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from Zhina (Southern China) to Korean Peninsula
백제 부용국 신라가 대만섬에 있었다
봄 춘 기: 간략 소개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 新羅)는 옛부터 여러 글자로 기록 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신라 임나 가라(新羅 任那加羅) 와 같은 글자가 남조 역사서에 있다. 이를 왜왕 (倭王)이 다스렸다고 했다. 사기 평준서 (平準書)에 실린 창해지군 (滄海之郡) 지역을 광개토대왕이 정벌 했다.
전국시대에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今彌達)이 침략을 받아 셋으로 분산 되었다가 진시황 때에 완전히 정복 되었다. 그곳 난민들 (濊貊, 斯 )이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소읍 국가를 세웠다. 점차로 한해의 동서 연안을 따라 흐터저서 남중국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 (新彌諸國) 20여 국을 이루고 살았다. 이를 남조 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를 비미호 (卑彌呼)의 후손 왜왕이 다스렸다. 그들이 동남아 번성 하던 남방 불교를 해안을 따라 올라와, 강남을 거처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전했다. 신미제국을 이루었던 부여(夫餘, 扶餘)의 후손들이 한해 남쪽 항로를 건너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 했다. 중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학가(客家 Hakka)라고 한다.
이러한 장구한 세월 속에 지역과 시대에 따라 어음 변화로 같은 사물을 여러 글자로 표기 했다. 섬(Island, 島)을 주 또는 염(洲州剡)자로, 위 또는 높다는 뜻을 상(于上相)자로,강의 상류란 뜻을 상(湘)자로 기록 했다.
진시황이 발해(勃海; 勃:排也)의 봉래산에 신비스러운 약초가 있다는 방사의 말을 듣고 젊은 남녀 수천명을 바다로 보냈다. 오나라 손권(吳 孫權, 182년 -252년 ) 또한 신비의 약을 구해 오라고 명하여 갑사 만인 (甲士萬人) 을 바다에 보냈다. 이주(夷洲)에 갔던 사람들은 원주민을 잡아 돌아 오고, 더 멀리 단주 (亶洲) 로 갔던 병사들은 실종 되었다. 약초를 구하러 갔던 이주 (夷洲) 단주 (亶洲)를 양서와 통전에는 건모라 (健牟羅)로 기록 했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던 때에 이 섬을 백제 부용국 탐모라국 (𨈭牟羅國) 이라 했다. 중원을 통일한 후에 수나라가 처음으로 한해를 건너 한해 동쪽을 탐사 했다. 백제를 지나 일본으로 가던 항로에 죽도 (竹島)를 지나 나타난 제주도를 모(牟)자를 빼고 탐라국(𨈭羅國) 이라 했다. 수서에 실린 일차 사료를 잘못 풀이 하여 대만섬을 제주도로 인식했다.
금미달을 떠나 동남아로 진출 했던 부여의 후손들이 개발한 항로를 따라 서구인이 1543년에 일본 열도에 이르렀다. 그 항로에 있던 대만섬에 기지를 만들고 1624년 경에 Formosa란 이름을 남겼다. 통일신라 후기의 무장 장보고 (張保皐 , ? – 846년?)가 부여의 후손들이 개발한 해로를 장악 했다. 한해를 누비던 대륙백제의 후손이 왜구 (倭寇)가 되었다.
여름 하 승: 역사적 전개
마지막 단군을 불가 에서는 미륵 보살(彌勒菩薩) 로, 도가 에서는 큰 기러기 홍(鴻), 유가에서는 작은 기러기 안(雁)자로 바꾸어 상건하 (桑干河) 가 지나는 곳에 안문 (雁門) 관을 세웠다. 흉노, 부여, 고구려 의 세 지도자가 살던 곳을 지나는 여울을 상건하라 했다. 그 일대에 있던 금미달을 중산국이라 했다. 같은 곳을 신 구당서와 통전에는 고구려 땅이 옛고죽국 (高麗本孤竹國)이라 했다. 동한 말기에 해변에서 관 (coffin)을 구했더니 살아있는 사람이 나와 (我伯夷之弟孤竹君也) 나는 백이의 동생 고죽군 이다” 라고 했다. 금미달에 살던 사람들이 발해만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신목(神木)의 일종라던 부쌍(榑桑)을 음차하여 부쌍 (扶桑이라 했고, 훈역하여 양곡(暘谷)이라 했다. 논어에 당우지제 어시위성 (於斯為盛)이라 했다. [3] 즉 예맥족이 요순 시절부터 황하문명 발상지에 살았다. 그 곳에 환웅의 아들이 뜻을 두고 내려와 나라(意在斯焉古朝鮮)를 세웠다. 춘추 시대에 다시 중원을 석권 했다. [4] 관자에는 금국미란 (今國彌亂), 해왕지국 (海王之國) 문구가 있다. 중원을 석권 했던 고조선이 전국시대 후기에는 계속 북쪽으로 밀려 연산산맥 북부 산속(中山)에 있었다.
부쌍 이라 하던 지역에 공자가 북과 거문고 사용법을 배웠다는 조씨의 시조 양자 (襄子) 가 살았다. [5] 황제(黃帝)가 동쪽의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자부선인을 만나 삼황내문 (三皇內文)을 받았다는 곳이다. 이 지역을 삼한 (三韓)땅 청구 (靑丘)라고 했다. [6] 이 때 북쪽 세력을 이끄는 “세 지도자(三監, Three Leaders/ Hahn/Gahan, 三幹, 三韓) , 즉 “흉노 동호 북부여”의 지도자가 나타났다. [7] 청구(靑丘)란 곳을 여러 형용사를 붙여 람전 (藍田山, 藍田, 藍田壁玉 藍三種. 令支縣之藍山) 이라 했다. 청출어람 (靑出於藍) 이란 사자 성어가 나타난 중산국이 있던 곳이다. 진수가 금미달 지역에 있었던 세 지도자란 뜻의 삼감 (三監)을 삼한 (三韓)으로 바꾸어 었다.
사마천의 고향이 고조선의 발생지다. 아버지 태사공의 유언(意在斯乎)에 따라 온갖 고난을 격으면서 사기를 마쳤다. 사마천은 홍법구주 이윤유서란 글자를 바꾸었다. 홍범 (洪範)을 “鴻範”, 구주(九疇)를 구등 (九等), 이윤 (彝倫) 을 상윤(常倫), 유서 (攸敘) 를 소서(所序)이라 했다. 홍범(鴻範, 洪範) 이란 “온 마을이 합십하여 치수사업을 하던 공공(共工)시절에 나타난 율법” 이란 뜻이다. 이를 주관한 단군을 큰 활을 든 지도자 두루미 미(彌) 자로 기록 했다. 부여를 상징하는 사슴, 두루미, 산삼(山蔘)이 신선도에 필수로 실려 있다. [8] 시경에는 홍자 안자(鴻雁) 가 많이 보이고, 결혼식에는 홍안지례 (鴻雁之禮)란 관습이 있다.
산서성 분수 연안이 모두 예성이라 하던 제후국 진의 영역이 었다. 그 일대에 고전에 혼미하게 실린 지명이 많이 있었다. 그 하나가 고유(高柳) 즉 고도(高都)다. 오늘의 오대산 국립공원 서쪽 대현 (代縣)으로 수극(垂棘) 람전 (藍田)등 혼미한 지명으로 기록 되었던 금미달 영역에 안문산(雁門山)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단군조선 문화를 자기들 것으로 둔갑 시켜] 신석기 시대 부터 상나라 시기 까지 유적이 발굴된 곳이라 한다. [2]
[1]. 康熙字典: 《書·堯典》蕩蕩懷山襄陵. 又佛堂曰鴈堂。《釋氏要覽》毗舍離爲佛作堂, 形如鴈字, 因名。 文巫祭. 漢書 地理志上:河東郡:安邑,解,蒲反,臨汾,平陽, 襄陵, 絳,騏。伯益也。 論衡 感虛: 堯之時,洪水滔天,懷山襄陵,帝堯吁嗟,博求賢者. https://zh.wikipedia.org/wiki/%E8%A5%84%E9%99%B5%E4%B9%8B%E6%88%B0.
[2]. 康熙字典: 《書·堯典》蕩蕩懷山襄陵. 又佛堂曰鴈堂。《釋氏要覽》毗舍離爲佛作堂, 形如鴈字, 因名。 文巫祭. 漢書 地理志上:河東郡:安邑,解,蒲反,臨汾,平陽, 襄陵, 絳,騏。伯益也。 論衡 感虛: 堯之時,洪水滔天,懷山襄陵,帝堯吁嗟,博求賢者. https://zh.wikipedia.org/wiki/%E8%A5%84%E9%99%B5%E4%B9%8B%E6%88%B0.
금미달에 살던 예맥(濊貊, 斯, 泰, 黎)족이 발해만으로 내려 왔다. 사마천은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 라 했다.[13] 그로 부터 해하 수계에서 발해만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조선(朝鮮)이 있었다. [14] 오팽이 조선을 매멸하여 창해군이 나타났다. 이는 한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왕의 영역을 침략 하기 20여년 전이다. 이를 후한서에 예군남여 (濊君南閭)가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갔다고 했다. 장화는 박물지에 기자가 조선에 살다 연을 벌하고 조선에 돌아와 바다로 들어가 위선국(為鮮國)이라 했다. 같은 지역을 그의 친구 었던 진수(陳壽)는 미(彌)자가 들어간 변진전에 주선국 (州鮮國)이란 이름을 실었다. [15] 그에 실린 두 구야 (狗邪)국이 해상교류를 했다. 비류와 대동강 하구에 있던 온조의 수도(狗邪韓國)를 뜻했다. 한서에는 조선이 바다에 있다고 했다. 발해만 연안에 왔던 사람들이 한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흐터져 나갔다. 중원에 흐터져 살던 부여 후손의 유래를 광운에 “餘, 濊” 자 설명에 있다. [16] “餘”자는 부열/설 (傅餘)을 간략한 글자다.
훈고학에 필수가 되는 허진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설/열(說)이 만든글 문(文)을 풀이 했다는 뜻이다. 열(說)이란 부열(傅說)을 간략한 글자다. 부암(傅巖, 傅巖,불함산),즉 아사달(阿斯達) 에서 수미(胥靡) 로 일하던 사람 이 열 또는 설이라곧 읽는 부열(傅說)이다. [17] 사무원으로 기록을 하던 사람, 또는 현악기 축(筑)을 든사람 이란 뜻이다. 그가 남긴 설/열문(說文) 을 허진이 한자 한자 풀이 했다. 이를 창힐이 만들 었다고 한다. 당나라 때에 불교 스님들이 편술한 법원 주림 (法苑珠林)에는 창힐(倉頡) 이전에 고조선에는 거루선인(佉樓仙人 佉盧)이 쓰던 글자가 있다고 했다.[18] 신라 초기 이름 또한 시로 (斯盧)다. 거루 선인이 예맥족 (斯)이란 뜻이다. 문수 (文殊)보살이란 글(자) 를 다루던 보살 이란 뜻이다. 거루란 고조선의 궁궐 대루각을 떠난 성인 이란 뜻이다. 이를 불가에서는 여러 글자로 기록 하는 가락국의 어원인 가라 (Khara 伽羅, 加羅)란 이름이 나타났다. [19] 변진전(弁辰傳)에 실린 한의 후손이다.
