.[4] 내릴 강 북녁 북 흰 백(降,北,伯) 북적 등 몇몇 글자 속에 두 문화권의 관계가 있다.
상형글자의 음과 뜻을 어떻게 정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흰백자. 숫자 백(百)을 온으로 사용 했던 시기, 글자를 만든 장소, 용도에 따라 결정 했다.
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에서 가라의 어원을 찾아 보았다. 한해의 남쪽 항로는 백제 개루왕의 한성이 점령 당한 이후, 백제와 가락국이 479년에 개통 했다.[5] 그 시절에 신라가 한반도에 내려 왔다.[6] 진서와 십육국 춘추에 백제(百濟)와 같이 나오는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 임나 가라 (任那加羅)의 다른 이름이다.[7] 원양 항해의 핵심이 되는 큰배와 원동력 방향설정기, 나침 (羅針)판이 필수 요건이다. 의문의 해답은 범선(帆船)이란 글자에 있다.
II 장: 논란의 시발점
역사의 흐름을 고려 하면서 사서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풀이 하면, 광개토대왕의 격전지는 남만주에서 해하 수계에 이르는 지역이 었다.
가까이 홍산문화권 사람들이 산너머 의무려산 일대에 정착 했다. 천제 (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기원전 239년에 북부여 (北扶餘)의 수도를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정했다. 홍산 문화권의 역사가 환단고기에 실려 있다.
황하문명 발생지에서 지도자를 잃 고 남쪽으로 도망 갔던 사람들이 차마고도를 따라 히말리아 산맥 동쪽 수지 에 고조선 발생지에 전해 오던 설화를 전했다. 그 내용을 원시 불교가 발생한 지역 사람들이 번역 하여 대루탄경 초안을 남겼다.[8]
천진 일대에 정착 했던 비류왕 후손과 남쪽에서 올라온 휘도왕 김일제의 후손이 화친 하여 공손도 세력이 나타났다.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 ~ 197년)가 이에 동참 했다. 동명왕의 후손과 추모왕의 후손은 남만주 발해 요동만 해안에서 오랫동안 싸웠다.
관구검이 발해만 연안에 있던 대륙백제, 가야 연맹 세력을 모아 고구려를 침략 했다. 백제 고이왕 때 진충(眞忠)이 한낭랑(漢樂浪) 을 친입 했다 후에 돌려 주었다. 진충(眞忠)이 신라의 이벌찬이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태백성 이 달을 범하고, 여우가 시조 사당 뜰에서 울었다는 흉조가 나타난 후에 낙랑 에서 자객을 보내 백제왕을 죽였다.[9] 당시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한때는 원상 (袁尚; ?-207년)을 도왔던 오환 선우 아라반(阿羅槃)이 관구검 세력에 동참 했다. 관구검에 쫓기던 동천왕은 최리의 낭랑국 (樂浪國)이 있던 요동반도 옥저 (沃沮) 땅에 피신 했다. 호동왕자가 사냥 갔던 곳이다. 전쟁이 끝나 고구려는 돌아 가고, 남아 있던 세력이 신라라고 했다.[10] 고구려 는 졸본에 있던 옛 평양 (都王儉)으로 수도를 옮기고 신라에 사신을 보네 결화 (使結和)를 했다.[11] 사람들이 동천왕(東襄王: 227년 ~ 248년) 의 묘에 찾아와 자결을 하고 향불을 붙여 자원(柴原)이라 했다. 고구려와 비류의 후손이 세운 대륙백제 사이에 작은 나라 신라가 있었다.
1절: 조위 시대에 불교 전래: 후한말에 들어온 불교가 조위 시대에 발해만 연안에 있던 신라에 아도(阿道)가 불교를 전했다. 강남에서는 착융(笮融, ? ~ 195년)이 불교 세력을 펼쳤다. 발기의 친우였던 고대(高岱)가 강남에 살았다.[12] 관구검(毌丘儉) 을 도왔던 오환 지도자 아라반과 같은 이름 아라 (阿羅)가 아라한 (阿羅漢) 으로 대당서역기와 통전 변방 천축국 편에 실렸다.[13] 왜인전에서 서역을 설명한 문구에 아라 득포 (阿羅得布) 라고 실렸다. 오환선우 아라반이 통치하던 지역에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 있었다. 요동성 아육탑(阿育塔) 설명에서 휴도왕과 금인의 연원을 고려 하여 위진 시대 이전이라고 했다.[14]
서라벌 (徐羅伐)을 “新盧, 斯羅” 설(薛xiē, 解)라 했다. 햇볓이 밝은 들 (Prairie, Arable field, 벌판)이란 뜻이다. 중국 오호 십육국시대에 돌궐 계통의 황제 부견 (秦苻堅, 재위: 357년 ~ 385년)을 찾아 갔던 신라 사신 위두(衛頭)가 국호를 바꾸었다고 알렸다.[15]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고구려는 도교와 서역불교 를 신봉 했다. 성왕 (聖王) 이라 부른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 승려 순도가 불경을 전했다.
해양권을 잡았던 대륙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 -375년) 이 남쪽으로 밀려간 동진에 사신을 보내고, 졸본주에 있던 고구려 수도 평양을 공격했다. 고국원왕이 전사 했다. 한해를 건너 고구려 남쪽 대동강 하구 한성(漢城)에 수도를 정했다. 침류왕 2년(385)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 부터 불교를 전수 받아 대동강 하류에 남방 불교가 들어 왔다.[16]
신라 발생지에 현토대수가 대릴 사위로 맞았던 공손도가 정착 했다. 그의 후손 공손연(公孫淵, ? ~ 238년) 이 강남의 오나라와 결탁 하다 실패 하여 양평성에서 잡혔다.[17] 동오 손권과 교류 했던 고구려는 한때 당산 일대 서안평을 점령 했다. 공손연을 토벌한 사마씨가 조위로 부터 양위 받아 서진이 나타났다. 서진은 비류의 후손을 고위 관직(제상)에 두었다.[18] 사마씨는 고조선의 잔유 세력과 화친 형태로 권력을 유지하다 왕자들의 발란이 발생하여 결국 강남으로 쫒겨가서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 되었다. 요하를 방어선으로 고구려는 서쪽 세력을 견제 했다.
서쪽 세력이 팽창하자 광개토대왕의 조부 고국원왕 (故國原王, 재위: 331년 ~ 371년)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동천왕이 되찾았던 평양 에서 백제 근초고왕의 친입을 받아 전사하여 주몽(朱蒙)이 정착 했던 땅을 빼앗겼다. 소수림왕의 조카 광개토대왕은 산너머 압록강변, 국내성 집안 (國內城, 集安) 에서 태어났다.[19] 대왕은 고구려의 다물(多勿) 정신 을 다했다.[20] 옛 땅을 찾으려고 많은 전쟁을 하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광개토대왕은 압록강을 너머 한반도로 내려올 이유가 없었다.
2 절: 광개토대왕 비문: 필자의website 와 face book에서 설명 했었다.[21]
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候城力城 北豊五備海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為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科殘國軍.
어조사로 풀이하는 이(而ér, 以yǐ) 두 글자가 당시 만주에서는 다르게 사용 되었다. 흔히 “말 이을 이, 而”로 읽는 글자는 능할 능으로 풀이해야 옳다. 기린의 수염을 묘사한 상형글자라 했다. 수염이 자란 건장하고 능력이 있는 서쪽에서 온 월지국 사람(而, 髵)을 묘사한 글자다.[22]
문제의 “능왜이 신묘년 래(而倭以辛卯年來)란 문구는, 그 전의 전쟁에서 얻어온 왜인 포로 중에, 바다에서 배를 잘 다를 수 있는 기술(才能, skill)이 있는 자들이 드디어 “신묘년(가을)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來)” 이들을 사공으로 사용(以)하여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발해만 동남쪽 요동 반도 끝에 이르러 백제가 가장 중요시 하던 통상로에 있는 높은 나무가 없는 대머리 산, 독산(禿山; 성 사면이 바다로 싸인) 성을 함락 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대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서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 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켰다.[23]
대왕의 업적을 기린 비문이라 제일 큰 전공을 처음 실었다. 그에 실린 지명은 모두 사기 조선 열전과 한서 지리지 낭랑군, 요동군 일대에 있던 지명이다. 앞서 인용한 비문 내용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의무여산을 지나 (갈석산?) 산을 뒤로(負山) 하고 염수의 북쪽(鹽田上; Salt farm)에 이르러 그 지역에 있던 3부락 6~7백 진영(當營)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많이 노획해 왔다. 그곳에서 돌아 오면서 양평으로 가는 길 (襄平道)을 따라 올라와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하며 (요하 동쪽으로)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가 옛적 같이 속민 (結和)이 되여 조공을 바쳐왔다. 도망가는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 (任那加羅)에 이르러 종발성(從拔城; 敦拔城.拔奇의 城?)하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남만주 발헤만 연안에 있던) 신라(新羅)인으로 지키게 했다.[24]
3.절: 신라의 수도 이전:
1 항: 시대구분: 삼국유사에 “上古 中古 下古”하는 문구가 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智證王, 437?~514년) 조에 있다.[25] 스님이 분류한 시대 구분이라, 특정 사건을 계기로 구분 하면서 불교 전래를 포함 시켰다.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신라가 성장 했다. 왕이란 칭호를 쓰기전, 내물 마립간 (奈勿 麻立干, 재위: 356년 ~ 402년) 때 부터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재위 417년 ~ 458년) 을 거쳐 지증왕(智證王, 437?~514년)이 어린 시절인 478년 경에 수도를 경주로 옮기고 왕이란 호칭을 썼다.[26] 아들 모(募,泰)가 왕이 되어 불교가 왕성 (法興王立)하여 기반(諱原宗)을 닸았다. 그 시대에 남방 해상로가 알려져 강남과 교류가 활발 했다. 남조 역사서에 夫餘씨 왜오왕이 나타나고, 동남아 해안을 따라 천축국에 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394년 ~ 491년)이, 대동강 하구 욱리하(郁里河) 연안, 강서고분이 발굴된 지역에 있던, 백제 수도 한성(漢城)을 공격 했다. 개로왕 (蓋鹵王)은 바다 건너 북위와 한반도에 이사 오고 있던 신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구원병이 도착 하기 전475년에 한성은 함락 되였다.[27] 백제 한성이 점령 당한 이후 백제와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의 사신이 한해 남로들 건너 남제에 갔다 479년에 돌아 왔다.[28] 개로왕의 아들이 문주왕 (文周王, 汶洲: ? ~ 477년) 은 당분간 강화도에 정착 했었다. 열도부여 왜(倭)에 총통으로 나가 있던 개로왕의 동생이 돌아와 혼란에 빠진 백제 지도층을 수습하는 어려운 시기을 맞았다. 그의 아들이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 (東城王, ? ~ 501년, 재위: 479년~501년) 이다. 뒤를 이은 무령왕 (武寧王, 501년~ 523년) 무덤이 충청도 공주시 에서 발굴 되었다.[29]
2.항: 백제 수도:백제는 전성기에 부여씨의 자손을 22 곳 담노(擔魯)에 관리자로 봉했다. 담로를 때로는 수도로 사용 했다. 통전에 백제는 (한해) 동서에 수도를 두었다고 했다. 삼국유사에 “백제 전성기 에는 아침 저녁 쉴새 없이 세 봉우리 를 날아 다녔다”고 표현 했다.[30]
국론이 분분했던 백제 지도층의 압력에 동성왕은 신라와 합세 하여 옛 수도가 있던 한성과 발해만 연안에 상륙하여 서쪽으로 요서를 공략 했다. 그가 마지막 왜오왕이다. 신라는 북쪽으로 薩水원에서 고구려와 싸웠다.[31]
백제는 542년 (梁大同七年)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성왕(聖王) 시절이다. 양자강 하류 에 있던 수도 거발성 (居拔城)이 549년에 함락 당해 사비(泗泚) 성으로 옮겼다.[32] 광운에 부여(夫餘)씨의 발원지라 한 곳이다.[33] 발해 고(高)씨가 북쪽 업(鄴)에서 550년에 북제 (北齊)를 세웠다.
