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nshot-10: 결과: 단군조선의 발생지-2.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위(三危)는 구주 (九州.九疇)안에 있었다.
중국 고전에 삼위(三危) 기택(旣宅.既宅)이란 문구는 치수사업과 관계된 기록 여러 곳에 나옵니다 . 모두다 분수 연안과 그 서쪽에 보입니다. 북쪽에서 분수를 따라 내려온 사람들이 치수 사업에 성공 했습니다. 그 숨은 뜻이 [이미 기旣자] 속에 있습니다. 그 뜻을 숨기려고 [이미 기(旣)자를 모양이 비슷한 글자 기既자로 바꾸어] 현존 하는 상서에 나옵니다. 이미 기자는 횃불을 들고 허리에 비수(匕)를 지니고 살던 서쪽에서 온 유목민 이란 뜻을 겹쳐 만든 글자(旣: 皀,旡: 白,匕: 白:西方色也. 𤼽:古文白字) 입니다. 이를 모르는 서양 사람들은 [https://ctext.org/zh]에 두 글자가 같다고 풀이 했습니다.
치수사업을 한 사람들은 [바이칼호에서 또는 한만국경에 있는 백두산] 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상서 우공편에 북으로 강(洚.洪. 降.浲)수를 지나 대륙(大陸)에 이르렀다는 진의대륙 (晉之大陸)으로 부터 분수를 따라 내려온 사람들이 치수사업에 성공 했습니다 .
그들은 선조가 서쪽에서 왔다고 전해 왔기에 서주의 목천자는 서왕무 곤륜을 만나려고 서쪽을 다녀 왔습니다. 한무제 때에는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이 멀리 서쪽을 다녀 와서 서역의 문물이 중국에 아려 졌습니다.
국어나 춘추 등등 선진 역사서에도 그러한 기록이 없습니다.
맹자는 詩가 죽고 [진나라에는 승(晉之乘) 노나라에는 춘추 (魯之春秋)가 나타났다고 했서요 . 네. 시경에 있습니다.
시경 위풍(魏風)에는 분수를 뜻하는 분자와 옥저를 뜻한 저자 (彼汾沮洳)가 같이 나옵니다. 주 선왕을 만나 합의을 보았던 한후(韓侯)를 칭송한 한혁 (韓奕)에 분왕(汾王) 이란 글자가 있습니다. 그의 부친 여왕(厲王)이 경기지역 주민의 폭동에 쫓겨 매부 궐부(蹶父)가 분수가 흐르던 고을에 도망 갔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홍수라고도 읽는 강수가 분수에 이어 집니다. 그 곳이 고조선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의문의 위서(魏書云): 스님이 밝힌 위나라의 역사 기록(魏書云: 蓋魏國之史書)이 진수가 46세 때인279년 (太康元年)에 “汲郡人不准盜發魏襄王墓,或言安釐王冢” 위양왕 (魏襄王;?-296년 BC)의 무덤에서 나왔서요 . 그때 부터 약 2000년 전이라 했스니 2333년 이란 계산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급총죽간이 발굴되어 많은 옛적 기록이 허위로 밝혀 졌습니다:
백익이 지도자로 개를 세웠더니 개가 죽였다(益乾啟位,啟殺之) 는 백익 살해 사건이 기록 되었고, 주선왕의 아버지 여왕(厲王) 이 도망을 가서 원주민 지도자 공백화 (共伯和)가 정치를 했다는 내용을 사마천은 [연 소공과 주공 (召公、周公)이 정무를 돌보아 공화(共和)라 한다]고 했습니다. 공백화 (共伯和)란 공공이 치수를 하던 지역의 지도자 화(和)란 뜻입니다. 목천자전 오편 (穆天子傳五篇)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를 공상의 소설이라 합니다만 저는 목천자의 여행기록이라 봅니다.
중국 공산당에서 추진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 斷代工程)은 이때 부터 역사 기록이 확실 하다]고 인정하여 중국역사 시대설정의 주춧돌로 착용 했습니다. 사마천이도 사기 (史記表) 에 그렇게 기록 했습니다 .