고조선 수도가 중원세력의 침략을 받아 패허가 된 상황을 모티브로 대루탄경 (大樓炭經)이 나타났다. 기세경(起世經)에는 제석(帝釋)이 환인(桓因) 과 천상의 패권 다툼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20]
거루선인을 루번(樓煩)이라 했다. 괴로움을 격던 루각이란 뜻이다. 임유관 즉 안문관 일대에 있었다. 금미달이 수란을 격던 시절에 살았던 맹자는 이루 상하 ( 離婁上下) 편을 만들고, [위 혜왕(魏 惠王,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4년)을 모시던 ] 백규 (白圭)에게 [너의 도는 맥도(貉道)다] 라고 했다. 남쪽 세력이 고조선 세력과 안문관 일대에 있었던 연(燕)과 역수 (易水) 연안에서 겨루었다. 같은 글자를 불가 에서는 달리 풀이 했다. [21] 하여 “勃海”는 [밝은 해]란 뜻으로 조선 땅, 즉 아침이란 뜻이 있는 진 (晉; 明出地上, 㬜) 의 영역 높은 산봉우리가 햇살이 비추었다는 뜻이다. 그곳 높은 세(三, 參) 산에 신선 (神仙) 이 산다고 믿었다. 셋에 풀초 변을 씨워 산삼 (山蔘) 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높은 산에 산삼이 난다는 말을 잘목 풀이 하여 선남선녀 수천명을 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다.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난 지역이 산동반도 북쪽, 또는 남쪽 낭아대라 한다.
진수의 삼국지에 조조의 후처 무선변황후 (武宣卞皇后)가 문제의 어머니다. 그로 부터 변(卞)씨가 나타났다. 그녀의 출생지가 오늘의 임치(臨沂)인 서주 (徐州) 낭야군(琅邪郡) 개양현(開陽縣) 이라 한다. 그 서쪽에 사물현(史勿縣) 의 어원이 되는 사수(泗水)가 산동성 제녕시 동남(山東省濟寧市東南)에 있는 대택으로 흐른다. 광개토대왕 시절에 신라와 가야(加耶)가 그곳에 있었다. [23] 임성(任城)이 있었다. 임성을 임나 (任羅 任郡)이라 고도 했다. [24]
동북아 문명의 기틀을 닦은 사람들이라 예맥족을 태족(泰族) 이라 했다. 이에 사람인 변에 태족(傣族)을 만들어 동남아 지나(支那)에 사는 소수 민족으로 풀이 한다. 지나에 사는 묘족(苗族) 이족 (夷/彝 族)이란 이름은 삼묘, 백익, 치우천왕과 같은 예맥(濊貊, 斯, 泰, 黎)계통이라 한다.
후한서(後漢書) 에는 시경(斯經), 시문(斯文), 시도(斯道) 하는 글자가 있다. 단군설화와 태사공의 유언에 “在斯” 라 실렸다. 환인, 즉 밝음의 원인을 불교의 창시자(桓因謂帝釋也) 라 했다. 또한 옛 고문을 관람한 사람들이 새조자를 어찌언자로 오인(烏焉易訛。覽者諒焉) 전주 했다. 시 오손족 (斯烏孫族)의 땅에 관심이 있어서 보냈다고 풀이 했다. 논어등 유가 경전에는 시문(斯文) 시도 (斯道)란 문구가 있으나 풀이가 모호하다. 아사달의 천할 시(斯)자 예맥(濊貊)이 넓리 흐터져 살았다는 뜻이 시/사라 (斯羅)의 어원이 되었다. 예맥 족이 계산법도 개발 했다는 뜻에 예수작수 (隸首作數)란 문구가 있다.
공자가어 관주(孔子家語 觀周)에 그가 읽었다는 금인명(金人銘)은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시문(斯文) 자였다. 한서에는 금인명을 황제명(黃帝銘)이라 했다. 예맥족이 사용하던 글자로 환인의 가름침이 금인명이다. 금인명을 황제의 금언이라 하듯, 예맥족의 지도자 “예수를 황제의 신하” 라고 한다. 동양에서 옛적나 나타난 아직도 사용 되고 있는 상형자는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이 원조가 아니라, 번후(樊侯)가 산서성 (晉. 隸省) 사람들을 대리고 만든 글자(省作. 隸作)다. 한예문자(韓穢文字)라고 부름이 마땅하다.
금미달에서 글을 다루던 보살을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 했다. 석가여래를 왼편에서 모시고 있는, 지혜를 맡아보는 보살 이라 풀이 한다. 문수(文殊)란 글을 다루던 보살이란 뜻으로 거루 선인(佉盧, 佉樓仙人)과 같은 사람이다.
발해만 연안 천진 당산 일대에 백제 땅 맥국 (濊國) 이 있었다. 신라(新羅) 2 대왕 남해차차웅 16년에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 그 곳에 [신라 가야 왜 백제 등등] 여러 소읍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금미달 지역 사람들이 발해만으로 내려와 두루미 미(彌)자가 붙은 이름이 많이 나타났다. [25] 삼국지 한전에는 큰 아들 비류가 미추홀(彌雛忽)에 수도를 정해 나타난 대륙백제을 맏 백자 백제국(伯濟國)이라 했다. 이 지역을 광개토대왕이 정벌 했다. 비문에는 미추성 (彌鄒城) 으로 색인 되었다. 이곳이 “신라 임나가라 백제”의 발상지다. [26]
가을 추 전: 어원 풀이
1.가왜왕(假倭王)의 어원:
진수의 삼국지 동이전에 왜여왕 비미호 (倭女王卑彌呼)란 글자가 나타났다. 같은 사람을 가왜왕 (假倭王)이라 하고 정시원년 (240년) 이라 밝혔다. [27] 그 전 (173년)에 왜여왕 비미호 (倭女王卑彌呼) 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거짓 가, 멀 하 또는 빌 가(假; jiǎ jià xiá; 夏, 假也)라고 읽는 글자는 사음자 로 [먼 하늘 나라 ]의 뜻이다. 백제의 최고 제사장 여자 무당을 비미호라 했다. 고조선의 수도가 있던 분수연안 도산(塗山) 청구(青丘) 일대에 살던 원수 였던 구미호(九尾狐; 仇彌; 仇,合hé해也)가 발해만에 이르렀다. [28]
시경에는 금미달, 즉 진나라가 멸한 변한(秦滅韓)사람들을 갈까마귀 때로 비유한 소빙 (小弁)이 있다. 황해남도에 전승되어 오던 강령탈춤에 변한 양반(弁韓兩班) 이란 이름이 있다. 왜왕이 다스렸다는 여섯 나라 이름에는 변한(弁韓)이 없다. 변한의 지도자를 가왜왕 (假倭王)이라 했다.
영국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에 버금가는 문호 (글자 작란의 도사)가 중원에는 여러 시대에 나타났다. 순자와 사기에 애비부자 부여 (夫餘) 자가 있다. 진수는 재방변(扌, 手hand) 을 붙여 부여(扶餘)를 부여(夫餘) 의 다른 부족으로 사용 했다. 그는 또한 웃사람을 뜻한 큰/ 간/ 한( Khan干, 汗, 韓)을 왜(倭; wēi wō wǒ) 라고 천시하는 글자로 바꾸었다. 지도자 가한(河干, 乾)을 감( 監), 한 (韓) 또는 왜(偎 倭)라 했다. [29] 옥편에는 왜 (倭:音煨) 에서 사람인 변을 불화 변으로 바꾸었다. 지도자가 괴로움을 당한 다는 뜻이 있는 글자다.
건(乾)을 하늘 같이 여기는 지도자(天也,君也)라 했다. [30] 진수가 왜인 이라고 비하한 글자는 하후씨 우(夏后氏 禹)란 글자와 같이 높다는 뜻의 사음자다. 경전 문헌에 실렸다. 산해경에 천독 왜인(天毒, 偎人) 하는 왜자가 높을 위(魏),작을 미(微wēi), 오/우(吳Wú)로도 기록 되었다. [31]
삼국지에는“어렴풋할 외, 가까이할 외, 친근하다”는 뜻이 있는 왜(偎wēi) 자가 없다. 천시하는 뜻이 있는 왜(倭; wēi wō wǒ; short) 자로 동이전에 편명을 만들었다. 그 앞에 형용사로 “멀 하遐. 假 “ 라고도 읽는 글자를 “히 嘉”이라 했다. 부여(夫餘)는 원수 구(仇)자와 같이 중원 세력에 달갑지 않은, 도울부자 부여(扶餘 는 도움을 주는부족으로 사용 했다. 부여의 후손에 우문씨, 모용씨, 멀 하遐. 假자의 근간이 되는 단(段)씨가 있다. [32]
비류(沸流 比流)는 천제(天帝)의 아들로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해모수 (解慕漱)의 후손이다. 비는 사음자다. 흐를 류자를 더했다. 햇살(Beam of light)이란 뜻이 있다. 환인(桓因)의 명에 따라 멀리 하늘 나라(빌가 멀하(假, 遐: xiá) 에서 내려와 예맥족(濊貊, 斯 )을 다스렸던 지도자, 큰고 높은 (偎) 해왕(解王, 海王), 한왕(汗王) 이란 뜻을 배가왜왕 (拜假倭王)이라 했다. 왕이 죽으면 [승하(昇遐) 했다]고 한다. 동북아에 나타난 천손강림 (天孫降臨) 신화를 뜻한 글자다.
홍산문화를 이루었던 동이의 유래와 분포를 왜인(倭人)전에 기록 했다.[33] 비미호의 후손이라 자처한 구주 태생 풍신수길(豊臣秀吉; 1537- 1598년 ) 이 한국 사신에게 전한 정명가도 (征明假道)란 문구는 [명나라를 정벌하고 먼 하늘 나라에서온 위대한 해왕 (解王)의 가르침에 따라 통치 하련다]는 뜻이였다고 본다. [34] 임진 왜란전, 또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도 왜인(倭人) 이 대만섬을 침략했다. 같은 글자를 남북이 음과 뜻을 달리 사용한 증거다.
신라(新羅)란 “새로운 나라”란 뜻이다. 국호를 여러번 바꾸었다. [35]
신라의 창건자를 서쪽에 살던 지도자란 뜻에 거서간(居西干)이라 했다. 수경주 하수 (河水) 편에 시라국 (尸羅國)이 있다. 시라국(尸羅國)이란 뜻은 한어로 끊을 절 절두 (截頭, 切頭)라고 했다. [36] 예맥족 시(斯)가 죽어 시신이 여기 저기 흐터저 주검 시(尸Śila) 라(羅)라고 했다. 이를 진수는 왜인전에 대진국 가까이 사/시라국 (斯羅國)이라 했다. 불교 전래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이 흐터져 있던 시라(尸羅)가 옛적 신라 (新羅)의 어원이다.