3.항: 금관 가야:가락국기에 라한 (羅漢) 용왕(龍王) 사자(師子) 아유타국 등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여러 글자가 보인다. 서쪽에서 오던 배가 동쪽 계림 으로 갔다. 가야는 신라 보다 먼저 도착하여 낙동강 하구에 자리를 잡고 점차로 상류로 올라 갔다.[34] 진흥왕 23년(537년) 에 사다함 (斯多含) 의 화랑도가 백제 남방(南方)의 담로 (簷魯) 였던 가야국 (加耶國) 을 정벌 했다.[35] 가락국(駕洛國)의 수도가 백제의 담로 구지하성 (久知下城) 이다.
4 항: 남조 역사서: 남조 역사서에 나타난 사자국 (獅子, 師子國) 의 위치에 혼란이 있다.[36] 사자국 은 동진 원희 (晉義熙:405-419 년) 초 사신 을 통해 옥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열권(經十載)을 보냈다. 그 후 계속 하여 송 나라 에도 사신이 왔다. 부여씨 왜오왕이 다스렸던 백제 신라 임나 가라 (新羅 任那 加羅)등 7 부족 국가가 강남 지역에 있었다. 그들이 수나라 설립 당시 산으로 바다로 더 멀리 퍼져 나가 조선 안남과 접한 지나(支那) 라고 하는 동남아 해안 방대한 지역에 정착 했다.[37] 삼한의 후손들이 해양권을 잡고 부터 남방 불교 문화가 한반도 남단에 이르러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5 항: 제주도 하루방과 해태 (Unicorn)의 유래: 울릉도(鬱陵島) 정벌에 배위에 세웠다는 사자상 (木偶師子)은 사자국(獅子)국에 세워 놓은 스승 사자(師子)를 음역 한 글자다. 요순 (舜) 시대 에 대리 (大理)라는 법관이 었던 고요(皐陶)가 쓰던 관에서 유래 되었다.[38] 대리국 사람들이 동남아 해안에 정착하여 평화와 안녕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석탑을 세우고 그 위에 사자 상 (師子為吼) 을 세웠다.[39] 법헌전과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스승사자 (師子)를 남조 역사서 에서는 맹수사자 사자국(獅子國)로 기술 되어 여러 곳에 나타났다. 남방으로 내려 갔던 환웅상 장승 (Totem Pole) 이 제주도 에 하루방 으로 나타났다. 같은 개념 을 조각한 흉상이 인도 남부와 동남아 에서는 사자(숫 獅子), 중국 동남 지역에서는 “신수 해태” 로 묘사 되었다. 한국 불교 사원 에서는 사자 해태 또는 고양이로 나타났다. 울릉도의 울(鬱) 자,설악산 울산바위 또한 불경에서 유래한 사음자다.[40]
III 장: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
서양인으로 불교에 입적하여 대만에 거주 하는 고명도 (高明道,Friedrich Grohmann) 는 고전에 나오는 고유 명사의 표기가 혼잡스러워 원시불교가 중원에 알려진 경로를 확인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41] 지리지형 과 통상로를 살펴 보면 불교는 크게 세 경로를 통해서 중원에 들어 왔다.
현장의 서역기 에는 옛적에 전해오던 명사를 당나라 초기 어음으로 설명 했다.[42] 그후에 나타난 각종 기록에 쓰인 글자를 종합하여 상식적인 판단을 해야 원시불교 의 발생지와 전래를 알수있다.
1 절: 글자 속에 사실이 있다:
저자 불명의 노자서승경(老子西昇經)이 돈황(敦煌)에서 나타났다. 서승 이란 글자는 (운남성에서 차마고도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 갔다는 뜻이다.
1 항: 부도(浮屠)란 글자의 뜻은 떠돌리 백정이란 뜻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 합당하지 못한 글자다. 백익 살해사건과 관계가 있는 글자다.
석가모니칭호의 꼬깔 모(牟)자는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의 상형글자”는 유목민이란 뜻이다. 출생지를 람비니원(嵐毘尼園), 생모를 마야(摩耶, Maya)라 한다. 엄마야 를 마야라 했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골짜기에 살던 빛을 숭상하는 유목민의 자손이란 뜻이다. 현장이 다녀온 여러 곳에 가라국이 있었다. 이를 무우왕(無憂王)이 다스렸다.
2항:가라(加羅)의 어원: 여러글자로 표기된 가라 는 모두 냄새나는 나무를 태워 불공을 드리던 타가라 (Tagara;多伽羅) 의 사음자다.[43] 석가모니가 생불이 되어 나타난 육신을 승가라(僧伽羅)라 했다.[44] 옛적에 사자상을 세워 놓은 나라(古之師子國)를 스님이 다스려 승가라국 (僧伽羅國) 이라 했다. 도덕경의 무위(無爲) 사상을 지키는 나라라 무위국 (無憂國)이라고도 했다. 임나가야의 어원은 불교 사원, 스님이 다스리던 나라란 뜻이다.
3 항:인도(印度)의 어원: 황로 사상이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 동북쪽 산악 지대 수지(隨地)에 전래 되었다. 현장은 인도 지도자에게는 수지 사람들이 믿던 종교가 세로웠다 하여 무위지교 미신 (無為之教彌新) 이라 했다. 현지인 들은 수지를 하나의 국가로 인식 했다.[45] 새로 정착한 곳을 천부인 (印)이 도착 한(度; reach to. deliver to) 곳이라 좋은 뜻으로 인도라 했다. 선비족 우문씨의 우문(宇文) 이란 뜻은 위에서 (하늘로) 부터, 글자(天符印) 을 받았다는 뜻이다. 탁발부의 탁발은 아사달에 살던 집안(신라 여섯 마을 을 xx宅 이라 했다) 이란 뜻이다.[46]
불교가 나타난 곳에서는 이중어를 썼다. 장건(張騫)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대나무와 촉포(竹杖, 蜀布)를 보았다. 신독(身毒)국 상인으로 부터 샀다고 했다.[47] 차마고도 (茶馬古道)는 옛부터 촉국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였다. 올라 갔던 길을 따라 다시 남조(南詔)에 전래 되었다.
4 항: 대루탄경(大樓炭經): 숱으로 낙서를 한 큰 사원에 얽힌 사연을 모집한 책이란 뜻이다. 아사달에 전해 오던 태고적 역사와 어음이 대루탄경 에 실려 있다. 여러 변역본이 생겼다. 내용에는 환인 (桓因), 전투, 우주관이 실렸다. 아사달에서 여러 왕들과 서로 싸운 장면을 종교관을 더해 은유적 으로 기록 했다. 급총죽간 문헌에 왕중왕이 된 [백익이 개를 제후 (乾啟)로 임명 하니, 개가 백익을 죽였다] 는 사실을 양서의 저자 요사렴 (姚思廉)은 경후 (侯景: 503년-552년)가 거발성을 점령하고,북제가 나탄난 전환기 를 석이예란하 (昔夷羿亂夏), 견융액주 (犬戎厄周) 라, 즉 왕검 조선의 주민 들이 하나라와 싸웠고, 서주를 괴롭 혔다고 기록 했다. 백익 살해 사건은 산해경을 비롯한 선진 문현 여러 곳에 실렸다.[48]
5 항: 불교 문양(佛教Logo)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한국에서 국기로 쓰는 태극기의 원조는 주역(易)이다. 천부경을 받은 고조선 사람들이 연산역을 남겼다. 단군설화에 나오는 세 보좌관 “風伯 雨師 雲師”가 삼랑신(三郞神; 𣬛郞神)이다. 삼극(三極)으로 표기 되었다.[49] 삼랑(𣬛郞) 은 장도(銀粧刀)를 지닌 세 유목민 이란 뜻이다. 이들이 백익을 수호하다 죽어 모두 별이 되었다. 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삼태성 (三台星), 북두칠성과 견우직녀 하는 전설과 그에 연유된 어음이 한국어에 나타났다. 천부경 (天符經) 에 실린 무시일석 (無始一析)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무우왕 無憂王 이란 칭호가 나왔고, 온천지 사방을 밝히는 만卍자와 태극 문양을 원시 불교에서 인용 해 갔다.[50] 서역기에 무위지교미신(無為之教彌新)이란 문구가 있다. 도덕경의 핵심이 인도의 지도자에게는 새롭다는 뜻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 (無爲) 가 와전되여 무우 또는 아육 (唐言無憂 舊曰阿育)이라 했다.[51] 아육 (阿育) 이란 내가 위(I am the highest, 唯我獨尊)란 옛적 어음이다.[52] 삼국유사 여러 곳에 나온다.
6 항: 수미산(須彌)을 옛적에 묘고산 (妙高山)이라 부르던 높은 산이다. 삼묘(三苗)를 삼위(三峗) 에 몰아내고 공공(共工)을 유도(幽都)로 유배 보냈던 높은 항산(恒山, 常山, 桓山, 嵩山)을 뜻한 글자다. 동서남북 네곳을 통치하는 수미 (須彌山)가 살았다. 수미를 보호하는 자를 사천왕 (四天王) 이라 했다.[53] 금은동철륜왕(輪王)이라 이름했다. 금륜왕 (金輪王) 이 사방 (四方) 을 모두 다스린다.[54] 그 곳에 전륜성왕 (輪王之苑囿)이 기거 했다. 인도 동북 쪽 차를 많이 생산 하는 지역(荼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55] 백익을 살해한 사람들이 하(夏) 나라를 세워 우(禹, 昔禹)를 시조로 한다.[56] 스승의 아들 (師子) 형상이 벽화에 나타났다.[57] 신이 변한 (神變)여러 동물 형상 으로 나무 또는 돌기둥 위에 올려 놓았다.