급군에 있던 무덤에서 나온 죽간에 세겨진 내용이라 하여 죽서기년 (竹書紀年) 또는 급총주서 汲冢周書] 또는 잃었던 주나라 역사서란 뜻에 일주서 (逸周書)라고도 합니다. 이를 모두 공자의 후손 공조(孔晁)가 주를 달았다고 합니다 . 선진시대 공조란 이름은 가짜 라고 봅니다 .
수경주에는 급총죽간 내용을 인용한 죽서기년 (竹書紀年) 이란 문구가 많이 나오고, [위양왕(魏襄王) xx년에 xx한 사건이 있었다. 그가 소진(蘇秦:380–284 BCE)과 대화를 했다(蘇秦說 魏襄王曰)는 기록]도 있습니다. 급군에 있던 무덤(汲郡冢)은 많이 알려진 왕의 무덤이라 도굴 당했다고 봅니다. 왜 같은 무덤을 위 안해왕 (魏安釐王;?-243년 BC) 무덤 이란라 했는지 알수 없습니다.
발굴된 죽간을 어떻게 처리 했나하는 문제는 논란이 많습니다. 묵자한고 (墨子閒詁)에는 급총 죽간이 발굴되어 공조가 주를 붙일 때에는 마땅히 있었서야할 (孔晁作注時,當尚在也) 기자 편(箕子篇)이 일주서(周書)에는 없다(箕子解第四十骸)고 했서요
삼국지에 보면,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햇님의 후손이란 뜻이 있는 위나라의 역사(蓋魏國之史書)를 근거로 여러 사람들이 위서 위약 위씨 춘추라는 이름]으로 역사서를 편술 했습니다. 그 중에 [태원 사람 왕침 (王沈? ~ 266년)이 순의, 완적과 더불어 위서(魏書)를 편찬했지만(與荀顗、阮籍共撰 魏書) 그중 많은 내용이 죽은 기록(多為時諱)이라 진수의 실록에 따르지 못한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 태평어람 비서감 편에는 왕은(王隱)이란 사람이 진서(晉書)를 편찬 하면서 왕침(王沉, 王沈)의 위서에 있는 “多為時諱‘’란 문구를 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알수 없고, 바이두 백과( https://baike.baidu.com)에는
왕침(王沉, 王沈)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다 .
여기 나타난 휘(諱; huì)자는 예맥을 뜻한 예(穢, 薉) 자와 같은 음이라 그의 [위서를 예사(穢史), 즉 더러운 역사서] 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봅니다. 후에 북제(北齊, 高齊, 즉 대륙백제)의 위수 (魏收)가 편찬한 북위의 역사서를 위서라 합니다. 중원 사람들은 여러 위서(魏書)를 이리저리 돌려 진위를 알수 없습니다만, 일연 스님이 인용한 위서(魏書云)는 중국에 있었습니다. 중국문헌에는 한나라때 까지 보이지 않던 왕검(王儉) 홍익(弘益)이란 문구가 급총죽간 발굴 이후에 나타납니다. 현제에는 그 존재 여부를 알수가 없습니다.
급총죽간이 발굴된 직후에 졸본주에 있던 숙신(肅慎)씨가 다녀 갔다는 기록이 진서(晉書)에 있습니다. 어쩌면 숙신씨를 통하여 만주 땅에 전해졌던 급총죽간 내용이 한국에 전해 내려오지 않았나 하는 의아심이 생깁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위서운(魏書云), 왕검(王儉),주몽(朱蒙, 朱蒙) 하는 이름이 삼국사기에도 보입니다. 백제에서는 근구수왕 1년(375년)에 출처를 알수 없는 박사 고흥(高興)이 처음으로 국사인 서기(書記)를 엮었고 합니다. 당시 동이의 강국이된 부여왕 위구대(尉仇臺)의 후손은 한해(翰海)라고 이름한 발해-요동만 일대를 관장 했습니다. 대륙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천진-당산 일대에 살던 고흥이 급총죽간에 실린 내용을 인용 하여 서기를 편술했다고 봅니다. 일연스님이 인용한 [위서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 왔나, 그후에 어떻게 되었나] 하는 문제는 한국 학계에서 마땅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다름에 계속.
September 15,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