금미달 지역에 천독국에서 온 도술인 시라(道術人 尸羅) 가 나타났다. [37] 전욱 (羅氏 顓頊後)고양씨의 후손이 호북성 라씨 (羅)씨가 되었다. 신라 초창기 지도자들의 이름 속에는 원시불교 전래와 관계가 깊은 글자를 많이 사용 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간다는 뜻의 복국호신라 (復國號 新羅)란 글자가, 기림이사금 (基臨尼師今) 10년에 나타났다. [38] 그후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에 불교가 번창하여 남만주-발해만 일대에 있던 고구려와 신라 백제에 전래 되었다. 전진 (前秦)의 3. 대 황제 부견 ( 苻堅, 337년 ~ 385년) 에게 국호를 바꾸었다고 알렸다. 당시 신라 는 발해만 서남쪽 연안에 있었다. [39] 이때 쓰던 신라(新羅)란 명사가 임나 가라와 같이 대왕 비문에 실렸다. 불교와 관련이 깊은 이름자다.
북송 시대 편술된 광운 (廣韻)에 삼한의 후손”부여, 백제”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에 신라(新羅)란 명사의 근간이 되는 “그물 나/라 羅” 로 풀이 되는 글자 설명이 있다. [40] 신라(新羅)란 [새로 그물을 던졌다는 뜻으로 유신(維新)정책을 실시한 새나라(New Nation)를 뜻한] 글자다.
진서에는 백제 신라 임나 가라(新羅 任那加羅) 를 백제 휴인(百濟, 薛羅, 休忍)이라 했다. [41] 해설계(xiē解薛契) 모두 해(sun, beam)를 뜻한 글자다. 설라(薛羅)란 설씨가 통치 하던 나라 란 뜻이다. 지금의 산동(山東)성 등주(滕州)시 동남쪽 에 있었다. 휴인(休忍)이란 글자는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그에게 나라 통치권을 맏겼다 하여 임나 (任那, 任城) 라고 했다.
북쪽 세력에 밀려 사마진(晉)이 남쪽으로 밀려간 남북조 시대가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 였다. 중원을 괴롭혔다는 기록을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 남겼다. [42] 남북조 시대 끝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던 시절을 묘사한 문구“隋皇失馭,, 由於征遼”가 삼국사기에 있다. 수문제가 [임유관 전쟁에 실패하여 고구려가 요동, 즉 옛적 금미달 지역을 정벌 했다]는 뜻이다. 이 시절에 백제가 남으로는 오월을 침략했고, 북(北) 으로는 유주의 연제노 (燕、齊、魯)를 공략하여 중국의 큰 괴로움을 주었다. 최치원은 황소의난 (黃巢之亂; 875년~884년) 에 참여하여 고빙을 도와 지나(支那)의 대명사인 운난성 (高駢擊敗南詔) 격파에 큰 공을 세웠다.
안록산의 란을 격었던 당 현종은 운남성을 정벌하지 못하고, 운남성 지도자를 비하해서 읊은 시문에 [이를 지자 지나 (至那)를 가지 지자 지나로] 바꾸어 “支那弟子無言語“이라 했다. [43] 원나라가 운남성을 정벌 했다. 백제에서는 1267년에 양호(百濟遣其臣梁浩)가 사절단을 이끌고 원세조를 찾아갔다. 그 당시 당나라 때 통치 못했던 지나 영역을 정벌 했다. 그 영역을 [동쪽 끝은 고려(高麗) 서쪽으로는 곤명(滇池) 남쪽으로는 주애(朱崖)에 이르는 옛적에 미치지 못했던 지역]이라 했다. 동쪽 끝에 고려(高麗)가 있었다는 곳은 옛적에 고구려(高句麗) 유민들을 이주 시켰던 귀주 땅을 뜻했다. [44] 백제와 신라의 잔여 세력은 양자강 이남, 즉 지나 (支那)에 있었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국기(新羅國記)를 남겼고, 송나라 손목이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남겼다. 북송시대 편술된 태평광기 (太平廣記)에는 방이(旁㐌)를 시조로 하는 김씨 (金哥)의 신라(新羅)가 풍랑 에 시달리고 해객이 신라 (海客往新羅)에 자주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 [45] 이는 모두 중원에 있던 신라(新羅에 관한 기록이다.
동진(東晋)시대 기록에 신라(新羅)란 글자가 복건성에 나타났다. 진서 (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이란 문구가 있다. 해안을 따라 백제와 같이 강남으로 옮겨 갔다. [46] 양서(梁書)에는 해남제국 (海南諸國), 즉 교주(交州) 남쪽 동남아 해안에 흐터져 있는 나라를 기술 했다.[47] 그중에 하나가 남쪽 해안에 있는 신라(新羅)다. 그 곳에 신라만 (新羅灣)이 있었다. 신라의 선조는 진(秦)나라 때에 노역을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다. 동음이자로 바꾸어 진한이 곧 진시황의 나라 사람 (辰韓亦曰 秦韓) 이라 했다. 삼국지 변진전에 실린 내용을 되풀이 했다. 이는 금미달 사람들이 해안을 따라 신미제국(新彌諸國)이 4000리에 흐터져 있다는 지역에 신라가 있었다는 뜻이다. 금미달 지역에서 쓰던 어음을 상형자로 기록 했다. 건모라(健牟羅)에는 육탁평(六啄評)이 있고 군현에 해당하는 읍륵(邑勒)이 52개 있었다. 문자가 없어 목각을 깎아 의사 전달을 한다. 탁평과 목각이란 표현이 동번기 (東番記)에 실린 남왜북로 (南倭北虜) 유조적 고전자 (類鳥跡古篆)란 문구라 본다.
진서(陳書)에 [발해만에서 부터 동남아 불교국 이었던 천축, 단단국 등이 사절단을 보냈다. 그 중에 신라 (新羅)가 있다. [48] 이에 실린 신라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양자강 이남 지역에 있었다.같은 글자 “新羅 任那 加羅”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실렸다. 대만섬에는 가라호(加羅湖) 가라산( 加羅山)이 있다
수(隋)나라가 마지막으로 남쪽에 있던 진(陳)나라를 589년에 정벌 하고 처음으로 한해를 건너 한반도 남단을 지나 일본열도와 유구를 탐사 했다. 성왕(聖王, 504년?-554년 ) 의 아들 위덕왕(威德王, 525년 ~ 598년) 35년 이었다.[49] 전쟁 당시 동쪽 바다에 섬에 표류된 전함을 백제를 통해 인수 했다. 이 섬을 백제의 부용국 빙모라국(𨈭牟羅國)이라 했다. [50] 섬의 크기와 시대를 고려 하면 이는 대만섬(Formosa)이다. 백제가 한해의 동서연안 에 수도를 두고 해상로를 다스리던 전성기의 종말 이었다. 백제는 남경에 있던 거발성을 빼앗기고, 대만섬에 있던 신라의 서쪽 주군 (西邊州郡)을 공략 했더니 그 곳을 지키던 진흥왕의 아들 진지왕 (眞智王: 576년 ~579년) 때 이찬 세종 (伊湌世宗)이 백제군을 격파 했다. 그 전에 신라 수도를 건 모라 (健牟羅) 라고 부르던 대만섬 (Formosa)에서 한반도로 옮기고 있었다.
백제, 가야, 신라의 순서로 해로를 따라 한반도에 정착 했다. 산동성 서북부 발해만에 있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나라가 번창 했다.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재위 417년 ~ 458년) 25년에 사물현(史勿縣)에서 꼬리가 긴 힌꿩 (白雉)을 선물했다. 소지마립간
(炤知麻立干, 재위; 479년 ~ 500년) 25년에 가야국(加耶國) 에서 꼬리가 5자 되는 힌꿩(白雉)을 보냈다. [51] 한반도에는 힌꿩이 없었다. 사물(史勿)이란 사수의 사음자다. 산동성 남서부 대택(大澤)으로 들어가는 사수(泗水, 泗河)를 사물이라 했다. [52] 당시 신라와 가야는 산동반도 남부로 밀려가 있었다. 그로 부터 가야가 먼저 한해 중간 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남 해안에 이르렀다. 신라는 그 후에 한반도 동남 해안에 정착 했다. 뒤에 강남 지나 (支那)에 있던 불교국 신라가 한해 남방 해로를 따라 올라와 경주에 정착 했다.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智證王, 437년? ~ 514년)이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왕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 했다. 전함을 만들어 512년에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고 배를 만드는 부서를 설치했다. [53] 큰 아들이 여러 이름으로 기록된 진흥왕이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 (仇亥王; 재위: 521년 ~ 532년)이 섭정을 하고, 521년에 처음으로 양(梁)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4] 진흥왕 (眞興王, 534년 ~ 576년) 23년에 처음 으로 사다함(斯多含, 547년? ~ 564년?) 이 화랑도를 이끌고 가야 (加耶, 금관 가야 , 都斯麻國)를 정벌하고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 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를 습격했다. 개로왕이 한반도로 이사 오던 신라와 대륙 백제에 구원병을 요청 했다.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 458년) 때다. 태자 문주가 신라군과 같이 도착하니, 백제 한성이 함락 되고 개로왕은 이미 살해되어 있었다. 그 때 고구려가 북쪽 항로를 관장 하여 중원에 구원군을 청하려고 남방 항로를 처음 개발 했다.
위덕왕(威德王, 525년 ~ 598년)이 대륙에 남겨놓고 온 어린 아들 유왕을 위하여 577년에, 왕흥사(王興寺) 또는 미륵사(彌勒寺) 라고 부르던 절을 지을 때, 불교와 깊은 인연을 암시한 법왕의 아들 신라 백정 (伯淨, 白淨, 白丁), 진평왕 (真平王;재위 579년 ~ 632년 )이 도왔다고 했다.
부여에 있는 [왕흥사 절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라는 글이 발굴되 었다]고 한다. [55] 대동강 하구, 한성 (漢城)에 있던 개로왕이 살해되였다는 비보를 듣고 열도백제에 총통으로 있던 동생 부여곤지 (扶餘昆支, ? ~ 477년) 가 아들과 같이 돌아와 충청도로 밀려온 반도 백제를 다스렸다. 동성왕(東城王: 479년~501년) 이 남조 역사에 나오는 마지막 왜왕(倭王) 이다. 동성왕이 479년에 백제 부용국 이었던 탐라(耽羅),즉 탐모라 (耽牟羅)가 배신하여 정벌하려 했다. [56] 제주도가 아니라 대만섬 (Formosa) 에 있던 신라가 배신 하려다 계획을 취소 했다.