7 항: 아사달을 수미산(須彌山) 이라 했다. 최고의 지도자를 곤륜(昆侖) 이라 했다. 제일 높은 제사장으로 되살아 나서 사는 높은 산(蘇迷盧山)이 수미산 (須彌山)이다.[58] 요순시절에 삼묘 환두 (驩兜) 를 북쪽 공공국에 있는 항산에 [귀양을 보냈던 무리가 되살아 나타났다]는 전설을 설명 했다. 강화도의 마니산과 같은 뜻이다. 신라 문무왕이 670년에 수미산 (須彌山) 을 보네 안승을 후고구려의 왕으로 대동강 하구 한성(漢城)에 봉했다.[59]
삼국유사에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 (烏忌日)이라고 한다.[60] 삼족오와 관련된 표현이다. 도교에서는 상원(上元) 이라고 한다. 인도 승가라국 (僧伽羅國)에서는 매년 여래대신(如來大神)이 만월로 변하여 섯달 그뭄 날에 나타난다. 정월 대보름 다음날 아침이 천축국 새해 첫날이 었다.[61] 월력 (月曆) 석가 탄생일이 세해 첫날이다. 도교의 산물이다.
8항: 비구(比丘)가 아사달: 아사달(阿斯達, Asadal) 은 아침 햇살이 비친 들이란 뜻아다. 음과 뜻을 이를 이리저리 바꾸어 적은 글자가 비구 (比丘) 다. 아사달에 큰 사원이 있어 그 건물에 수도자가 많이 있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비구니(比丘尼) 라 했다. 아사달이 점령 당한 상황에서 아수라장 (阿修羅場)이란 용어가 생겼다.[62] 인도 설화에는 아수라 (Asura) 라는 악한 귀신무리로 나타난다.
9 항: 원시불교의 발생지 수지(隨地): 숙신씨 마을에옷을 입혀 놓은 웅상 (雄常) 이라고 하는 나무(服常樹)를 사랑간수(伺琅玕樹,totem pole)라고 했다. 웅상을 세운 곳을 수지라 했다. 융우가 죽인(禹殺) 공공국 상유(相柳, 相繇)를 육서에서 상형자라 했다.[63] 상형(相 象形)을 수체힐굴 (隨體詰詘) 이라, 즉 서낭신 이 길한 예기를 하려는 모양의 글자와 같이 그럴듯 하게 그려 놓은 글자가 상형자“日. 月” 이라 했다.[64] 진수가 남긴 고구려 전에는 “隨山谷以為居,食澗水” 란 문구가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서낭을 세워 놓고 산간지역에서 맑은 여울 물을 마시며 살았다]는 뜻이다. 시경에 “無縱詭隨” 란 문구가 있다. 환웅 상을 세워 놓고 기도하던 고조선 고유 신앙이 있었다는 문구다. 통전에는 진수의 임아국 을 인용하여 출처를 진송시대 부도경(浮圖經) 이라 하고, 중원에서 봉선 (封禪) 하는 곳을 타지 (墮地)라 했다. 장승을 세웠던 땅(地, Tan) 이란 뜻이다.[65]
10 항: 범서(梵書)란 글자의 기원: 산서성의 실권자였던 범선자(范宣子)가 그를 찾아온 손님에게 <산서성 사람들은 세록(世祿,가계의 혈통을 기록한 책자) 를 갖고 있다>고 했다. 범(范)선자의 선조들이 지켜오던 가치관을 히말리아 산맥 수지에 전하여 글로 남겼다. 그곳에 사용하던 글자를 음이 같은 범서 (梵書)라 했다. 당 현종이 시문 표제를 제범서 (題梵書)라 했다. 모두 홍범 (鴻範)의 범자를 사음한 글자다.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하여 멀리 가는 배를 범선(帆船)이라 한다. 해초가 먼 바닷길을 범선을 타고 갔다.
2 절: 황로 사상이 원시불교의 기원: 서주의 경기 지역에 남아 시경 조풍 부유(詩經曹風 蜉蝣) 라고 불리우던 고조선 사람들이 사천분지 익주(益州, 古梁州) 를 지나 운남성 곤명호(昆明湖.滇池)연안에 수도를 정했다. 그들이 백익을 살해한 융우 (夏禹氏) 의 추종자들이 세운 하 나라의 시조를 신성시 하여 이를 큰 나무위에 또는 돌로 만든 소 우 (石牛) 의 형상이 있다고 기록 했다.[66] 석우 (石牛, 昔禹)가 인도판 하루방 이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 하는 (Holy cow)풍속이 나타났다. 우상 숭배 우상 (偶像)의 어원이다.
힌머리 노인(老子) 현두(賢頭) 하는 원시불교 발생과 관련된 어음이 힌두교 히말라야, 인더스강, 부탄, 하는 이름으로 그 지역에 남아 있다. 불교경전에는 빛을 뜻한 사음자와 훈역된 글가 많이 보인다.
도교(道教)에 심취 했던 동진(東晉)의 갈홍(葛洪)이 서경잡기에서 곤명호수 (昆明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이 어려서 다녀왔다.[67]
주역계사(繫辭)에 미륜천지지도 (彌綸天地之道)란 문구가 있다. 미彌자는 지도자를 륜綸”자는 동사다. 옛부터 전해오던 천지인 우주관을 설명 했다.
무위(無爲) 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한때 인도 전역을 통치 했던 마우리아 제국(Maurya Empire:기원전 320년-기원전 185년) 왕의 호칭으로 사용 했다. 그가 불교를 전역에 퍼뜨리고 웅상 (雄常)을 세웠다.
3 절: 원시불교의 중원 전레: 삼국지 왜인전에 후한 초에 불경이 구전된 시기 를 (漢哀帝元壽元年) 기원전 2년 이라 했다. 후한 항제(桓帝 132년 ~ 168년)가 불당을 짖고 불교를 믿었다.[68] 정치 사회적 혼란에 휘말린 후한 시대에 토속신앙에 각종 신앙이 번창 했다. 황건적이 도가(道家)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이러한 혼란기에 강남 광주(廣州)지역에 불교가 나타났다. 후한 항제(桓帝 劉志, 132년 ~ 168년)시대 산동성 사람으로 강남에 정착 했던 사람 이 남긴 모자(牟子)에는 광동성 지역에는 불교가 성행 했다고 했다.[69] 현장의 서역기 또한 마등(摩騰)이 곤명도가 막혀(昆明道閉) 통하지 못하고 먼길을 돌아 낙양에 도착해서 불경을 석실에 보관 했다고 한다.[70]
동진(東晉:317 ~ 420)시절에 해상로를 따라 중국 동해안에 확산 되었다. 대당 서역기와 송고승전에 [광부(광동)에 불경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71] 십육국춘추에도 실렸다.[72]
발해만 연안에 있던 백제 설라 휴인 (百濟及薛羅 休忍)을 남방불교 영향을 받아 설을 신으로, 가라 (加羅)를 나라 이름으로 바뀌어 광개토대왕비에 “新羅, 加羅”로 나타났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의 한성을 점령한 시절에 한해 남방로가 개척 되어 그를 따라 남방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 되었다. 그 해상통로를 따라 해초가 다녀 와 남긴 견문록이 왕오천축국전 이다.
4절: 미륵 보살(彌勒菩薩)의 유래: 동진(東晉: 317-420) 시대에 석도안 이 고조선 토속 인앙에 원시불교를 접붙여 나타난 미륵 신앙 (彌勒信仰)의 원조다.[73] 동남아에서 뱃길로 중원 동해안을 지나 백제 (百濟) 설라 휴인 (薛羅,休忍) 이 있던 발해만에 전해 졌다. 서진 회황제(西晉 懷皇帝: 284년 ~ 313년)가 그를 하늘 나라 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도솔 (兜率)의 지도자라 하여 미천석도안 (彌天釋 道安)이라 했다.고조선 영역 태행산 (太行恒山 創立寺塔)에 사탑을 짖고 수도승이 되었다. 그 지역에 쓰이던 언어 풍속이 불경에 반영 되여 미륵 도솔(彌勒, 兜率)이란 명칭이 실렸다. 신라가 발해만 연안에 있던 시절에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가 나타났다.
IV 장:부여씨 왜오왕의 해상로 개발
양자 방언에는 선(船)자 뿐, 범(帆)자는 없다. 그후에 만들어진 글자다. 큰 배(船)에 포를 달았다는 기록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온다. 염사치가 큰 배를 타고 한낭랑(漢樂浪)에 갔다. 동야지동(東冶之東)이란 방향을 정하고 바람 을 타고 갔다는 뜻이다.[74] 그러나 돛 범(帆)자는 쓰지 않았다.
1 절: 범선(帆船)의 유래: 범(帆)이라 읽는 글자를 환(fan) 이라고 읽었다. 둥근 밝은 물체의 상형자 로 [해 달 새알] 등을 암시했던 글자다. 범선의 범자는 고조선 영역에서 유래 했다. 오환(烏桓 烏丸)의 성산인 항산, 즉 아사달과 관련된 글자다.[75] 그 지역에 숙신씨 가 살았다. 산해경에 [늘 옷을 잎고 머리가 셋이 세겨진 사랑간수 (伺琅玕樹) 라고]실렸다.[76]
서낭신(隨體 隨神)에 매달은 천 조각이 바람에 날리는 현상을 뜻한 글자가 돛 범(帆)자다. 범선으로 동남아 해안을 돌아 남방불교가 강남에 전래 되었다. 훈고학 (訓詁學)이라던 분야가 몇차래 번역이 바뀌고 여러 어음을 뒤섞어 기록한 불경을 풀이하기 에는 뜻이 불충분 했다. 석(釋)씨 기록을 풀(解)이 한다의 약자가 해석(解釋)이다. 각종 불교 경전과 삼국유사에도 많이 나오는 글자다. 스님이 배를 타고 먼 이역 땅으로 가는 장면이 불교 서화에 있다. 일연 스님이 불교에 관한 설명에는 선도성모 수희 불사 (仙桃聖母隨喜佛事)란 문구 에서와 같이 수(隨)자가 여러번 나온다.
