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nshot-10: 결과: 단군조선의 발생지-3.
마지막 문구[夏本紀: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는 사기 하본기에 실렸습니다. 여름 하(夏)자는 원주민의 말 소리를 사음한 글자(寫音字)라고 봅니다.
옛적에 그곳 사람들이 해(sun. light in the sky high) 또는 햇살 (beam of sunlight)을 상태에 따라 [하, 흐어, 허어, 히어, 하예, 해 등등]으로 발음하여 같은 소리를 여러글자 (PLCs)로 적었습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解. 亥. 海. 荷. 何. 許, 黑 등등의 상형 즐자를 ]훈역하여 각종 고전을 풀이 했습니다.
춘추삼전(春秋三傳)에는 진나라 사람들이 북적을 기에서 격파 했다[晉人敗狄于箕]는 문구가 있습니다. 기산(箕山)은 기자가 갔던 산서성 어느 곳을 뜻한 글자 입니다. 사기에[箕山之陽]란 곳을 맹자는[箕山之陰]이라 했고, 고전에는 이곳을 [箕山之下. 箕山. 箕]등등 여러 글자로 기록 했습니다. 같은 곳을 뜻이 다른 [陽. 陰. 下]자로 기록 했습니다. 기자가 갔던 조선에 어떤 산 일대에 옛적에 백익이 살았고, 그곳에 허유(許由)의 무덤이 있었 곳이다 . 요 순가 살던 곳은 융우가 치수사업을 하던 분수가 흐르는 산서성 입니다 . 산서성 일대에 나타난 공통분모가 [기자, 조선, 백익, 허유의 무덤, 요 순가 살던 곳] 입니다. 융우가 치수사업을 하던 분수가 산서성 서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하동90을 지나 황하로 이어 집니다.
단군왕검 백익이 [처음에 수도를 정하고(壇君王儉。立都阿斯達) 나라 이름을 조선(開國號朝鮮)이라 했다]는 아사달을 또는 백악 (亦云白嶽)산 이라고도 했다는 곳이 기산(箕山)이라고 봅니다.
금년 7월에는 얼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古稱朝鮮”란 문구가 한전 (漢典)에 시렸습니다. 전에는 없었서요. 다시 9월에는 그러한 근거를 찾을수 없습디다. 이러한 상황이 Internet Digital Library의 약점 입니다. 그 이외에도 저의 두 영문본이 출판된 이후 중국에서 관장하는 위키에는 종전에 없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상서 요전에 실린 [宅嵎夷,曰暘谷] 란 곳이 고조선이라 하던 곳(古稱朝鮮)이다] 산서성에 있었다는 증거 입니다.
최씨역림에 는 곳이라고 봅니다.
흉노땅 원주민을 북적(北狄), 백적(白狄), 백작(白翟), 개적(蓋狄), 적인(狄人) 이라는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 했습니다. 그들이 서주의 시조가 되는 고공단부 (大王亶父居邠,狄人攻之)를 공격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이 흰색 옷을 입어(因穿白色衣服) 백적(白狄)이라고 했습니다 . 그 사람들이 남만주와 한반도에 살던 한민족으로 옛적에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했습니다.
시경에는 하풍(夏風)이란 편명이 없습니다.
국풍에 진풍 연풍이 없다는 근거로 이 두 서주의 제후국은 만들어 붙인 이름이라고 논증 했습니다. 하왕조(夏王朝:c. 2070 –c. 1600 BC)는 가공 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여러 사음자 중에 어느 한 글자] 를 선택하여 썼다고 봅니다. 사마천은 하본기에 국호왈하후(國號曰夏后)라고 했서요. 나라 이름을 [햇님의 후손] 이라고 지었습니다. 남만주에서는 부여의 후손을 解씨,해비씨, 黑齒씨 또는 高씨 라고 했고, 서쪽에 탁발씨 (拓跋氏)씨가 세운 서하(西夏)를 백고대하국 (白高大夏國)이라 했습니다. 감숙성 옛 서하 땅에는 해(sun) 문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중국고전에는 [禹本紀.懷舊志. 費氏經]란 책이 있었습니다.
사기에는 우본기[禹本紀]란 이름이 있다. 그 내용을 사마천이 판독 했다. 우 본기[禹本紀]란 한서와 수경주에도 실렸다. 위나라의 가첩, 즉 해위국의 역사서(蓋魏國之史書)이란 뜻이다.
북제의 관리로 있었던 안지추(顔之推, 531-590 전후)가 남긴 안씨가훈 문장(顔氏家訓 文章)편에는 회구지(懷舊志), (王儉)하는 이름이 나온다. 예문류취 회구 편에는 양심약의 회구시 (梁沈約懷舊詩) 내용을 설명 했고, 양원제(梁元帝: 552년-555년) 가 회구지 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우의 혈거(禹穴) 와 요새를 만들었다(設險)는 기록이 있다 .
회구지(懷舊志)의 회자는 사음자로 濊貊족의 예(穢, 濊)자를 바꾸었습니다. 옛 예맥족의 기록 또는 가첩을 뜻하여 우본기 (禹本紀) 또는 279년에 급군에서 발굴된 위나라의 역사서 (蓋魏國之史書)를 회구지(懷舊志)라 했습니다.
태평어람 비서감 편에는 왕은(王隱)이란 사람이 진서(晉書)를 편찬 하면서 왕침(王沉, 王沈)의 위서에 있는 “多為時諱‘’란 문구를 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 나오는 심은후(沈隱侯)란 이름이 왕침(王沉, 王沈) 이라고 본다. 내용에는 [반고(班固)가 절부의 역사(竊父史)를 훔첬다]는 문구가 있다. 훔칠 절(竊; qiè)자는 사음자로 [契 洯 窃, 鍥]라고도 기록했습니다 . 절부의 역사 (竊父史)란 글안의 역사, 즉 고조선의 역사를 반고가 훔쳤다는 뜻입니다. 그에 앞서 맹자는 중국의 역사서를 설명 하면서, 공자가 춘추를 집필한 사연을 [孔子曰:其義則丘竊取之矣]라 했습니다 .
이를 아무두 [공자가 고조선의 역사를 기본으로 춘추좌전 (春秋左傳]을 작성했다]고는 풀이 하지 않습니다. 국어(國語)와 춘추삼전에는 관자이 나오는 발조선(發朝鮮), 북주후모(北州侯莫) 하는 명사가 없서요. 그러니 중국사람들이 고조선 역사를 훔처서 감춘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공자 가어에는 비씨, 비씨궁(費氏之宮) 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
예문지에는 비씨경과 고문(尙書?)이 같다 했고, 전한기에는 비씨경이 노고문과 같다(費氏經與魯古文同) 했서요 .
비씨는 해비씨를 뜻한 글자로 비씨경은 위나라의 역사서 (蓋魏國之史書)를 의미 했습니다.
중국고전에 나오는 [禹本紀.懷舊志. 費氏經]란 책 내용을 인용하여 사마천은 동양 역사의 시초 즉 오제본기와 하 본기를 작성 했다고 봅니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운 시기 부터를 한국역사의 시초라 봅이 마땅 합니다.
다음에 계속.
September 18,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