그의 뒤를 이었던 백제 25대 무녕왕 (武寧王,재위: 501년 – 523년)의 아들 성왕(聖王, 轉輪聖王;? ~ 554년) 시절에 후경이 거발성을 함락 했다. [57] 대륙 백제 영역에 남방불교가 번성했다. 후경(侯景, ? ~ 552년)은 갈족 (羯族) 으로 기록된 금미달 (侯景 鴈門人) 지역 사람이다. 북제를 세원던 발해 고씨와 같이 북위(北魏) 동위(東魏)의 장군이었다. 같은 동위의 장군이었던 고양 (高洋) 이 선양 받아 업(鄴) 수도를 정하여 북제(北齊, 550년 ~ 577년)가 나타 났다. 후경에 점령 당했던 백제 수도 거발성은 남경시 가까이 경구 (京口) 에 있었다. 무령왕(武寧王, 名斯摩, 461년- 523년)이 다스리던 수도란 뜻에 김해를 도사마(都斯麻)라 했다. 그의 뒤를 이은 백제 성왕이 수도를 잃고 한반도 소부리 (聖王移都所夫里)로 옮겼다.
이혼란기를 양서에 석이예란하 (昔夷羿亂夏), 견융액주 (犬戎厄周) 라, 즉 [옛적에 왕검 조선의 주민 들이 우왕의 아들 개가 세운 하나라와 싸웠고, 서주를 괴롭 혔다]는 사실에 비유하여 대륙백제의 혈통을 설명했다. [58]
남제(南齊; 479년 ~ 502년)서에는 송서에 실린 왜에 관한 기록을 인용 하고 더 높은 작위를 주었다.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 (鎮東大將軍 百濟王 牟大)가 올린 표(表曰)가 실렸다. 조부모도 (祖父牟都)가 밭았던 같은 칭호 를 왜왕과 백제왕이 같이 받을 수는 없다. [59] 왜에서 돌아온 동성왕 (東城王, 재위 : 479년- 501년)을 왜왕이라 했다.
마지막 왜왕(倭王, 즉 동성왕) 이후 부터 대만섬 (Formosa)에 있던 신라와 왜가 탐라(躭羅), 즉 제주도를 지나 지증왕 (智證王, 437년?~ 514년) 과 법흥왕(法興王, ? ~ 540년) 시절에 남방 항로를 따라 한반도에 옮겨 왔다. 한해 서쪽에서 먼 바닷길을 통해 동쪽으로 옮겨오는 고란을 오랫 동안 겪었다. 그당시 신라와 백제의 기록에는 불교경전에 실린 이름을 많이 사용 했다. 통전과 원나라때 편술된 문헌고(文獻通考)에 간략히 그시절 신라를 설명 했다. [60] 뒤를 이은 아들 법운 (法雲) 진흥왕 (眞興王, 재위: 540년 ~ 576년)이 [경상도 창녕 , 서울 북한산, 함경도 황초령 과 마운령 ] 4 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당나라 때 편찬된 통전(通典新羅)과 원(元)나라때 편술된 문헌 통고 (文獻通考)에는 신라의 출원부터 한반도 동남 연안으로 옮겨온 자초지종을 설명 했다. [61] 양나라때 신라의 도성 (都城)을 건모라 (健牟羅), 또는 탐모라국 (耽牟羅國)이라 하고, 신라에 관한 기록의 출처를 수나라 때에 동쪽에 있는 번국의 풍속기 (隋東蕃風俗記云)라 했다. 번(番)자는 여러 글자로 기록 했던 변한 (弁韓)을 간략한 글자다. 동번(東蕃)이란 글자는 대만 해협 동쪽에 살던 변한(弁韓) 사람들의 후예(番)를 천시 하여 풀초 변을 씨웠다. 같은 혈통으로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북번(北蕃)이라고 했다. 한시외전에는 전국시대 위 문후(魏 文侯,? ~ 기원전 396년)를 다루면서 북번 중산 지군 (北蕃中山之君)이란 문구가 있다. [62] 대만해협 서쪽 지나 땅에 사는 사람들의 지도자를 번우(番禺)라 했다. 남조 역사서에 왜왕(倭王) 이 다스렸다는 나라 이름에는 변한(弁韓)이란 글자가 없다. 변한(弁韓) 사람이 왜왕(倭王)이 었다. 옥새의 유래와 삼신산 불로초의 대명사 영지 버섯이 영지현의 람산 (令支縣之藍山)에서 나타났다. [63] 지도자란 뜻의 감(監)자에 풀초변을 씨워 비하한 글자가 사자성어 청출어람(靑出於藍) 에 실린 쪽풀 람자다.
건모라(健牟羅)에 살던 왕 모진(王姓慕名秦)이520년에 처음으로 해협을 건너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선조는 알수 없다고 기록 했던 김씨를 그로 부터 30세대라고 했다. 모진을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년 ~ 632년)으로 풀이 하여 시대 계산에 차질이 있지만, 한 세대를 30년으로 풀이 하면 그로 부터 900년 이전이 된다. 전국시대 금미달에 불상을 들고 왔던 천축국 도인 시라(尸羅)가 모진의 선조다. 백제 위덕왕 또한 수도를 한반도로 옮겼다. 강남 지나 (至那)에 있던 신라 임나가라 백제가 한반도로 옮긴 시절의 한중일 기록이 모두 혼잡모호 하다.
안문(鴈門)관이 있는 금미달을 떠난 부여의 한 지류가 동남아로 내려가 정착 했다. 이를 부남 (扶南) 이라 했다. 현장 스님은 아쌈 동쪽 큰강을 지나 불교가 번창 했던 지역을 지나 (至那)로 기록 했다. xx을 지나면 나라에 이른다” 는 뜻의 지나(至那)를 가지 지자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운남성에서 매콩강을 따라 내려와 정착 했다. 동남아 일대에 이사나성(伊奢那城), 진납국 (真臘國); Chenla or Zhenla) 등 여러 국가를 이루고 살았었다.[64] 하여 동남아에서 남 중국에 이르는 지역을 지나(支那; Zhina )라고 했다. 동남아 넓은 지역에 부여의 후손들이 흐터저서 살았다. 이를 이방인 이라 하여 중국 기록에 객가 (客家)라고 실렸다. 남송시대 문헌에 부여 삼한의 후손들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려 있다.
태평광기에는 허왕후의 선조는 불교 발생지역인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옛 통상로 차마고도를 통해 지나(支那) 라고 알려진 운남성에서 이르렀다. 출처를 당나라 사람 단성식 (段成式) 의 유양잡조 (酉陽雜俎)라 했다. 휴도왕(休屠王) 김일제의 후손이 김가로 기록 되었다. 신라의 제 일족은 김가 ( 金哥), 먼 선조를 방이(旁㐌), 수도를 의의(宜矣)라고 했다. 한국에 전해 오는 도깨비 방망이 방이(旁㐌) 설화 내용에 누애와 코끼리가 나온다. 이에 실린 김가는 한반도가 될수 없다. [65]
오나라 손권이 강동사람 육손 (江東大族 陸遜; 183년 ~ 245년)에 명하여 복건성 해변에 사는 사람들을 동원 하여 대만 (夷洲及亶洲/臺灣)과 해남도 (朱崖/海南島 ) 정벌을 계획 했다. 손책의 사위 육손(陸遜)이 바다는 끝을 알수 없다고 우려 했다. 발해만 양평성에 있던 공손연(公孫淵, ? ~ 238년) 을 토벌 하려고 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교류 하던 시절이 었다. [66]
육손(陸遜)이란 손책의 선조와 같이 멀리 대륙에서 내려온 사람의 후손이란 뜻이다. 고구려 왕자 발기가 손책을 도와 남경 일대에 거주했다.[67] 대만 해협(臺灣) 양안의 번(蕃, 番)은 남북조 시대 부터 계속해서 거래가 있었다. 변한 후손의 어느 지도자란 뜻의 번우(番禺)가 왜왕이 였다고 본다. 복건성 동쪽 바다 대만섬 가까이에 팽호(彭湖, 澎湖) 군도가 있다. 남송 (1127년 -1279년)시대에 만든 이름이다. 군도의 밖은 파도 소리가 “팽 펑” 하고 군도 안은 호수 같이 조용하다는 기록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68]
대만해협 서쪽 복건성 포전현(莆田縣) 고향인 정초(鄭樵, 1104년~ 1162년) 가 편찬한 통지 (通志)에는 “馬韓辰韓山井韓弁辰百濟 耽牟羅司 付新羅侯邸戊” 라는 문구가 있다. 변한을 산정한(山井韓)이라 하고, 변진 백제가 탐모라를 신라후 수도로 했다. 삼국지 변진전에 실린 마한 사람이 진왕을 지내다가 후에는 부득히 진한 사람이 진왕이 되었다는 연유로 대륙에 있던 백제를 변진 백제라 했다. 그의 고향 언어로 부여와 고구려 의 후손들을 기록 하여 고구려를 “高旬麗, 包麗國, 舌回旬麗” 등 생소한 이름자로 기록 했다. 또한 “백제 담모라국(百濟耽牟羅國喻)을 설명 했다. 산정한(山井韓)이란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이 생겼다는 기록에 따른 문구다.
백제 위덕왕 (威德王, 扶餘昌: 525년 ~ 598년 ) 때에 수나라가 남쪽에 있던 진나라를 정벌 했다. 수나라 전함이 탐모라국 (𨈭牟羅國)에 표류 되어 (중국 강남에 있던)백제를 통하여(經于百濟) 찾아 갔다. 그는 백제에 친숙(親熟)한 나라란 뜻에 숙모라국 (孰牟羅國)이라 했다. 위징의 탐모라국 (𨈭牟羅國)을 숙모라국 (孰牟羅國)이라 했다. 남북이 천여리(千餘里) 동서가 수백리,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 수서에 실린 “土多麞鹿” 란 문구를 좀더 구체적으로 “土葛屢鹿”이라, 즉 칙과 사슴이 많다고 했다. [69]
이 섬이 제주도가 될수는 없다. 그는 때때로 초두변에 신라와 고려 (薪盧國蒿麗) 를 기록 했다. 왜(倭)자는 실리지 않고, 두쩨 란 뜻의 계(季)자로 풀이 했다. 이는 필자가 니혼(Nihon 日本) 이라 읽는 참 뜻은 하나 둘 (이찌 니)에서와 같은 두쩨 란 뜻이라고 밝힌 바와 같다. [70] 왜왕(倭王)이 다스렸다는 나라 이름 또한 “任鄒加羅泰韓慕韓幻國”, “任部加羅”란 특이한 글자로 기록 했다.
당(唐) 두우(杜佑)가 출처를 밝힌 “隋東蕃風俗記”는 찾을수 없다. 그에 실린 내용 일부를 기반으로 명나라의 진제(明 陳第;1541년-1617년)가 동번기 (東番記)를 편술 한듯 하다. [71] 그 일차 사료를 간략히 설명 한다.