고구려 왕자 발기가 공손도가 있던 요동에 갔다. 후에는 양자강 하류에 정착 했다.[77] 발기(拔奇)가 살던 성이라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 이라 했다.[78] 비미호의 후손 왜오왕이 다스렸던 삼한의 후손들이 범선을 이용 하여 동남아로 부터 남방불교를 한반도 남단에 드려 왔다. 옛부터 한반도 서남 지역에 있던 여러 부족 국가들이 가야를 나라 이름으로 바꾸었다. 불교에 입적한 법흥왕이후 신라는 뱃길로 중원의 강남을 지나 동남아로 이어지는 해상 교류가 활발 하여 동이 강국이 었던 백제를 제압하고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 했다. 풍월주, 화랑, 처룡가 등등 남방 영향이 나타났다.[79]
2 절: 진서에는;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동진 말기에 복건성 이남 지역에 나타났다. 서진말기 291년에 발성(拔城) 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국운이 쇠할 증조로 풀이 했다. 팔왕의 난(八王-亂)시작이다. 사마의(司馬懿, 179년 ~ 251년) 가 공손연을 토벌하고 비미호(倭)의 후손을 제상으로 임명 했던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 (拔城)이라 했다.[80] 당시 발성(拔城)은 강북에 있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x발성(x拔城,, 從拔城, 敦拔城)을 맡길 임자 임나(任那) 라고 했다. 공손도 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남아 살던 곳이란 뜻에서 진유 고씨 (陳留高氏) 라고 했다.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원지다. 박사 고흥이 백제 서기를 남겼다는 발해고씨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허수아비 사자상을 세우고 울릉도를 정벌 했다는 막힐 울(鬱)자 또한 남방불교에서 나온 글자다. 사다함(斯多含)이 앞서 들어 갔다는 전단양 (栴檀梁)이 대당서역기에 전단울금(栴檀鬱金)으로 실려 있다.[81]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에 관한 설화는 新羅가 만주에 있던 시절, 고구려에 인질로 갔던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세력 다툼에 왕자 복호와 미사를 두 나라에 인질로 보냈던 사건이다.[82]
3 절: 일본이란 이름: 통일 신라 이후에 나타난다. 구주에 있던 열도 백제 왜가 혼슈(本州)로 올라가서 일본이란 새 나라를 세우고 문무왕에게 알린 다음에 당 나라에 알렸다.[83] 구주땅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주관 했던 왜의 친입을 우려 했던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 그 후 기록에도 신라는 적대 적인 왜 그리고 우호적인 일본 두 나라와 교류가 있었다.
한해를 통치 하던 부여씨의 뒤를 이어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 ~ 846년) 가 나타났다. 사회가 혼란해서 그 가 처형된 이후 부터 신라는 사양길에 들어 간다. 그 혼란기에 불교의 성역 으로 피란을 갔다고 본다. 고려 초기 에도 해상 교류가 왕성하여 동남아지역 과 중동 문물이 들어 왔다.[84] 인도 동쪽 해안에서 쓰는 중기 타밀어에는 한국어 어휘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네팔어와 미앤마 언어는 한국어와 같은 어순의 교착어라 한다.
4 절: 항해의 필수 요소 나침판:
위진시대부터 천진당산 일대에 살던 삼한의 후예들이 중국 동해안을 따라 멀리 동남아로 진출 했다. 삼국지에는 풍력과 방향계가 쓰였다는 흔적이 보인다.[85] 동진시대 부터는 동남아 해로를 통하여 남방불교가 남조에 들어 왔다. 송서에는 범선으로 二三萬里를 항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86]
한국 재야 사학가 오재성(吳在成)은 서신라 (西新羅)의 특산물 편에, 당나라에 선물 했다는 자석 (磁石)을 근거로 나침판을 신라 사람이 개발 했다고 한다.[87] 당나라 황제가 당승법안(唐僧法安来傳天子命求磁石)을 보내 자석과 좋은 활 포궁(砲弩)만드는 방법을 구해오라는 요구를 했다. 이는 문무왕 시절이다. 그 이전 부터 신라에서는 (중원에 없는) 나침판을 사용 했다. 통전 지남차 (指南車) 편에 나침판의 유래를 설명했다.[88]
신빙성 있는 자새한 설명은 북위의 사관 최홍 (崔鴻, 478- 525)이 쓴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 실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의 제3대 황제 석호(石虎,재위:334년 – 349년)가 출처를 알수 없는 불교에 심취한 해비 (解飛: Xiè Fēi; fl. 334–349) 를 임용 했다.[89] 해비 (解飛)는 고구려와 부여의 성씨다. 그는 다재 다능한 쟁인이었다. 삼한의 후손들이 나침판을 개발하여 동진 (東晉, 317년 ~ 420년) 초기에 범선을 타고 중국 동남아 해안으로 진출 했다.
V 장: 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태고적에 백익의 후손들이 익주 즉 산서성 (益州)을 지나 운남에 흐터져 살았다. 그들이 매콩강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 왔다. 부여씨 왜왕의 후손 이 동남아 해안을 따라 천축국에 이르렀다. 원나라 쿠빌라이 가 지상의 낙원 으로 알려진 남조를 정벌 했다. 원세조4년(1263년)에 백제 양호(梁浩)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90] 고려도 사신을 무위지성 대도 (撫慰之城大都)에 보냈다. 원나라 또한 천축국 무우왕 無憂王 Ashoka 과 같이 도교에서 유래된 무위(無爲)의 동음이자를 사용 했다.
매콩강과 해안을 따라 내려온 두 지류가 만나 방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을 지나(支那)라고 했다.[91] 현장이 지상낙원 샹그릴라 (Shangri-La) 에 이른다 는 뜻에서 지나(至那)라 했던 글자를 당 현종이 정복을 못하고 읊은 시문 제범서 (題梵書)에 “支那”로 바꾸었다.[92] 황소의 난(黃巢之亂) 때에 최치원이 모시던 고병 (高騈, 821~887)이 운남성에 가서 지나 천자 (支那天子)가 되었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는 운남성을 포함한 광동 광서 장족 자치구 (廣西壯族) 넓은 지역을 지나 (支那)라 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은 발해 고씨(渤海髙氏) 찬녕(釋贊寧:919-1001 년)이 양자강 하류에서 해로를 따라 동남아를 돌아 남천축국에 다녀온 기록이다. 남천축국 사람들은 광부(廣府)를 지나(支那), 경도를 마가지나(摩訶支那) 라고 했다. 현장이 사자국왕으로 부터 경부 사람들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불경을 구해 갔다는 예기를 들었다. 사자국이라고 번역한 섬라국(暹羅國, Siam)은 태국이 었다.[93] 청조 말의 국종사로 알려진 장병린 또한 서양과 일본에서 풀이한 진단 지나 (震旦, 支那) 모두 진나라 어음(皆言秦)으로 “silk”란 뜻이 있다고 했다.[94] 대리국 고태(大理國主高泰)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태국이다. 태국 땅이 서양에 아려저서 Cina 의 어원이다. 진시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땅이 “China 中國” 의 어원이 되었다.
1 절: 화랑의 어원: 패르샤 왕자가 이스람교 발생시기에 피란을 갔다. 그곳은 풍요롭고 코끼리가 있었다. 동방은 폴투갈 사람들이 처음으로 도착 했다. 인도에 관해 깊히 연구했던 독일사람 맥스 뮬러( Friedrich Max Müller: 1823 – 1900)와 스코틀란드 선교사 제임스 래게(James Legge; 1815 – 1897)가 같이 “Sacred Books of the East series” 란 동방 기록서 를 출판 했다. 청나라 말기에 위원(魏源)은 이태리 선교사가 만든 만국지도 내용을 인용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만들었다. 태국을 섬라 (暹羅)라 했다.[95] 지나(支那)의 일부였던 씨암(Sayam)으로 알려 졌던 태국(泰國)이 꽃다운 공주 화랑 (花娘, 花郞, Farang)의 출원지다.
2 절: 가락국 허황후: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文宗,재위 : 1046년 ~ 1083년) 때에 김해 지주사로 있던 문인이 지었다.[96] 지역명에 신답평 (新畓坪) 이라 했다. 답(畓)자가 설문해자에는 없다. 남송시대 만든 자치통감에 답(畓) 자가 나온다.[97] 열하일기에 글자 설명이 있다.[98]
가락국이 있던 곳을 제 정리 하면서 만든 글자라 짐욕(朕欲)정치 경도 (定置京都)라 했다.[99] 신라 말기 경덕왕 (景德王,재위: 742년 ~ 765년)이 이름을 바꾸고 석도안 (釋道安; 312-385)을 기리는 뜻에 도안 현(道安縣) 이라는 이름을 그곳에 남겼다.
3 절: 임나(任那)는 훈역이요 가라(加羅)는 음역한 글자다:
가라란 어음의 여러 사음자는 모두 오호 십육국시대 남조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가야산(伽耶山)은 인도 동북부에 있는 영산(靈山)이라고 부르던 천애 (天涯) 의 요새(要塞)다.[100] 산정상에는 솔도파(率堵婆)라는 위쪽이 뾰족한 불교의 탑이다. 무위왕(無憂王)이 여러 곳에 석탑을 세웠다. 동진 시대에 2,000리 떠러진 사자국으로 부터 남방불교에서 쓰던 가라란 이름이 들어와 한반도 남쪽에 나타났다. 조계종 삼보사 의 하나인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다. 릿수를 고려하면 가야란 어음의 출원지는 스리랑카가 아니라 동남아 해안의 불교국가 였다. 그곳이 화랑과 처룡의 발원지 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우산국을 정벌하고 10년 후에 가야를 정벌 했다.[101] 동남아 특산물이 한반도에 이르렀다. 현지음이 잘못 번역되어 뜻이 다른 글자로 나타나기도 했다. 옥으로 만들었던 규를 상아라 만들고 사자 허수아비 를 만들어 우산국 을 정벌 했다. 말이 아닌 소를 사용하였다. 나이 십오륙세 였던 젊은 화랑 사다함 (斯多含) 먼저 전단량(旃檀梁), 즉 정문 량운 (梁云)으로 들어가 562년 에 가야加耶國을 함락 했다.[102] 평지에 해자 (垓字) 로 방어 했던 성이다. 강 하류 평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정벌 했다.
4 절: 가야금의 유래: 현악기는 태고적 부터 있었다. 발해만 연안에 철전을 사용 했고,금실의 어원이 되는 현악기 슬 (有瑟) 이 있었다.[103] 몽고와 남방 에 가야금과 비슷한 현악기가 있다. 원사 (元史) 에 백제(百濟)는 양호 (梁浩)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104] 사천성에 살던 사마상여 가 현악기로 부잣집 딸 탁문군(卓文君)을 유혹하여 성공 했다. 지나국 천자 고병 (高騈)이 통치 하던 남조 대리국을 몽고가 정벌 하여 남조의 현악기가 몽고에 전해졌다고 본다. 대리국 사람들은 매콩강을 따라 동남아로 내려 왔다. 그곳에서 사용 하던 현악기가 한반도에 들어와 가야금이 되었다.[105]
5 절: 남방과의 교류가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화랑의 오계는 원광 법사 (圓光法師)가 가르친 세속오계 에서 나타났다. 역(易) 일신오심(一身五心)이 어원이다.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네, 고구려 왕실의 후손 안승을 후고구려 왕으로 봉하여 장수왕이 빼았은 부여경의 한성(漢城)에 살도록 했다.[106] 오늘의 한반도에 있는 평양이 후 고구려의 수도 였다.
오대산 상원사 (上院寺) 고양이 석상은 천축국에서 성수로 쓰던 獅子상이 고양이 석상으로 만월을 뜻한 상원을 사찰 이름으로 사용 했다. 이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여기 저기에 흐터져 있던 글자를 모아 신라 임나 (任那) 가라(加羅)의 근원을 찾았다. 고조선 찾는 방법을 찾고 찾고 또 찾는다는 뜻에 절차적 삼단 논법(Series of Syllogism)이라 했다.[107] 고고학 에서 흐트러진 자료를 모아 분석한다. 자료분석 정리 방법과 일치 한다. 상형글자로 나타난 동북아시아 역사 연구는 문헌고고학(文獻 考古學, Literal Archeology)이라 부를 수도 있다.
VI 장: 맺음 말
백익을 잃은 고조선의 한 부족이 사천성을 지나 운남성 일대에서 황노 (黃老)사상 아래 평화롭게 살았다. 그 지역 도사(道士)들이 옛적부터 알려진 차마고도를 따라 히말리아 산맥 동쪽 수지(隨地)에 도교의 가름침을 전했다. 천부경을 전했다는 뜻에 인도(印度)라 했다. 그곳에 나타난 원시 불교가 같은 길을 따라 지나(支那)라고 알려진 방대한 지역에 전파 되었다. 부여씨 왜오왕이 다스리던 부족이 동남아로 내려가 운남성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같이 여러 불교 국가 를 이루었다.
동남아에 번창하던 남방불교가 광동성 해안에 전래 되여 해안을 따라 발해만 일대에 전래 되여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라 하던 이름이 신라 (新羅), 임나 가라 (任那加羅)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개토대왕 이후에 한반도 남쪽에 수도를 옮겼던 신라에도 남방불교가 전래 되여 신라를 부흥 시켰다. 향가 처룡가,풍월주와 화랑도가 이때에 나타났다. 동남아에 있던 신라 공주 화랑 (花郞, Farang)이 화랑도의 어원이다.[108]
남방불교의 세속오계를 근간으로 화랑오계를 보급하여 젊은 낭도의 가치관이 확립 되었다. 진흥왕 23년(537년) 에 나마신득(奈麻身得)이 신무기 포노(砲弩, cross bow)를 만들었다. 사다함 (斯多含)의 화랑도들이 가야국 (加耶國, 駕洛國) 정벌 했다.[109] 대가야 사람 우륵(于勒) 이 가야금 (伽倻琴) 을 만들어 신라에 음악이 넓리 보급되었다. 백제 사신이 불경을 얻으려 양나라에 갔던549년에 양자강 하류에 있던 수도 거발성 (居拔城) 이 점령 당했다. 그 지역에 남방불교가 성했다. 북방민 갈족 동위 (東魏) 장군 후경(侯景, ? ~ 552년)이 정벌했다. 비류의 후손이 강남으로 내려가 정착하여 夫餘씨가 나타난 곳이다. 같은 동위장군이었던 발해고씨 고양 (高洋)이 선양 받아 북쪽 업(鄴)에 수도를 정하여 북제(北齊, 550년 ~ 577년) 가 나타났다. 북제와 강남에 있던 진(陳)나라를 수나라가 병합하던 시절에 중원세력이 만든 큰 배가 백제 영역이 었던 대마도에 표류 되었다.
그후 수양제 양광(隋煬帝 楊廣, 569년? ~ 618년)이 유구를 발견하고 이어 구주에 도착 했다. 왕의 성이 환사씨(歡斯氏)는, 눈이 깊고 코가 큰 사람이 사람 (胡)과 비슷하고,새를 조각해 올려 놓은 장승이 있었다.
해양권을 장악했던 신라와 백제가 왜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 백제가 왜에 불경을 전했다. 백익의 후손 부여(夫餘) 씨가 세운 히고국(肥後国, 費侯國) 이 구주에 있었다. 동정대장군(大將軍)쇼군이 쓰던 긴 칼이 나타났다.[110] 수미산의 전설에 따라 만든 이름을 영산 (靈山)에 붙여 아소 (阿蘇)라 했다. 아사달의 전설을 뒤섞어 마든 이름이다. 웅상 이 소에서 사자를 거처 고양이로 나타난 선조의 영혼을 모시던 산이다.
왜왕이 603년에 사신과 함께 스님 10여명을 수양제에게 보네 불경을 배우도록 했다. 왜왕이 보낸 서한에[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몰처 천자 무양 (沒處天子無恙) 하는 문구]가 실려 수양제가 크게 화를 냈다.[111] 이 문구를 인용 하여 일본이란 글자가 수나라 때에 나타났다는 낭설이 나타났다.
일본이란 이름은 화랑도를 지냈던 김춘추가 백강 전투에서 백제를 구하러 온 왜를 물리치고 고구려 마저 흡수한 뒤에 나타났다. 왜가 혼슈 동쪽에서 두번째 혼(魂)이란 뜻의 니혼(日本; 二夲) 이란 새 나라를 세우고 670년에 신라, 그후 당나라에 알렸다. 구주에 사는 왜의 침입이 우려 되여 동해를 지키겠다 는 유언을 남겨 문무왕 무덤 대왕암 (大王岩) 이 동해에 있다.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년~501년)이 받은 금으로 된 옥새에 위노국왕 (委奴國王) 이란 글자가 구주 복강시(福岡市) 해안에서 나타 났다.[112] 노예 들이 사는 나라의 왕이라고 비하해서 만든 글자를 왜국왕인 이라고 풀이 한다. 백제에서 구주에 있던 총통에게 준 칠성검의 유사형 칠지도가 있다.
이와 같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나타난 기록을 살펴 보면 진수가 비류의 후손(媧, 可汗, 韓)을 왜 (倭) 로 기록 하여 부여씨가 왜오왕이란 칭호로 나타났다. 그들이 동남아에 진출 하여 남방불교를 전래 했던 사실을 옳바로 인식 하지 못하여 여러 잘못이 나타났다. 이를 열도 사람들이 아전 인수격 으로 풀이 하여 임나가야 일본부 (任那加羅日本府)라는 낭설이 나타났다.
끝
Submitted to 환단고기 학술대회 에 기고 December 14th, 2021 supplemented January 5th,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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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宋書: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太元(376-396年)是東晉皇帝晉孝武帝司馬曜的年號.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弁辰傳: 倭 有瑟,其形似筑
[2]. 史記 平準書: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通典 新羅: [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
[3]. 三國 史記: 新羅本紀第一: 「朕以不德,有此國家。西鄰 百濟,南接加耶. 加耶賊圍馬頭城。閱兵於閼川,謂金官國首露王年老多智識,召問之。首露立議,以所爭之地屬音汁伐國。
[4].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5]. 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 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 P 150
[6]. 三國遺事: 駕洛國記.迦葉原 阿蘭弗. 신라의 수도 이전: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7]. 晉書: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8]. 漢傳佛教與東方文化.任繼愈. 中華佛學學報第12期 (1999.7月出版 ).中華佛學研究所發行.
[9]. 三國史記 儉攻陷丸都城,屠之。乃遣將軍王●,追王。王奔南沮南沃沮,至于竹嶺,軍士分散殆盡,唯東部密友獨在側,謂王曰. 王分軍為三道,急擊之,魏軍擾亂不能陳,遂自樂浪而退
[10]. 通典 新羅: 初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自通使聘。
[11]. 三國史記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新羅遣使結和。秋九月,王薨。葬於柴原,號曰東川王
[12]. 三國志夫餘傳:男女皆純白,婦人著布靣衣,去環珮,大體與中國相彷彿也。三國志吳書四
笮融者,丹楊人笮融者,丹楊人.乃大起浮圖祠,以銅為人,黃金塗身,悉課讀佛經,每浴佛.
[13]. 大唐西域記: 遂師珊闍耶焉。舍利子遇馬勝阿羅漢聞法悟聖. 三國志 毌丘儉:昔隨袁尚奔遼東者,率衆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 藝文類聚 內典:《宋元嘉起居注》曰:阿羅單國王毗沙跋摩,遣使云,諸佛世尊. 通典 天竺:遂俘阿羅那順以還。晉、宋時浮圖經云:「臨倪國,其王生浮圖太子也,父曰屑頭耶,母曰莫耶
[14].三國遺事: 疏之遠矣遼東城育王塔三寶感通錄載。高麗遼東城傍塔者。古老傳云。至此城見五色雲覆地.
上有梵書。侍臣識之云是佛塔。王委曲問詰。答曰。漢國有之。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祭天金人因生信。
[15].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 二十六年。年荒民飢。遣衛頭入苻秦貢方物。苻堅問衛頭曰:「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何耶?」荅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今焉得同?
[16].三國遺事: 流王即位甲申東晉孝武帝大元九年。胡僧摩羅難陀至自晉。迎置宮中禮敬。明年乙酉。創佛寺於新都漢山州. 三國史記: 近肖古王 移都漢山. 近仇首王之元子,母曰阿●夫人,繼父卽位。秋七月,遣使入晉朝貢。九月,胡僧摩羅難●自晉至,王迎之,致宮內,禮敬焉。佛法始於此
[17]. 三國志 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 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
[18]. 晉書: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簡文帝作相 . 元帝作相,引為參軍。及帝為晉王
[19]. 三國史記: 故國原王: 修葺瓦都城丸都城,又築國內城。秋八月,移居丸都城。燕王●遷都龍城
燕王●乃還其父尸,猶留其母為質。移居平壤東黃城。遣使如晉朝貢。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
[20]. 三國史記: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為多勿都,封松讓為主。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
[21]. The Imna Gara(任那加羅) engraved in the Stele was in the Chin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2]. 說文解字 而部:而:頰毛也。象毛之形。《周禮》曰:「作其鱗之而。」凡而之屬皆从而. 今俗別作髵,非是. 《集韻》奴登切,音能. 《釋文》鄭讀而曰能,能猶安也。다음사전: 而 말 이을 이, 편안할 능, 능히 능
[23]. 三國史記 廣開土王,諱談德,故國壤王之子。生而雄偉,有倜●之志。故國壤王三年,立為太子。九八年,王薨,太子卽位。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冬十月,攻陷百濟關彌城。其城四面●絶,海水環繞,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24].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대륙백제 중시조 고환 (高歡)의 혈통- 2: 陳留高氏:
[25].三國遺事: 訥祇王之女妃迎帝夫人儉攬代漢只登許作角乾之女庚辰立理十四年和帝中興辛巳已上為上古已下為中古第二十五虎寧王名斯摩即東城第二子
[26].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 奈勿尼師今 十八年,百濟禿山城主,率人三百來投,王納之,分居六部。 :「兩國和好,約為兄弟。今大王納我逃民,甚乖和親之意,非所望於大王也,請還之。」答曰:新羅本紀第四: 智證麻立干立。或云智度路,又云智哲老。奈勿王之曾孫,王薨,謚曰智證。新羅謚法始於此. 法興王立。諱原宗,《冊府元龜》姓募,名泰。智證王元子.