지나(支那) 해안에서 북풍를 타고 하루를 가면 팽호(彭湖)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더 가면 오늘의 타구( 打狗Takau:臺灣高雄市) 해안에 이른다. 대만섬에 살던 남왜북로(南倭北虜) 모두 옛적 상형글자 조적 고전자 (類鳥跡古篆)를 사용 한다. 모든 섬(島)이 (어느나라 때 부터?) 어느 정도 중국의 한 현이 되어 상존 하고 있지만 어찌 풍속의 다름을 억누를 수 있나. 돼지는 식용으로 하나, 닭은 먹지 않고, 닭 깃과 꿩을 잡아 깃발에 단다. 중원 사람들이 닭고기를 먹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섬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라, 배를 사용할줄 모른다. 영락초(永樂;1403-1424년) 에 내시 정화(鄭內監)의 원양 항해에 동번 (東蕃) 사람 만이 참여 하지 않고 도망을 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1598년) 발생 이전, 가청( 嘉靖;1522-1566년)말에 왜가 대만섬을 침략(遭倭焚掠)해서 모두들 산속으로 도망 갔다. 오직 동번(東蕃)만이 조총을 든 왜에 맏서 싸워 왜가 격파 하지 못했다. 그후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 하여 (특산물) 사슴고기 육포와 피각 (鹿脯 皮角)을 중국의 의복을 포함한 여러 산물과 교환했다. 정유재란 (丁酉再亂; 1597년- 1598년)이후 만역 임인(萬曆壬寅; 1603)년에 왜가 또다시 친입 점령 하여 중국과의 교역이 두절 되었다. 오서 심장군이 가서 노고하여 (浯嶼沈將軍往勦) 최후 까지 남아 있던 왜와 해안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결국 왜를 격파하고 해안에 정박 했던 배를 거두어 드렸다.
섬 건너 중원에 있던 나라 “陳書, 隋書”기록과 광주기(廣輿記) 명청(明清) 시대 문헌에는 오서란 글자가 없다. 오서 심장군 (浯嶼沈將軍)이란 [그 섬 산속 깊히 숨어 조용히 살던 자원병 지도자]를 뜻했다. 아니면 진제 (陳第; 1541년-1617년)와 같이 갔던 심유용(沈有容) 장군의 선조로 만든 이름 인듯 하다. 나 오(吾)자에 물수 변을 더한 글자, 오서 (浯嶼)는 진시황이 방사 서시 (方士徐市)의 말을 듣고 산동반도 낭아 (瑯邪)에서 떠나 세신선 들이 사는 봉래산(三神蓬萊山) 에 약초를 구하러 가다 표류 하여 정착 한 우리 선조들의 섬(my island, Our Land)이란 뜻이다. 후세에 가필 수정 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같은 사건을 발생 장소와 인명을 달리 하여 방사 서시 서복 (方士徐市, 徐福)이라 했다. [72] 그러한 전설에 따라 손권 또한 신비의 약을 구하려고 회계에서 바다로 보냈다. 서긍의 고려도경 해도에는 옛부터 전해오던 항로를 기술 했다. 대마도를 지나면서 봉래산을 설명 했다.
이목대미륵 (夷目大彌勒)이 수십명의 동반자를 대리고 찾아 와서헌록 (獻鹿) 괘주(餽酒)하는 종교의식을 하여 희위재해(喜為除害) 했다.
대만섬에는 사슴이 많아 그에 관한 설명이 많이 실렸다. 미륵이 주관한 종교 의식 제례 (祭禮)에 사슴과 술을 썼다. 닭과 꿩을 귀하게 여겼다, 조적 전자를 썼다는 등등의 기록을 보면, 이목 (夷目)이란 맏 백(伯) 자와 같은 뜻으로 동이의 앞날을 내다 보는 지도자란 뜻이다. 대미륵 (大彌勒)이란 금미달 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정신적 지도자 였다.
닭과 꿩을 귀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그들 또한 삼족오를 지상과 영원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체로 인식 했던 고조선 사람들의 후손이란 징표다. 한국에 “꿩 대신 닭, 상여위에 올려 놓은 장닭”이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충청도 부여에 세웠던 미륵사(彌勒寺) 또한 같은 뜻의 미륵이다. 금미달 지역에 전해 오던 고조선 토속 신앙을 이어 받은 사원이였다. 일본의 신도 (神道) 또한 금미달에 있었던 청경신도(淸敬神道) 사원이 시원지다. [73]
왜는 임진 정유왜란 이후에 대만섬을 점령 했었다. 정명가도 (征明假道) 란 명목으로 발생한 임진란 (壬辰倭亂; 1592년-1598년) 때에 명나라로 가는 해상로의 요충지 대만을 조총으로 무장한 왜인이 습격했다.
당 위징(魏徵, 580년 – 643년)이 백제 부용국 대만섬 (Formosa )을 탐모라국(𨈭牟羅國)이라 하고, 제주도를 탐나국 (𨈭羅國)이라 했다. 그가 남긴 탐(𨈭)자는, 귀머거리 또는 섬에 사는 사람들 이란 뜻이 있다. [74] 이를 다른 사람들이 귀가 침침하다는 상형자(耽)로 바꾸어 제주도를 탐라국 (耽羅國)이라고 했다. 중국사람들의 풀이를 따라 삼국사기 또한 탐라가 즉 탐모라(耽羅, 卽耽牟羅) 다 라고 했다. 음이 같은 제주 (濟川)란 이름이 중원에 있었다. 대만에는 북제(대륙백제)의 후손인 발해고씨 (渤海高氏) 사당이 있다. 제주고씨(濟州 高氏)는 (대륙에 있었던) 왜에서 온 탐라국왕 (耽羅國王)의 후손이라 했다.
당 이연수(唐 李延壽; ?년 ~ ?년)가 부친 이대사(李大師; 570年 -628年) 의 유업을 이어 받아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의 역사서 북사와 남사를 백제 멸망 이전 643년 ~ 659년 경에 편술 했다. [75] 신라 왕은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 하고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고 했다. 탐모라국 (耽牟羅國)을 북사에는 백제편에, 남사에는 신라 (新羅)편에 올렸다. 대륙 백제가 중원에서 물러나는 혼란기에, 지나(支那)에서 대만섬 으로 수도를 정했던 신라가 대륙백제로 부터 독립 하던 시기 였다고 본다.
해양권을 독점 했던 대륙백제 부여씨가 한해 서쪽 영역을 모두 잃고 안전한 일본 구주 땅에 자리잡았다. 수서에는 백제를 지나서 구주로 가는 경로; “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 란 문구를 삭제 하고 동쪽 일지국(一支國)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인이 사는 곳이 진수가 남긴 이주(夷洲)인듯 하고, 유구섬 지도자 환사씨 (歡斯氏)의 유래를 알수 없으나 형모가 대륙에서 온 돌궐계통 같다고 했다.
중원세력이 한해를 처음 건넜던 기록이 통전과 태평어람에도 실렸다. 태평어람에서는 수서와 같이 대마도를 “耽牟羅國”, 제주도를 “𨈭羅國”이라 했다. [76] 개황20년(開皇二十年)즉 600년에 왜(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왜에서 보낸 서한에 “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 xx, 云委我弟”란 문구가 있다. 뒤에 왜를 일본(日本)이란 이름으로 바꾼 내력이다.
왜왕 아매다리 사비꼬 (倭王阿每多利思北孤) 가 607년에 수나라에 보낸 서신에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란 모욕적인 문구가 있다. [77]
이를 받은 수나라 왕실은 크게 분노했다. 뒤를 이은 수양제가 608년에 하동군 문히현 (河東郡聞喜縣)사람 배청(裴清)을 시켜 한해 동쪽 해안을 탐험 했다. 고조선 발생지 사람이 한해 동남에 살던 왜와 언어소통이 가능 했던 모양이다. 탐험대가 복건성 북쪽 해안을 떠나 한반도 서남쪽 죽도 (竹島)를 지나 남쪽으로 탐라국을 바라보며 (南望𨈭羅國), 낙동강 하구, 도사마국 (都斯麻國), 즉 백제의 관활 이었던 김해시 금관가야를 지나 구주를 거쳐 유구를 탐험 했다. 태평어람과 같은 시절에 편술된 책부원귀 에는 같은 사건을 기록 하면서 탐라국(𨈭羅國)을 남망 미훈“南望蘼薰”이라 했다. [78] 미훈(蘼薰)이란 [금미달 (今彌達) 에서온 사람들이 쓰던 약초가 나는 곳] 이란 뜻이다. 구주여러 곳을 돌아보고 중국사람과 비슷하여 그곳이 봉래신선(蓬萊神仙) 이 사는 이주 단주 (夷洲及澶洲) 인듯 하지만 확인 할수가 없다고 했다. [79] 일본 사람들이 편술한 유구 역사서에는 아마미 (阿麻彌)섬이 있다. 아마미란 옛적에 신인의 이름이다. 신인이 (하늘 에서) 내려 왔다는 높은 산을 아마미 악 (阿麻美嶽) 이라 했다. [80]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어음을 음차한 글자다.
부여의 후손이 다니던 한해 연안에는 진시황이 불사초를 구하려고 젊은 이들을 보냈다는 봉래산이 한해의 동서 연안 여러 곳에 나타났다. 송나라 황제에게 보고한 고려 도경에는 봉래산이 대만섬에 있다고 했다. 대만섬 북쪽에는 가라산 (加羅山)에 가라호 (加羅湖) 가 있다. 이를 고려도경에는 봉래산이라 했다.
신주(神舟)와 6척의 객주(客舟) 8척의 배가 1122년 여름 5월에 절강성 주산시(浙江省舟山市)에서 출 항 했다. 그 앞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초보(招寶)산 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항주만을 나와 북풍을 타고 대만섬 에 이르렀다. 깊은 산기슭 속에는 소량(蕭粱 )이 세운 보타원(寶?院)이 있고 그 절에는 영감관음(靈感觀音)이 있다. 옛날 신라 (新羅)의 상인이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그곳 관음상을 파내어 자기 나라로 싣고 돌아가려고 바다로 나갔더니 암초를 만나 배가 달라 붙고 전진하지 않았다. 대만섬 서쪽 해안 송백만 (松栢灣抵蘆浦)에 정박 했다. 그 후 봉래산(蓬萊山) 을 돌아 한국 영해에 있는 죽도(竹島)에서 하루 쉬고 군산도로 올라 갔다. [81]
이렇게 대만섬은 신라와 관계가 있고, 신선이 사는 봉래산이 있는 전설을 기록으로 남겨 황제에게 제출 했지만, 후에 편찬된 24사중의 하나인 명나라 역사서에는 산동 반도 북쪽 해안에 봉래산이 있다고 기록 했다.
원인은 위징이 수나라 역사서에 모(牟)자 하나를 삭제 하여 탐라(耽羅國) 와 탐모라 (𨈭牟羅國)로 기록한 두 섬을 후세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했다. 그 후에 이연수가 같은 섬을 백제 또는 신라로 기록해서 나타났다. 이러한 연유로 대만섬 (臺灣島 Formosa)을 제주도 (濟州島)로 풀이 했다. 남송 (南宋; 1127년-1279년)시대 편술된 속박물지(續博物志)와 고려도경에는 대미륵 (大彌勒)이 다스리던 대만섬의 남왜북로(南倭北虜)를 왜 진여국 (倭辰餘國), 즉 왜와 남아 있던 진한 사람들이라 했다. 통일 신라 이후에도 지나와 대만섬에 있던 신라 사람들과 계속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다.