[27].三國史記:「大王之國,四方皆山丘河海,是天設之險,非人為之形也. 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28].南齊書:「大王之國,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 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 P 150
[29].三國遺事: 訥祇王之女妃迎帝夫人儉攬代漢只登許作角乾之女庚辰立理十四年和帝中興辛巳已上為上古已下為中古第二十五虎寧王名斯摩即東城第二子
[30]. 三國遺事:因名龍嵒又郡中有三山。曰日山吳山浮山。國家全盛之時。各有神人居其上。飛相往來。朝夕不絕又泗泚崖又有一石。可坐十餘人。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
[31].三國史記: 東城王,諱牟大或作摩牟摩帝。文周王弟昆支之子.靺鞨襲破漢山城,虜三百餘戶以歸
角乾之女庚辰立理十四年和帝中興辛巳已上為上古已下為中古第二十五虎寧王名斯摩即東城第二子
炤知一云毗處。麻立干立,慈悲王長子:十五年春三月,百濟王牟大遣使請婚,王以伊伐飡比智女送之。將軍實竹等與高勾麗戰薩水之原,不克,退保犬牙城。高勾麗兵圍之,百濟王牟大遣兵三千救觧圍。
[32]. 梁書: 東明之後有仇台,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簷魯,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有二十二簷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其人形長,衣服凈潔。其國近倭。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中大通六年、大同七年,累遣使獻方物;太清三年,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33]. 廣韻 魚:餘: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34].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 奈勿尼師今 十八年,百濟禿山城主,率人三百來投,王納之,分居六部。 :「兩國和好,約為兄弟。今大王納我逃民,甚乖和親之意,非所望於大王也,請還之。」答曰:「民者無常心,故思則來,●則去,固其所也。大王不患民之不安,而責寡人,何其甚乎?」百濟聞之,不復言。
[35].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36].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7]. 大越史記全書序: 安南與暹羅,地相近也,風土相似也. 我日本嘗同文軌者,為支那、為朝鮮、為安南。支那、朝鮮於我有舊好;而安南古或有我船舶至其國者,蓋西邊商估以財貨往來耳
[38]. 廣韻 髙: 臯:髙也,局也,澤也,詩云鶴鳴九皐言九折澤也,又姓皐陶之後左傳有越大夫皐如.
[39]. 大唐西域記 卷第一: 東至小川澤。泉池澄鏡林樹青蔥。有僧伽藍. 商諾迦縛娑舊曰商那和修訛也大阿羅漢所持鐵缽量可八九升。及阿羅漢於中漱口嚼楊枝. 越黑嶺入北印度境至濫波國北印度境.
水經注 河水:《法顯傳》曰:恒水東南流,逕僧迦施國南,佛自忉利天東下三道寶階,為母說法處。寶階既没,阿育王于寶階處作塔,後作石柱,柱上作師子像,外道少信,師子為吼, 通典: 師子威服百獸
[40]. 大唐西域記:皇帝遣中使太監鄭和。奉香華往詣彼國供養。鄭和勸國王阿烈苦柰兒。敬崇佛教遠離外道。北拘盧洲舊曰。鬱單越. 林樹鬱茂泉流交境。聖賢之所遊止靈仙之所集往
[41].高明道本名弗里德里希·格羅曼(Friedrich Grohmann) 也談一下「浮屠經」에 불교전래를 설명。
[42]. 大唐西域記: 則可無大過矣。始可與言譯也。李老曰。美言者則不信。信言者則不美。韓子曰。理正者直其言。言飾者昧其理。是知垂訓範。物義本玄同。庶袪蒙滯。
[43]. User dictionary: Tagara,多伽羅之略,香木名. 伽羅陀 :菩薩之位名。譯曰度邊地. 入伽羅陀者,此云度邊地也. 太平御覽 獅子:獅子國,東晉時通焉,天竺旁國也.宋文帝元嘉五年,其王剎利摩訶南遣使貢獻。梁武帝大通元年,后王迦葉伽羅訶犁耶亦使使貢獻
[44] 大唐西域記: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又名曰寶渚。昔釋迦牟尼佛化身名僧伽羅이러한 글자속에 역사적 사실이 있다.
[45]. 大唐西域記: 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 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異政殊制隨地別敘. 。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
[46].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family-names-of-xian-bei-tribes/
[47]. 史記大宛列傳: 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問曰:『安得此?』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其人民乘象以戰。其國臨大水焉。』
[48].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단군왕검이 실존 인물이다: 백충장군 현령비 ,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百蟲將軍顯靈碑)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49]. https://ctext.org/zh 𣬛:《字彙》蘇甘切,音三。《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又村名。行唐西有𣬛趙村.
[50]. 宋高僧傳 :玄奘也立五種不翻。謂譯字譯音為一例。胡語梵言為一例。重譯直譯為一例 一譯字不譯音。即陀羅尼是。二譯音不譯字。如佛胸前卍字是。三音字俱譯. 其書豎讀。 同震旦歟。 至吐貨羅言音漸異 度蔥嶺南迦畢試國. 十:數之具也。一為東西,丨為南北,則四方中央備矣
[51]. 大唐西域記 :城西南五六里至伽耶山。溪谷杳冥峰巖危險。印度國俗稱曰靈山。自昔君王馭宇承統。謂舍利子舊曰舍利子。訛略也沒特伽羅子舊曰目干連訛也 。高百餘尺。無憂王之所建也
[52]. user dictionary: 阿育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
[53]. 大唐西域記: 末田底迦舊曰末田地訛略也阿羅漢之所造也。羅漢以神通力攜引匠人.升睹史多天舊曰兜率他也。又曰兜術他。訛也親觀妙相。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
[54]. 大唐西域記: 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飛英天竺。文傳貝葉。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蘇迷盧山唐言妙高山。
[55]. 大唐西域記: 從烏鐸迦漢荼城北踰山涉川。行六百餘里至烏仗那國。唐言苑。昔輪王之苑囿也。舊云烏場。或曰烏茶皆訛北印度境遂
[56]. 宋高僧傳 : 唐越州大禹寺神迥傳。圖書之法作程。禹受斯符乃為經緯。新書 胎教: 昔禹以夏王,而桀以夏亡. 三國志 郭淮: 帝正色責之曰:「昔禹會諸侯於塗山,防風後至,便行大戮。」
[57]. 大唐西域記: 此藥叉神變現異形。或作師子。或作蟒蛇猛獸毒蟲。殊形震怒。以故無人敢得攻發。幼日王踞師子床群官周衛.。無憂王所建。色紺光潤質堅密理。上作師子蹲踞向階羅
[58]. 大唐西域記: 為一佛之化攝也。今一日月所照臨。諸佛世尊皆此垂化。現生現滅導聖導凡。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又曰須彌婁皆訛略也四寶合成。據金輪上。日月之所照迴。
[59].三國史記: 遣沙飡須彌山封安勝為高勾麗王。其冊曰. 開地千里,年將八百。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䓁,就披策命公為高勾麗王。公宜撫集遺民見高勾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迎致漢城中
[60].三國遺事: 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忌慎百事。不敢動作。以十五日為烏忌之日中
[61]. 大唐西域記:每歲至如來大神變月滿之日出示眾即印度十二月三十日當此正月十五日也此時也或放光或雨花。僧徒減千人. 習學大乘上座部法。律儀清肅戒行貞明。昔者南海僧伽羅國。其王淳信佛法發自天然。有族弟出家想佛聖迹。遠遊印度寓諸伽藍。於是返迹本國。王躬遠迎。
[62].https://ctext.org/zh阿修羅: Asura,又作阿須羅。舊稱阿修羅,阿須倫,阿蘇羅,阿素羅。譯曰無端,容貌醜陋之義。又曰無酒,其果報無酒之義。新稱阿素洛。譯曰非天。其果報勝似天而非天之義。為常與帝釋戰鬥之神。六道之一八部眾之一。名義集二曰:「阿修羅,舊翻無端正。
[63]. 山海經 海外北經: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其血腥,不可以樹五穀種。在崑崙之北,柔利之東。相柳者,九首人面,蛇身而青。不敢北射,畏共工之臺。臺在其東,臺四方,隅有一蛇,虎色,首衝南方. 山海經大荒北經: 共工臣名曰相繇,九首蛇身,自環,食于九土。禹湮洪水,殺相繇,其血腥臭,不可生穀,其地多水,不可居也。禹湮之,三仞三沮,乃以為池,群帝是因以為臺。在崑崙之北。
[64]. 說文解字 序:: 二曰象形。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三曰形聲。
詩經大雅 民勞:惠此中國、以綏四方。無縱詭隨、以謹無良。民亦勞止、汔可小休。惠此中國、以為民逑 。 無縱詭隨、以謹惛怓. 惠此京師、以綏四國 。無縱詭隨、以謹罔極。
[65]. 隨 따를 수, 게으를 타1 따르다2. 거느리다3. 몸에 지니다4. 따라서. Follow, listen to, submit; to accompany; subsequently, then. 墮 떨어질 타, 무너뜨릴 휴1. 떨어지다2. 무너지다3. 깨뜨리다
[66]. 通典 古梁州下: 益昌古劍閣道,秦使司馬錯伐蜀所由,謂之石牛道。康熙字典一部:《蜀記》秦惠王欲伐蜀,造石牛,置金其後. 太平廣記 李冰:雖甚秋潦,亦不移適。有石牛,在廟庭下。
[67].大唐西域記:山經莫之紀。王會所不書。博望鑿空。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 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68]. 後漢書 :設華蓋以祠浮圖、老子,斯將所謂「聽於神」乎!及誅梁冀,奮威怒,天下猶企其休息
[69]. 大唐西域記 序: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出高昌故地。自近者始。曰阿耆尼國舊曰烏耆. 舊唐書:《牟子》二卷牟融撰. 牟子 漢桓帝時蒼梧太守牟融著書號牟子,推美釋氏。見釋門正統四
[70]. 大唐西域記: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71]. 宋高僧傳:釋智慧者.北天竺迦畢試國人.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釋極量。中印度人也。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大唐西域記:大唐國來請求佛法.王曰。嘗聞摩訶至那國有.
[72].: 十六國春秋:法明罽賓人少而好學為弗若多羅所知及長氣幹髙爽神識明悟與眾不群博覽經典潛思八禪遊心七覺時人方之浮頭婆馱孤行山澤不避虎兕晉隆安中至廣州住白沙寺善誦毗婆沙律咸稱為大毗婆沙時年已八十五徒眾八十五人晉故丹陽
[73]. 三國遺事: 生義寺石彌勒 興輪寺壁畫普 彌勒仙花 未尸郎 真慈師. 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74]. 三國志 韓傳: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女王國東渡海千餘里 去女王四千餘里。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 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
[75]. 字書 釋名:釋船: 帆,泛也,隨風張幔曰帆,使舟疾汎汎然也.帆:〔古文〕𩗋《廣韻》音凡。《集韻》舟上幔以帆風。音梵。《廣韻》船使風。《釋名》帆,汎也。:船使風也。《玉篇》與𦨲同。亦作颿𩗋:《玉篇》古文帆字。塞外有烏桓山。一作烏𠁽。《魏志·烏丸傳》太祖引烏𠁽之衆,服從征討,而邊民得用安息。又通作垸 樹木
[76]. 山海經:先以六書。服常樹,其上有三頭人,伺琅玕樹. 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 詘:詰詘也。一曰屈襞。从言出聲. 詰:問也。从言吉聲. 詩經民勞: 無縱詭隨.
[77]. 三國志 策傳:吳錄曰:時有高岱者.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金樓子 雜記上: 魏操誅文舉,孫策誅高岱,晉相誅嵇康. 백제 수도 거발성(居拔城)은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78].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79].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80].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冊府元龜:開拔奇之津使天下馳騁而起矣. 高岱字孔文受性聰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無名氏皆世之英偉也.
[81]. 大唐西域記: 金銀銅鐵每加摩瑩。饌食既訖嚼楊枝而為凈。澡漱未終無相執觸。每有溲溺必事澡灌。身塗諸香。所謂栴檀鬱金也。君王將浴。鼓奏絃歌祭祀拜祠沐浴盥洗。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美文德之盛。鬱為稱首。北拘盧洲舊曰。鬱單越。鳩樓。訛也金輪王乃化被四天下.
[82]. 三國史記:親謁始祖廟。王弟卜好自高勾麗與堤上奈麻還來。秋,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83].Mosol,Don S.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東北亞 古代史 新論, 2018. Birth of Nihon KoKu. p. 129.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revealed. second edition. p. 230. Etymology.
[84]. 高麗史. . 高麗史節要. 高麗圖經.
[85]. 三國志倭人傳: 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女王國東渡海千餘里. 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86].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南夷、西南夷,大抵在交州之南及西南,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87].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 文武王立。以信惠法師為政官大書省。唐僧法安来傳天子命求磁石. 遣祇珍山級飡䓁入唐獻磁石二箱. 唐使到傳詔,與弩師仇珍川沙飡廻。命造木弩,放箭三十步。帝問曰:「聞在爾國造弩射一千步,今纔三十步,何也?」對曰:「材不良也,若取材本國,則可以作之。」.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吳在成 著. 한민족 문하사. 1986.
[88]. 通典 指南車: 魏明帝青龍中,令博士馬鈞紹而作焉。車上有木仙人,舉手恒指南。車箱迴轉,所指微差。晉亂復亡 東晉義熙十三年,劉裕平長安,始得此車,復修之。一名司南車。駕駟其下,制如樓,三級,四角金龍銜羽葆。刻木為仙人,衣羽衣,立車上,車雖迴運,而手恒指南
[89]. 十六國春秋 卷二十二後趙錄十二: 解飛,不知何許人。機巧若神,妙思竒發。虎至性好佛,眾巧奢麗,不可勝紀。飛嘗為虎作檀車,廣丈餘,四輪作金佛像,坐於車上,九龍吐水灌之。又作一木道人恒,以手摩佛心腹之間。又十餘木道人,長二尺餘,皆被袈裟繞佛,行當彿前,輒揖禮佛。又以手撮香投爐中,與人無異。車行,則木人行龍吐水,車止則止。又有指南車及司理車 https://bf.wiki2.wiki/wiki/Xie_Fei_(inventor)
[90].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四年春正月.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辛亥,封安肅公張柔為蔡國公,以趙璧為樞密副使。癸丑,敕封昔木土山為武定山,其神曰武定公;泉為靈淵,其神曰靈淵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城大都。帝撫慰之曰. 무우왕 無憂王 Ashoka Origin of Tibetan Buddhism « Lee Mosol’s Book Collection 。
[91]. 海國圖志 “支那”: 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西北五十裏,有支那西寺,古漢寺也。西北百裏至花氏城,肓王故都也。
[92]. 宋高僧傳: 本中印度人也. 敕廣州節度使李復修鼓鑄畢.一云梵夾本是南天竺烏荼國王書獻支那天子。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展轉游化漸達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93]. 大越史記全書序: 安南與暹羅,地相近也,風土相似也,疆域、人口相若也. 我日本嘗同文軌者,為支那、為朝鮮、為安南。支那、朝鮮於我有舊好;而安南古或有我船舶至其國者.
[94]. 訄書:遠藤隆吉曰:「孔子之出於支那,實支那之禍本也. 支那以蠶絲名,世謂震旦,支那, 譯皆言秦。
[95].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96]. 三國史記 : 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捴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捴管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97]. 資治通鑑: 曰:「臣已肅清宮禁,祗謁寂園,鍾畓不移,畓,其呂翻
[98]. 熱河日記「所謂畓洞 以其長時沮洳 故我人所名云 畓本無字 我東吏簿水田二字合書作會意 借音沓
[99]. 三國遺事: 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100]. 大唐西域記: 東至小川澤。泉池澄鏡林樹青蔥。有僧伽藍. 商諾迦縛娑舊曰商那和修訛也大阿羅漢所持鐵缽量可八九升。及阿羅漢於中漱口嚼楊枝. 越黑嶺入北印度境至濫波國北印度境.
[101].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眞興王 十三年,于山國歸服,或名欎陵島。乃多造木偶師子,分載戰船,抵其國海岸,誑告曰:「汝若不服,則放此猛獸踏殺之。」二十三年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栴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為。
[102].三國史記: 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斯多含年十五六,請從軍,王以幼少不許,其請勤而志●確,遂命為貴幢裨將,其徒從之者亦衆。及抵其國界,請於元帥,領麾下兵,先入●檀梁●檀梁,城門名。加羅語謂門為梁云。其國人,不意兵猝至,驚動不能禦,大兵乘之
[103]. 三國志 弁辰傳: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飲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
[104].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 元史 地理四: 昆陽州,下。在滇池南,僰、獹雜夷所居,有城曰巨橋,今為州治。閣羅鳳叛唐,令曲旂蠻居之。段氏興,隸善闡. 今夷中名其地曰羅伽甸
[105]. 大唐西域記 卷第一: 東至小川澤。泉池澄鏡林樹青蔥。有僧伽藍. 商諾迦縛娑舊曰商那和修訛也大阿羅漢所持鐵缽量可八九升.及阿羅漢於中漱口嚼楊枝. 越黑嶺入北印度境至濫波國北印度境.
[106]. 三國史記: 陷王所都漢城,殺其王扶餘慶,迎致漢城中.遣沙飡須彌山封安勝為高勾麗王。新羅王致命高勾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威風振於青丘,仁教被於玄菟。本支不絶 ,年將八百。至於津
[107]. 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08].ancienthistoryofkorea.com/history-of-the-silla-capital-慶州-in-korean-peninsula/
[109].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110]. 竹書紀年 帝啟:帝即位于夏邑. 二年,費侯伯益出就國。王帥師伐有扈,大戰于甘六年,伯益薨. 八年,帝使孟涂如巴涖訟. 韓詩外傳: 是故甚愛必大費,多藏必厚亡. 史記 秦本紀:秦之先,帝顓頊之苗裔孫曰女修.禹受曰:「非予能成,亦大費為輔。」 옛 일본어에 고조선어가 남아 있다.
[111].隋書: 倭國.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隋大業三年,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112]. 의문의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란 문구: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견우와 직녀,.칠성 신앙. 북두 고리. 썰매, 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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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가라(任那加羅)의 새로운 고찰
Abstract: The Book of Song (宋書) has the same name of characters 任那加羅 as seen in the Gwanggaeto Stele erected in 414 by his son Jangsu. Silla, Imna Gaya, and all other small town-states around the western shore of Balhae Bay were chased out during the era of those two kings. Old name of Silla known as Sulla(薛羅) was in the region along with Baekjae and Hyu-in(休忍) in the Book of Jin before the King the Gwanggaeto. The same character of Gaya (任那加良) appears in the era of Unified Silla period as the home town of Gang-su’s(強首, ? ~ 692) ancestors.
Souther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part of China and spread up to the Balhae Bay region during the early stage of Jin (東晉; 317-420)dynasty, replaced the Buddhism from the west, assimilated with the folk religion, made new names and left a branch of new Buddhism worshipping the Maitreyan(彌勒信仰) that is popular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Their idol is the King A-Yuk(阿育王:Aśoka, Ashoka) that is a phonetic variant of Old Joseon word. It drives from the essence of Taoism Emptiness (無爲) that had been introduced to the Himalayan region through the Ancient Tea Horse Route, 차마고도 茶馬古道) that is written as the Elder taught the Hu.
Souther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part of China and crossed over the Sea of Hahn around 479. The King Beopheung (法興王:r. 514–540 AD) sent delegates to the Su dynasty first time, adapted Southern Buddhism. Book of Su has that Silla Imna Baekjae and all other together made the Wei strong. Imna Gaya and Sill made Japanese culture from the beginning, to the other way around Gaya.
개설:같은 글자가 송서(宋書)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1] 같은 이름을 양서에는 사람인자 변에 가라(伽羅)라 했고, 원나라에 멸망된 송사(宋史) 에는 가라(伽羅)가 서하 지역에 나타났다. 장수왕이 백제개루왕이 있던 한성을 점령한 이후 백제와 가락국이 479년에 처음으로 한해의 남쪽 항로를 개통 했다.[2] 그를 따라 가야란 이름이 한반도 남단에 나타났다. 진서와 십육국 춘추에 백제와 같이 나오는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 임나 가라 (任那加羅)의 다른 이름이다.[3]
논의: 문헌을 고찰해 보면; 임나 가라 (任那加羅) 문구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임나(任那)란 글자는 변함이 없다. 허나 가라(加羅) 와 신라는 여러 글자로 표기 했다. 임나는 훈역이요, 가라와 신라는 뜻과 음을 이리저리 휘돌려 기록한 결과다. 중국 문헌에는 남북조시대 (南北朝時代, 420년 ~ 589년) 왜왕이 통치 했다는 여러 나라중 하나로 나타난다. 한국문헌에는 통일 신라 이후 “강수 (強首, ? ~ 692)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했고, 신라고기 에도 문장은 강수다.” 삼국 사기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같은 글자가 없다.
우부평 오환 선우 구루돈 (烏丸單于寇婁敦) 의 동생 아라반(弟阿羅槃) 이 삼국지 공손연(公孫淵, ? ~ 238년) 토벌작전에 있다.[4] 진서(晉書)에 선비추장 아라다 (鮮卑阿羅多) 란 이름이 있다. 이들은 언어 풍속이 마한 사람들과 같고 전투하는 방법도 마한과 비슷하다. 아라(阿羅)는 범어로 아라마(阿羅摩, 香木 Ārāma; aroma)의 략칭이라 했다.[5] 아라를 형용사로 여러 뜻을 지닌 여러 이름을 만들었다. 전진 부견 (秦 苻堅: 357년 ~ 385년) 이후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391년- 413년)이 대륙백제를 정벌 하던 시대에 남방 불교가 발해만 연안에 전래 되었다. 공손연은 중국 삼국 시대 요동의 세력가로 자는 문의(文懿)이며 유주 요동군이 양평 (襄平)에 웅거 할 때, 동오의 손권이 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교류를 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이름이 변했다. 휴인(休忍)이 임나 가라 (任那加羅)다
발해만 연안에 불교가 전래: 후한 초에 낙양에 들어온 서역 불교가 고조선땅 호타하가 흐르는 예맥족 영역, 즉 해하 일대 맥국에도 알려 졌다. 초기에 불교를 전한 스님들은 모두 서역 사람들이다. 서역승(西域僧) 부도징(佛圖澄,浮圖澄, 232년~348년)이 도안(道安) 법화(法和)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하북에 불교를 전파 했다. 요동성 육왕탑(遼東城育王塔) 설명에 나오는 대향화국(大香華國)이 아라(阿羅, Aroma)를 뜻했다.[6] 이 지역에서 신라가 나타났다. 신라의 도솔가는 천신이 보낸 사신이 내려와 즐거운 새상을 맞았다는 뜻으로 홍산문하권에 나타난 제천 (祭天)의식이다. 이 노래를 추석 또는 다른 경축일에도 부르던 향가다. 도솔가(兜率歌)에 나오는 미륵 (彌勒)이 사랑간수(伺琅玕樹,totem pole) 수신이다. 발해 연안 천진만 일대가 미륵신앙의 시워지다.