책부원귀에는 한해의 동서남북 5 섯 곳에 있던 백제의 성도를 설명 했다. 구지봉(久知下城)이 있는 김해시와 탐모라국(眈牟羅國), 즉 대만섬을 백제 영역이라 하고, 죽도를 지나 남쪽으로 미훈“蘼薰”을 바라보며 낙동강 하구 김해 (都斯麻國)에 이르렀다란 기록이 [대만이 제주도로 잘못 인식된] 원인이 되었다.[82]
현제 논란이 되는 정화(鄭和)가 지나 갔던 남사군도(南沙群島)를 중국 공산당 에서는 제주도에 붙였던 글자 남마훈 (南蘼薰)이라 바꾸었다. [83]
통일 신라 시대 백제(濟)의 주(州)군현 이름을 바꾸어 제주(濟州)란 이름이 나타났다. [84] 고려시대 삼별초란 이후 원나라의 요청으로 탐라(耽羅, 涉羅) 를 제주도 (濟州島)로 바꾸었다.
겨울 동 결 결론:
중원에 있었던 신라(新羅)의 발생 이전(移轉)유래를 간락히 살펴 보았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해안을 따라 동남아로 흐터져 갔던 사람들이 남방 불교를 한해 동쪽에 퍼뜨렸다. 해안을 따라 뱃길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던 대만섬 (Formosa)에 백제와 신라 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임진란 때에 살았던 복건성 사람이 남겼다. 이러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남아 있지만 [금미달을 떠난 고조선 부여 삼한의 후손들이 상주 했던 근거를 무시 하고] 대만을 추장이 다스리던 나라, 추방(酋邦)이라 하고 그 기원을 알수 없다고 한다. 서구 세력이 교두보를 정하기 전 까지를 선사 시대 “Prehistoric Period”라 한다. 상형글자를 만들었다는 창힐(倉頡) 이전에, 동번(東蕃) 이라한 대만섬에 살던 사람들은 거루 선인 (佉樓仙人) 이 쓰던 글자와 비슷한 조적고전 (類鳥跡古篆) 자를 썼다. 남사에 신라는 “무문자 각목위신 (刻木為信) 이라 했다. 같은 표현이 오환 선비족의 풍속에도 나타났다. [85]
원시 불교 발생과 전래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금미달 지역 사람들이 동남아 전역에 흐터져 살았다. 그들이 쓰던 언어가 동남아 원주민의 언어와 교합 하여 “Austronesian languages”란 이름이 나타났다. 앞으로 언어 학자를 포함한 모든 인문사회 과학 분야 사람들과 함께 깊히 연구 해야 할 소재다.
서양 사람들이 대만에 기지를 구축 하기 전에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倭)인 이 대만을 침략 했다. 일본 사람들은 대만섬에서 싸운 전쟁 설명에 나오는 미 예(彌 禮)란 글자 앞에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는 뜻이 있는 글자에 침“忱, 枕”자를 붙여] 대만섬을 침미다례 (忱(枕)彌多禮) 로 바꾸어 가상인물 신공 황후 편에 올렸다. 이를 현제 임나 일본부설 (任那 日本府)을 주장 하는 일본 사람들은 한반도 서남 땅끝으로 풀이 한다. [86]
끝
Appendix: 조선 태종(太宗) 2년(1402년)에 제작된 강리도 (疆理圖)는 현재 전하지 않고 일본에 필사본 2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87]
疆理圖
임진란의 주동자는 옛적 열도 백제의 중심이었던 일본 구주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방 항로를 잘 알고 있었다. 신라 후기 해상왕 장보고의 뒤를 이은 바다의 사나이들이 후에 왜구가 되었다. 해양권을 장악 했던 부여의 후손이 활거하던 해안이 왜구의 활동 해역이 었다.
금미달 (今彌達)에서 내려와 지나(支那)에 남아 있던 부여의 후손들에게 객가 (客家)란 이름이 붙었다. 통일 신라 이후에도 해상로를 통하여 지나 (支那)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그때 나타난 아리랑과 신라 향가에 남방 언어와 골품제 불교신앙이 나타났다. [88] 해초 스님이 선조들이 지나온 길을 따라 뱃길로 동남아를 거처 천축국과 서역을 돌보고 돈황을 지나 신라의 발상지 금미달에 돌아와 그곳에 있는 오대산에서 입적 했다. [89]
객가(客家, Hakka)어 분포도
福爾摩沙 – Wiktionary, the free dictionary
October 4, 2023. Edited October 8th , October 17th, 23rd 2023
From McLean, Virginia.
보충 자료
史記 -> 列傳 -> 刺客列傳: 荊軻顧笑舞陽,前謝曰:「北蕃蠻夷之鄙人,未嘗見天子,故振慴。」
燕丹子 -> 卷下: 西入秦,至咸陽,國中庶子蒙白曰:「燕太子丹畏大王之威, 今奉樊於期首與督亢地圖,願為北蕃臣妾。秦王喜。百官陪位,陛戟數百,見燕使者。軻奉於期首,武陽奉地圖。
창해군이 있던 곳을,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 즉 진수와 장화는 조선을 “州鮮國, 為鮮國” 라고 기술 했다. 장화는 금미달 지역 태생이다. 처음으로 기자가 연 나라를 벌(其後伐燕)하고 조선에 돌아와 바다로 도망 가서 위 선국(為鮮國)이 라고 왔다.[9] 한서에 북방에는 호(胡)가 살고 조선이 바다안에 있다는 표현과 같은 뜻이다.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 황하 하류에 이르는 늪지대가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왜인들이 살던 곳이다. [10] 진수가 단석괴(檀石槐;137 ~ 181)에 관한 설명을 할때 나타난 한인(汗人) 이 망으로 생선을 잘 잡는다는 곳이다. 왜인들이 살던 곳을 한국 (汗國)이라 했다. 삼국지 왜인전과 후한서 에서는 한(汗)자를 왜로 바꾸어 왜인 (倭人) 왜인국 (倭人國)이라고 기록 했다. 이러한 사실을 한서에서는 조선이 바다 안 (朝鮮在海中) 에 있다. 옛적에 공자가 동이 땅에 가서 살로 싶다 하던 사람들이 바다 속에 있는 왜인 (海中有倭人) 이라고 기록 했다. [11]
동한 말기(靈帝和光元年; 177 년)에 해변에서 관(coffin)을 구했더니 살아있는 사람이 나와 (我伯夷之弟孤竹君也) 나는 백이의 동생 고죽군이다” 라고 했다. 이는 여러 경외서 (經外書)문헌에 실렸다. 금미달에 살던 사람들이 발해만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12] 장화의 박물지(博物志) 에는 倭 자가 없다. 한인(汗人, 韓人), 즉 조선(朝鮮)인 삼한 사람들을 왜인 (倭人)으로 둔갑 시켜 동북아시아 한해의 동쪽 연안 사람들이 싸우게 만들었다.
12]. 博物志: 大宛國有汗血焉,天馬種。漢魏西域時有獻者. 靈帝和光元年,遼西太守黃翻上言:海邊有流尸,露冠絳衣,體貌完全。後翻感夢云,我伯夷之弟孤竹君也,海水壞吾棺郭,求見掩藏。民有襁褓視者,無疾而卒.。
대만섬에 살던 남왜북로(南倭北虜) 모두 옛적 상형글자 조적 고전자 (類鳥跡古篆)를 사용 한다.
南齊書:魏虜,匈奴種也,姓托跋氏。
高璉年百餘歲卒。隆昌元年,以高麗王樂浪公高雲為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建武三年, 〈 原闕 〉 報功勞勤,實存名烈
高璉年百餘歲卒。隆昌元年,以高麗王樂浪公高雲為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
南宋 林登(1163~1189) 의 續博物志 에 (倭辰餘國)라 橫書或左書或結繩或鍥木 했다.
梁書 -> 檢索 “樂浪公”: 高雲
高麗王高雲進號. 高麗王高雲為撫東大將軍
子雲,齊隆昌中,以為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 征東大將軍 樂浪公。高祖即位,進雲車騎大將軍。天監七年,詔曰:「高驪王樂浪郡公雲,乃誠款著,貢驛相尋,宜隆秩命,式弘朝典。可撫東大將軍
北史 | 5 |
日本國志 | 1 |
三國志 | 13 |
梁書 | 7 |
資治通鑑 | 5 |
南史 | 6 |
晉書 | 10 |
魏書 | 13 |
南齊書 | 1 |
十六國春秋 | 20 |
고려도경
. 왜(倭)ㆍ진(辰) 등 나머지 나라들을 살펴보면, 혹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과 맞가는
남사
續博物志 -: 蜀蠻卭部川都王蒙備死氣未絶其妻子以錦數疋相續繫死者曵之於地置十數里外高山上令氣絶乃復以錦被裹而埋之㑹其族哭之名作鬼親守近州蠻人說其事倭辰餘國或橫書或左書或結繩或鍥木唯高麗摹冩頴法取正中華
燕惠懿帝高云(4世纪—409年11月6日),曾改名慕容云,字子雨,高句丽人。十六国时期后燕末代君主,一说为北燕开国国主,称号天王。
[1].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 《說文》日初出東方暘谷,所登榑桑若木也 榑桑,神木,日所出也. 杻一名檍, 今宮園種之,名萬歲木” “桑”은 약(若)으로香草名,即杜若北海海神名. 暘:日出也。从日昜聲。 《虞書》曰:「暘谷。」日初出東方湯谷,所登榑桑,叒木也。象形。凡叒之屬皆从叒.
[3].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4]. 韓詩外傳 : 孔子學鼓琴於師襄子而不進. 孔子家語 辯樂解: 孔子學琴於師襄子.
[5].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새로운 고찰: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 康熙字典 藍:染靑草也。《詩·小雅》終朝采藍。《通志》藍三種:蓼藍染綠,大藍如芥染碧,槐藍如槐染靑。三藍皆可作澱,色成勝母,故曰靑出於藍而靑於藍。又《古今注》燕支,中國人謂之紅藍。又《說文》瓜苴也。又《酉陽雜俎》藍蛇,首有毒,尾能解毒,南人以首合藥,謂之藍藥。又鳥名。《爾雅·釋鳥》秋鳸,竊藍。《註》竊藍,靑色。又濫也。《大戴禮》文王官人,藍之以樂,以觀其不寧。又地名。《晉語》三卿宴于藍臺。《水經注》新河出令支縣之藍山。《杜甫詩》藍水遠從千㵎落。又《綱目集覽》伽藍,梵語,猶中華言衆園。《通志·氏族略》戰國時中山大夫藍諸。
[7]. 홍범구주(洪範九疇 ) 이윤유서(彝倫攸敘)의 뜻: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8].毛詩正義:《禹貢》注云:「陽鳥,鴻雁之屬,隨陽氣南北。」不言陰者,以其彭蠡之澤近南恆暖,鴻雁之屬避寒隨陽而往居之,故經云「陽鳥攸居」,注釋其名曰陽鳥之意, 故不言陰耳。
[9]. 부여의 시말: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0]. Sinja Valley – Wikipedia.