서역 스님 부도등(佛圖澄;232-348년)의 제자가 된 사람이 도안 (道安, 俗姓衛, 312-385 년) 이다. 전진 부견(秦 苻堅, 337년 ~ 385년,재위 : 357년 ~ 385년) 과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자라 부진 도안(苻秦道安; 常山扶柳, 河北正定人)이라 했다.
진서에는 서진 회황제(西晉 懷皇帝 284년 ~ 313년)가 그를 하늘 나라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도솔 (兜率)의 지도자라 하여 미천석도안 (彌天釋 道安)이라 했다. 그가 불경 번역에 중요한 역활을 했다. 그가 자라던 시절의 고조선 영역 태행산에 (太行恒山創立寺塔) 사탑을 짖고 수도승이 되었다. 후한말 위진시대 혼란기에는 왕공귀족 (王公貴族) 지도층이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고조선 지역에 쓰이던 언어 풍속이 불경에 반영 되여 미륵 도솔(彌勒, 兜率)이란 명칭이 실렸다.
부도징이 이르기를 임치성 내에는 옛 아육왕 탑 (臨淄城內有古阿育王塔) 이 있었다고 했다.[7] 서진 시대에 벌써 서역 불교가 산동성 중부에 전래 되었다. 동진 후반기에 요동에 남방불교가 들어와 고구려에 전해젔다.[8]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전의 비문에는 미천왕 시절에 벌써 불교를 믿었다. 광개토대왕 시절에 발해만 연안 대륙백제를 이루었던 부여 후손들이 양쪽 해안을 따라 이주 했다.
한반도 남쪽에 있던 가야(伽耶)와 글자가 같은 가야가 현장법사가 남긴 大唐西域記와 삼국유사에 있다. 가야산(伽耶山)은 인도 동북부에 있는 영산(靈山)이라고 부르던 천애(天涯)의 요새(要塞)다. 요동(遼東)등 삼국유사 여러 곳에 나오는 아육 (阿育)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 (無爲)가 와전되여 아육 (唐言無憂舊曰阿育)이라 했다. 또한 남조 역사서 양서에 고조가 아육왕사탑“高祖改造阿育王寺塔” 을 개조 했고, 또”高祖欣然謂佐吏曰:「吾無憂矣。」”, 즉 고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위다 란 문구가 있다. 남조 사서 여러 곳에 도 “阿育”이 실렸다. 강희자전에는 “阿育:Aśoka,舊稱阿恕伽。 新稱阿輸迦。 譯曰無憂” 라 했다. 청나라 말기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에도 있다. 강희자전
에는 “阿恕伽: 阿舒迦”는 왕 이름이다 이를 진어무우(晉言無憂) 라 했다.[9] 양서에는 “無爲” 와 “無憂”가 모두 실렸다. 설명도 했다. 진어란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언어란 뜻이다. 무위다어“無為多言,吾得之矣”란 문구, [무위는 북방어로 나는 깨달(悟得)은 사람이다] 라는 [산서성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개적(蓋狄)어], 즉 탈탈어, 퉁구스어다.[10]
한반도 남쪽에 있던 가야(伽耶)와 글자가 같은 가야가 현장법사가 남긴 大唐西域記와 삼국유사에 있다.[11] 가야산(伽耶山)은 인도 동북부에 있는 영산(靈山)이라고 부르던 천애(天涯)의 요새(要塞)다.[12] 요동(遼東)등 삼국유사 여러 곳에 나오는 아육 (阿育)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 (無爲)가 와전되여 아육 (唐言無憂舊曰阿育)이라 했다. 또한 남조 역사서 양서에 “高祖改造阿育王寺塔”란 문구가 있다. 남조사서 여러 곳에 도 실렸다. 강희자전에는 “阿育:Aśoka,舊稱阿恕伽。 新稱阿輸迦。譯曰無憂” 라 했다. 청나라 말기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에도 있다.[13] 아육왕사 탑(阿育王寺塔)이란 도교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상징하는 조형 물로 만들었다.
가라는 범어로 향목을 뜻한 다가라(多伽羅, Tagara)의 약자라 한다.[14] 여러 글자로 기록에 나타난다. 양서에는 왜왕이 다스렸다는 삼한의 후예들이 세운 6국 중에 가라 (伽羅) 가 진한 신라와 같이 나온다. 같은 글자 임나(任那)와 가라(加羅) 가 삼국사기에는실렸다.
남조와 통일신라와의 해상교류. 한반에서 강남에 니르는 수로를 479년에 가락국 하지와 백제 사절단이 개통 했다. 후에 신라는 564년에 진흥왕이,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냈다. 중원 세력은 수나라가 남쪽에 있던 진나라를 점령할 때에 전함이 백제 영역이 었던 대마도에 전함이 표류 했다. 그후 때에 처음으로 삼한 사람들이 개척한 한해 남쪽 수로를 통해서 일본 구주에 이르렀다. 신라가 성장한 과정과 가라를 흡수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백제 모두다 왜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新羅, 百濟皆以倭為大國) 이라고 했다.[15] 신라가 흡수 했던 하지왕의 가라연맹체와 같이 일본을 키웠다는 예기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대당 투쟁을 하는 동안 중원을 통치 했던 당나라는 남쪽 세력과 견원지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남아에서는 한반도 남쪽과 활발한 교류가 이우어 졌다. 통일신라시대의 황금기 였다. 그 황금기가 장보고 세력을 제거 하여 사양길에 들어 섰다.
결론: 동남아에 번창하던 남방불교가 광개토대왕 이후에 한반도 남쪽에 전래되여 신라를 부흥 시켰다. 향가 처룡가,풍월주와 화랑도가 이때에 나타났다. 진흥왕(眞興王,재위: 540년 ~ 576년) 때에 가라(加羅)를 멸 하고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대가야 사람인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 동남아에 진출 했던 신라에 패르샤 왕자가 피란을 왔다가 공주 화랑 (花郞Farang) 를 만나 결혼 했다. 통일 신라 황금기에 신라공주 화랑이란 글자가 신라에 처음 나타났다.[16] 불교에 입적 했다. 가라(加羅)를 가야(加耶) 라고도 한다. 양서를 참작 하라고 했다.[17]
4년 전에 올린 “가야 시말 소고(始末少考)”의 후속편 이다.
끝. November 5th , 2021
[1]. 宋書: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太元(376-396年)是東晉皇帝晉孝武帝司馬曜的年號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2]. 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 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 P 150
[3]. 晉書: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4]. 三國志 魏書二十八 毌丘儉: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昔隨袁尚奔遼東者,率衆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封其渠率二十餘人為侯、王,賜輿馬繒綵各有差。公孫淵逆與儉戰.
[5]. https://ctext.org/zh: 阿羅: Arama,阿羅摩之略稱。車師後部阿羅多、卑君相與爭國,興兵作亂
[6]. 三國遺事 卷第三 遼東: 晉孝武大元年末。齎經律數十部。往遼東宣化。現授三乘立以歸戒。蓋高麗聞道之始也. 疏之遠矣遼東城育王塔三寶感通錄載。高麗遼東城傍塔者。古老傳云。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高句麗. 像成在真平之世者謬也。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7]. 太平廣記 異僧一: 澄曰。臨淄城內有古阿育王塔。地中有承露盤及佛像. 齎經律數十部。往遼東宣化。現授三乘立以歸戒。蓋高麗聞道之始也. 疏之遠矣遼東城育王塔三寶感通錄載。高麗遼東城傍塔者。古老傳云。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高句麗. 像成在真平之世者謬也。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太元(376年-396年)是東晉皇帝晉孝武帝司馬曜的第二個年號
[8]. 三國遺事 卷第三 遼東: 晉孝武大元年末。齎經律數十部。往遼東宣化。現授三乘立以歸戒。蓋高麗聞道之始也. 疏之遠矣遼東城育王塔三寶感通錄載。高麗遼東城傍塔者。古老傳云。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高句麗. 像成在真平之世者謬也。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太元(376年-396年)是東晉皇帝晉孝武帝司馬曜的第二個年號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9]. User dictionary: 阿恕伽: 阿舒迦,王名。阿育王傳一曰:「作字名阿恕伽,阿恕伽者,晉言無憂。」見阿育條
[10]. 水經注 卷十三 㶟水: 㶟水出鴈門陰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南. 桑乾水自源東南流,右會馬邑川水,水出馬邑西川,俗謂之磨川矣。蓋狄語音訛,馬、磨聲相近故爾。
[11]. 大唐西域記 檢索 “阿育:是無憂王作地獄處。釋迦如來涅槃之後。第一百年有阿輸迦唐言無憂舊曰阿育訛也王者。頻毗婆羅唐言影堅。舊曰頻婆娑訛也王之曾孫也
[12]. 大唐西域記 伽耶山: 渡尼連禪河至伽耶城。甚險固少居人。唯婆羅門有千餘家。大仙人祚胤也
城西南五六里至伽耶山。溪谷杳冥峰巖危險。印度國俗稱曰靈山. 背伽耶之舊郊。踰蔥嶺之危磴。
、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13]. 海國圖志 -> 檢索 “阿育”: 印度沿革總考. 天竺國,一名身毒. 巴連弗邑,是阿育王所治也。諸天竺中,唯此國城邑為大.渡河南下,一由旬到摩竭提國巴連林邑,即阿育王所治之城
[14]. https://ctext.org/zh: 伽羅: Tagara,多伽羅之略,香木名。《通典·赤土》: 其官,薩陀伽羅一人,陀拏拏,女除反. 《太平御覽·獅子》 梁武帝大通元年,后王迦葉伽羅訶犁耶亦使使貢獻.
[15]. https://ctext.org/zh: 伽羅: 傳祚至金真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其先附庸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通典·赤土》: 其官,薩陀伽羅一人,陀拏拏,女除反. 《太平御覽·獅子》 梁武帝大通元年,后王迦葉伽羅訶犁耶亦使使貢獻.
[16]..ancienthistoryofkorea.com/history-of-the-silla-capital-慶州-in-korean-peninsula/
[17].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