[11]. 太平廣記 幻術一 天毒國道人: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問其年,云。百四十歲。荷錫持瓶,云。發其國五年,乃至燕都。喜衒惑之術。於其指端, 出浮圖十層,高三尺,乃諸天神仙。巧麗特絕。列幢蓋鼓舞,繞塔而行,人皆長五六分,歌唱之音,如真人矣。尸羅歕水為雰霧尸羅歕水為雰霧。闇數里間。俄而復吹為疾風,雰霧皆止。又吹指上浮圖,漸入雲裏。又於左耳出青龍,右耳出白虎。直入於口內。復以手抑胷上。而聞衣袖之中,轟轟雷聲。更張口。則向見羽蓋螭鵠。相隨從口中而出。尸羅常坐日中,或化為老叟,或變為嬰兒,倏忽而死,香氣盈室,時有清風來,吹之更生,如向之形。呪術衒惑。神怪無窮。
[12]. 大唐西域記:釋梵窣堵波前。是蓮華色苾芻尼欲先見佛化作轉輪王處。如來自天宮還贍部洲也。時蘇部底唐言善現。舊曰須扶提。或曰須菩提。皆訛也宴坐石室.凈飯王太子捨轉輪王位。悲愍六趣苦行六年。證三菩提具一切智。是吾師也. 全唐詩: 帝作轉輪王,師為持戒尊.
[13]. 史記 蘇秦列傳: 且夫秦之攻燕也,踰雲中、九原,過代、上谷,彌地數千里,雖得燕城,秦計固不能守也. 戰國策 燕策 :且夫秦之攻燕也,逾云中、九原,過代、上穀,彌地踵道數千里.
[14]. 史記 秦始皇本紀: 車同軌。書同文字。地東至海暨朝鮮,西至臨洮、羌中,南至北向戶,北據河為塞,并陰山至遼東. 史記 平準書、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戰國策 : 北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 方言 : 燕代朝鮮洌水之間曰盱.
[15]. 博物志: 箕子居朝鮮,其後伐燕,復之朝鮮,亡入海,為鮮國. 漢書:「南戍為越門, 北戍為胡門。」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三國志 : 弁辰亦十二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冉奚國、弁辰半路國、 弁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 三國志 倭人傳: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
[16]. 廣韻: 餘:殘也,又姓晉有餘頠又漢複姓三氏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廣韻 廢 穢: 濊: 濊貊夫餘國名或作獩䫉又汪濊。 扶余国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17]. 史記 殷本紀 :得說於傅險中。是時說為胥靡, 筑於傅險。見於武丁, 武丁曰是也。 得而與之語 果聖人,舉以為相,殷國大治。故遂以傅險姓之,號曰傅說。呂氏春秋: 傅說,殷之胥靡也.
[18]. 佛學大辭典/文殊 –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wikisource.org) Mañjuśrī,文殊師利之略,舊稱文殊師利,滿殊尸利,新稱曼殊室利。佉:《內典》薄佉羅,卽月支也。又人名。《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其書下行。又佉沙國,卽疏勒也。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三國遺事 :慈藏法師西學。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文殊又云。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然以山川崎嶮故。
[19].We Need Another Voice. Taoism to Zen Buddhism. by Mosol Don S. Lee MD. Xlibris. April 11, 2023. Chapter 4: Birth of Buddhism and Spread. Epilogue: Geum Midal (今彌達) to Mireuk (彌勒) Faith.
[20]. 논란이 많은 여러 가야의 실체.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1]. 通典 鹽鐵: 管子曰:「海王之國,海王者,言以負海之利而王其業。」康熙字典: 《前漢·地理志》薊南通齊趙勃碣之閒。《註》師古曰:勃,勃海也. 㔜:《字彙補》同勃. 法苑珠林: 八叄磨濕嚩娑羯囇十九㔜𠴻㔜𠴻二十悉𠴻悉𠴻.
[22]. Etymology of Three Hah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3]. 三國史記 : 史勿縣進長尾白雉,王嘉之,賜縣吏穀.炤知麻立干 加耶國送白雉,尾長五尺。
[24]. 通典: 北齊亦有儀同三司者, 任城王湝等諸王多為之。湝戶皆反。水經注 濟水:「黃水又東南逕 任城郡之亢父縣故城西,夏后氏之任國也。漢章帝元和元年,別為任城在北,王莽之延就亭也
太平廣記 女仙三 魏夫人:魏夫人者,任城人也。晉司徒劇陽文康公舒之女,名華存,字賢安.
[25]. 十六國春秋 “涿鹿”: 悉羅騰字叔龍范陽涿鹿人也. 酈紹范陽涿鹿人也仕寶濮陽太守 魏太祖 定中山以郡迎降。盧偃范陽涿鹿人也父諶晉司空劉琨從事.魏書 悉羅:時鮮卑在城者猶有千餘人,暐令其帥悉羅騰、 屈突鐵侯等潛告之曰: 「官今使吾外鎮,聽舊人悉隨。可於某日會集某處。」
[26].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새로운 고찰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7]. 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 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儁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并齎詔賜金,倭王因使上表荅謝恩詔.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二: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28].九尾狐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逸周書 王會解: 麃麃者,若鹿迅走 青丘狐九尾. 郁離子: 青邱之山,九尾之狐居焉. 吳越春秋 :乃有白狐九尾造於禹。禹曰:「白者, 吾之服也。其九尾者,王之證也。塗山之歌曰:『綏綏白狐,九尾痝痝。 我家嘉夷, 來賓為王。
[29]. 康熙字典韓:《正韻》河干切。《說文》井垣也。幹聲。又國名。《詩·大雅·韓奕箋》韓,後爲晉所滅, 故大夫韓氏以爲邑名。 曲沃桓公之子萬,食邑于韓,後分晉爲國。 三韓,國名,辰韓, 弁韓,馬韓也。《韻會》秦滅韓,以國爲氏。《說文》本作𩏑。《集韻》亦作榦幹。考證:〔又三韓,國名,辰韓,示韓,馬韓也。見《後漢·光武紀》。〕謹按示韓當作弁韓,見後漢書東夷傳,光武紀本文無之。謹將示改爲弁。光武紀改東夷傳。
[30]. 康熙字典 藍:染靑草也。《詩·小雅》終朝采藍。《周禮·地官·掌染草註》染草藍、蒨,象斗之屬。 《通志》藍三種:蓼藍染綠,大藍如芥染碧,槐藍如槐染靑。三藍皆可作澱,色成勝母,故曰靑出於藍而靑於藍。又《古今注》燕支,中國人謂之紅藍。又《說文》瓜苴也。又《酉陽雜俎》藍蛇,首有毒,尾能解毒,南人以首合藥,謂之藍藥。又鳥名。《爾雅·釋鳥》秋鳸,竊藍。《註》竊藍,靑色。又濫也。《大戴禮》文王官人,藍之以樂,以觀其不寧。又地名。《晉語》三卿宴于藍臺。又山名。《水經注》新河出令支縣之藍山。《杜甫詩》藍水遠從千㵎落。又《綱目集覽》伽藍,梵語,猶中華言衆園。《通志·氏族略》戰國時中山大夫藍諸。逸周書 王會解:揚州禺,禺,魚名,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迅走,俞人雖馬,青丘狐九尾,青丘狐九尾 北唐以閭,閭似隃冠。
[31]. 백익(伯益)의 업적: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2]. 康熙字典 假:借也。因也。《爾雅·釋詁》假,大也。 《詩·大雅》假哉天命。又北假,地名。 《史記·秦始皇紀》使蒙恬渡,取高關陶山北假中。又與嘉同。《中庸》作嘉。《毛傳》假,嘉也。與遐通。《揚子·法言》假言周於天地,贊於神明。《註》假作遐。康熙字典 倭:《玉篇》音煨。《說文》順貌。《師古註》魏略云:倭在帶方東南大海中,依山島爲國。度海千里,復有國,皆倭種。
[33]. 康熙字典 倭:《玉篇》音煨。《說文》順貌。又倭遲,回遠貌。《詩·小雅》周道倭遲。與逶迤,𨖿迆,委蛇,威遲,委移𠀤通。《師古註》魏略云:倭在帶方東南大海中,依山島爲國。度海千里,復有國,皆倭種。詩經 鹿鳴之什 四牡: 四牡騑騑、周道倭遲. 論衡 : 周時天下太平, 越裳獻白雉, 倭人貢鬯草。 食白雉,服鬯草,不能除凶, 金鼎之器, 安能辟姦?且九鼎之來,德盛之瑞也.
[34].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3: 왜 왕실의 역사-3: 가왜왕 (假倭王)의 뜻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孟子 萬章上:百里奚,虞人也。晉人以垂棘之璧與屈產之乘, 假道於虞以伐虢。宮之奇諫,百里奚不諫. 史記 晉世家:使荀息以屈產之乘假道於虞。 虞假道,
遂伐虢,取其下陽以歸.晉復假道於虞以伐虢。虞之大夫宮之奇諫虞君曰:「晉不可假道也,
[35]. 康熙字典: 太平御覽 新羅. 梁書: 新羅者. 新羅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36]. 三國志: 倭人傳: 於羅屬大秦,渡河,從於羅東北又渡河,斯羅東北又渡河。斯羅國屬安息, 與大秦接也。 河水西南北行有大山, 西王母西有脩流沙, 流沙西有大夏國, 堅沙國, 屬繇國, 月氏國, 四國西有黑水, 所傳聞西之極矣。水經注 : 河水南逕北屈縣故城西, 西四十里有風山, 上有穴如輪。 《漢書·西域傳》曰:釋法顯所謂糺尸羅國。漢言截頭也。 佛為菩薩時,以頭施人,故因名國。 是阿育王子法益所治邑。佛為菩薩時,亦于此國以眼施人,其處亦起大塔。又有弗樓沙國,天帝釋變為牧牛小兒,法王因而成大塔。《姓氏急就篇》羅氏,顓頊後,封于羅,今房州也。
[37]. 尸羅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ctext.org): Śila,又云尸怛羅,正譯曰清涼,傍譯曰戒。 身口意三業之罪惡,能使行人焚燒熱惱,戒能消息其熱惱,故名清涼。舊譯曰性善。大乘義章一曰:「言尸羅者此名清涼,亦名為戒,三業之非,焚燒行人,事等如熱。戒能防息,故名清涼。清涼之名,正翻彼也。:「尸羅梵語,此言清涼。」華嚴玄談三曰:「或名尸羅:「尸羅秦言性善,好行善道不自放逸,是名尸羅。」。太平廣記 幻術 天毒國道人: 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 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 問其年云。百四十歲。乃至燕都。 喜衒惑之術。 於其指端,出浮圖十層,高三尺,乃諸天神仙。尸羅歕水為雰霧。俄而風至雲起,即龍虎皆入耳中。尸羅常坐日中 《姓氏急就篇》羅氏,顓頊後,封于羅,今房州也。
[38].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二: 百濟襲破國西二城. 復國號新羅. 新羅本紀第三 :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何耶?」荅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今焉得同.
[39].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황금보검에 얽힌 사연: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40]. 廣韻 歌 羅:羅綺也,古者芒氏初作羅.爾雅鳥罟謂之羅,又姓出長沙本自顓頊末𦙍受封於羅國 今房州也,爲楚所滅子孫以爲氏. 水經注 河水: 河水南逕北屈縣故城西,西四十里有風山, 上有穴如輪,風氣蕭瑟,習常不止. 河側有兩山相對,水出其間,即上河峽也,世謂之青山峽。
[41]. 晉書: 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晉安郡 太康八戶配年干班純縣百原豐新羅宛平同安侯官羅江巫宴溫麻. Wikipedia: 西晉太康三年(282年)分建安郡置晉安郡,治所在侯官縣(今福建省福州市)
[42]. 三國史記 列傳第六 :馬韓則&高麗高句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高句麗、 百濟,全盛之時,強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為中國巨●。隋皇失馭,由於征遼。致遠自西事大唐,東歸故國,皆遭亂世,屯●蹇連. 最後,帶家隱伽耶山海印.
[43]. Etymology of China Part II 南詔. 운남성에 있던 支那皇帝가 Cina 의 어원이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全唐詩補編: 外編 第一編 補全唐詩: 唐明皇 題梵書: 毫 鶴 立蛇形勢未休,五天文字鬼神愁。支那弟子無言語,穿耳胡僧笑點頭
[44]. 元史 :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
[45]. 太平廣記 蠻夷二 : 新羅國。東南與日本隣.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 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又近有海客往新羅,次至一島上。滿地悉是黑漆匙筯。其處多大木。客仰窺匙筯.
[46]. 晉書: 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彊盛。冊府元龜 : 晉張華為都督 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強盛。
[47]. 梁書: 海南諸國, 大抵在交州南及西南大海洲上. 相去近者 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 其西與西域諸國接.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其俗 呼城曰 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其拜及行與高驪相類。無文字,刻木為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48]. 三國史記 : 史勿縣進長尾白雉,王嘉之,賜縣吏穀.炤知麻立干 加耶國送白雉,尾長五尺。
[49]. 三國史記 : 威德王,諱昌,聖王之元子也。二十四年秋七月,遣使入陳朝貢。冬十月, 侵新羅西邊州郡,新羅伊●世宗帥兵,擊破之. 三十六年,隋平陳。有一戰船,漂至耽牟羅國, 其船得還,經于國界,王資送之甚厚,幷遣使奉表,賀平陳.
[50].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 經于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 百濟。
[51]. 陳書 : 齊遣使來聘. 遼東、新羅、丹丹、天竺、盤盤等國並遣使獻方物.
[52].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53].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 檢索 “船: 于山國歸服,𡻕以土宜為貢。于山國在溟州正東 海島, 或名欎陵島. 乃多造木偶師子,分載戰船,抵其國海岸. 五年春,始置船府署,大監、弟監各一貟.
[54].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臣等以為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為國號,宜矣. 乃多造木偶師子,分載戰船. 法興王立。諱原宗,《冊府元龜》姓募,名泰。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八年,遣使於梁貢方物. 泗河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55]. 三國遺事: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真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부여 왕흥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56].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 經于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 百濟。 三國史記: 王以耽羅不修貢賦,親征,至武珍州。耽羅聞之,遣使乞罪,乃止。耽羅,卽耽牟羅
[57]. 三國史記: 諱牟大或作摩牟摩帝。文周王弟昆支之子.靺鞨襲破漢山城,移都於泗●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冬十月,王不知梁京師有寇賊,遣使朝貢。使人旣至,見城闕荒毀,●號泣於端門外,行路見者,莫不灑淚。侯景聞之,大怒,執囚之。及景平,方得還國. 梁書: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58]. 梁書 – 卷第五十六列傳第五十 侯景. 백제 수도 거발성(居拔城)은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59]. 南齊書 :詔可,並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 使兼竭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戲!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滄路肅澄,要貢無替。式循彞典,用纂顯命。往欽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
[60]. 通典 新羅: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 金姓相承三十餘葉。 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 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 其先附屬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人不堪戎役, 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 滅之。
[61]. 文獻通考: “牟羅”: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國小不能自通使聘。苻堅時,其王樓寒遣使衛頭朝貢,堅曰:「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何也?」答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今焉得同。」梁武帝普通二年,王姓慕名秦,始使人隨百濟獻方物。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喙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喙評、五十二邑勒。土地肥美,宜植五穀,多桑麻果菜鳥獸,物產略與華同。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相承三十餘葉,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閒易姓之由,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先附屬於百濟。無文字,刻木為信,語言待百濟而後通
[62]. 옥새(玉璽)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3]. 삼신산 불로초의 대명사 영지버섯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4]. 隋書 真臘國: 在林邑西南 本扶南之屬國也。去日南郡舟行六十日, 而南接車渠國, 西有朱江國。
其王姓剎利氏,名質多斯那。自其祖漸已強盛,至質多斯那,遂兼扶南而有之。死,子伊奢那先代立。居伊奢那城,郭下二萬餘家。總大城三十,城有數千家,各有部帥,官名與林邑同。
[65].水經注 江水:晉咸和中,庾翼為西陽太守,分江夏立,豫州刺史毛寶、西陽太守樊俊共鎮之,為石虎將張格度所陷,自爾丘墟焉。城南對蘆洲,舊吳時築客舍于洲上,方便惟所止焉,亦謂之羅洲矣. 元稹著 全唐詩 陽城驛: 公方伯夷操,事殷不事周。我實唐士庶,食唐之田疇.
我聞天子憶,安敢專自由。來為諫大夫,朝夕侍冕旒. 今來過此驛,若吊汨羅洲。
[66]. . 三國志 陸遜傳:陸遜字伯言,吳郡吳人也。本名議,世江東大族.權欲遣偏師取夷州及朱崖,皆以諮遜,遜上疏曰:「臣愚以為四海未定,當須民力,以濟時務。」한해 따라 二萬里-5: 누가 언제 한해를 처음으로 건넜나-보충: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7]. 백제 수도 거발성(居拔城)은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8]. 澎湖縣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康熙字典 :澎:澎濞,水貌。 一曰水聲。又《廣韻》薄庚切《集韻》蒲庚切,𠀤音彭。縣名,在東海。一曰擊水聲
[69].通志 卷一百九十四:隋開皇初昌仍修歲貢墓啼拜昌上開府帶方郡公互濟王平陳墓戲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其船得還經于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奉表賀平陳文帝善之下詔曰彼國懸隔來往至難旬.新羅有隙每拘戰宰十年復遣使朝貢後天下亂使命遂絕其南海待河月有孰牟羅國南北千餘里南西數百里土葛屢鹿附庸於百濟西行三日至貂國千餘里云
[70].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 Preface. 임나가라(任那加羅)설의 새로운 고찰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71]. 東番記 –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wikisource.org) 陈第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72]. 史記 秦始皇本紀: 還過吳,從江乘渡。并海上,北至瑯邪。方士徐市等入海求神藥, 數歲不得,乃詐曰:「蓬萊藥可得. 史記 淮南衡山列傳:使徐福入海求神異物,還為偽辭曰:『臣見海中大神,言曰. 說文解字:出琅邪靈門壺山,東北入濰。从水吾聲。
[73].We Need Another Voice. Taoism to Zen Buddhism. by Mosol Don S. Lee MD. p 203. Epilogue
[74]. 《康熙字典·身部·五》𨈭:《玉篇》俗聃字。《干祿字書》𨈭,通聃。《篇海》亦作𨈜𨈭: 《玉篇》俗聃字。《干祿字書》𨈭,通聃。《篇海》亦作𨈜.
[75]. 진서(晉書)를 논한다-1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남제서(南齊書)에 나오는 조선태수(朝鮮太守)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76].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
[77]. 康熙字典 𨈭:《玉篇》俗聃字。《干祿字書》𨈭,通聃。《篇海》亦作𨈜
[78]. 冊府元龜 :裴清為文林郎煬帝遣清使於倭國渡百濟行至竹島南望蘼薰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東至月支國。又至竹斯國。又至東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
[79].南薰礁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Gaven Reefs – Wikipedia.
郑和群礁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80].南島志:大島。島在德島東北十八里,琉球北界也。續文獻通考所謂琉球北山是也。 國史所謂阿麻彌島,或作菴美,或作奄美,並皆謂此。阿麻彌者,上世神人名也。其東北有山,乃神人所降,因名曰阿麻美嶽。島亦因得此名。地形稍大,後稱以為大島。
[81].원명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원문 해석 (tistory.com) 宣和奉使高麗圖經 卷三十四: 西北風勁甚使者率三節人以小舟登岸入梅岑舊云梅子真棲 隠之地故得此名有履迹瓢痕在石橋上 其深麓中有蕭梁所建寳陁院殿有靈感觀音昔新羅賈人往五臺刻其像欲載歸其國暨出海遇焦舟膠不進乃還置像於焦上院僧宗岳者迎奉於殿自後海舶往來必詣. 舟行過蓬萊山之後水深碧色 如玻璃浪 勢益大洋中有石曰半洋焦舟觸焦則覆溺故篙師最. 觀夫倭辰餘國或橫書或左書或結繩為信 或銘木為誌各不同制而麗人乃墓寫隸法取正中華.或左畫。或結繩爲信。或鍥木爲誌。
[82].History of Taiwan – Wikipedia. 臺灣歷史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83].冊府元龜: 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笫且翦愚汕諧嵌方曰:得安城南方曰: 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以子弟宗族分據之。又云:其都曰:居枝城國南海行三月有眈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獐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二日至貊國西南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裴清為文林郎煬帝遣清使於倭國渡百濟行至竹島南望蘼薰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至東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女王國夷洲及澶洲傳言秦始皇遣方士徐福將童男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仙不得徐福畏誅不敢還遂止此洲世世相承有數萬家人民。
[84]. 三國史記 百濟本紀第四 涉羅為百濟所. 耽羅,卽耽牟羅。隋平陳。有一戰船,漂至耽牟羅國, 其船得還. 雜志第六: 右百濟州郡縣,共一百四十七,其新羅改名及今名,見『新羅志』
[85]. 南史: 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無文字,刻木為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通典 烏桓: 烏桓者,本東胡也。大人有所召呼,則刻木為信。氏姓無常,以大人健者名字為姓.
[86].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의 세로운 고찰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日本書紀/卷第九 –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wikisource.org)
[87].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88]. 아리랑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향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헌화가 – 나무위키 (namu.wiki). 도솔가 – 나무위키 (namu.wiki)
[89]. 혜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Phonetic Loan Characters are Gojoseon Language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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