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anghai Commandery(蒼海郡) is Logical Fallacy.
Russian invasion of Ukraine motivates me to write this essay to remind you the history of Northeast Asia.
Once, built up enough ways and means, every dictator took military force to subjugate the neighbors. Ukraine and Russia are similar to Korea and Japan in terms of cultural history. Wei Toyotomi Hideyoshi (豊臣 秀吉,1537 – 1598) of Japan used the word [정명가도 征明假道; provide us the road to China] and invade Korea to destroy the origin of Japan. Putin, who had annexed Crimea few years ago, did the same approach. As signing a decree to recognize the Donbass region of eastern Ukraine as independent nation to justify military action, he built up massive military camp by the Ukraine border and justify invasion as a peace keeping force. We all hope that Putin orders to stop the unjustifiable invasion and merciless killing.
During the early era of Emperor Wu (漢武帝:156 – 87 BC), two merchants went into the Joseon and wiped out. Han set up the Prefecture by the Chang Hae (滄海之郡) under the suggestion of minister Gongson Hong (公孫弘 200 – 121 BCE) but dissolved spontaneously within two years. It was more than ten years before Emperor Wu invaded Wiman Joseon in 109 BC and kill the grandson of Wiman in 108 BC. Though location of the boundary and Capital has been in dispute, Chen-shou called Wanggeom Citadel (王險城) as the Skeleton Capital (骨都) that is the current Chaoyang city 朝陽市) around the Yīwūlǘ Shān (醫巫閭山) in the southwest of Liaoning Province.[1] It is clear. Invader Han took atrocity. The Boundary was a small creek passing through the Shanhai-guan (山海關)by the western shore of Balhae bay. They shieled the first capital Asadal (阿斯達) of Joseon and Wanggeom Citadel (王儉城) which had been in the Shanxi Province. As encountering the southern nemesis, Joseon had moved the capital toward northeasterly direction over thousand years.
The Chinese set the Changhai Commandery in the old capital region of Joseon who sent an envoy to the Yan in the SW of current Beijing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and convinced the king of Yan not to fight. Chinese claim in the Wikipedia is out of common sense both in time and place.
사기 평준서(平準書)와 평진후 주부(平津侯主父) 열전에 창해 (滄海) 란 이름이 처음 실렸다. 처음에 오팽이 조선을 가멸 (賈滅; 돈으로 매수)하여, 공손홍의 제안으로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 했다. 허나 2년 후에 저절로 사라졌다.[2] 평준(平準)와 평진후 (平津侯) 하는 글자에 진실이 남아 있다. 황실의 혈통이 아닌 공손홍이 처음으로 평진후란 작위에 전국시대 말기 조선의 경기지역을 봉지로 받았다.
역사의 흐름을 보면, 전국시대 말기에 옛적 고조선영역은 중원 세력 밖이라, 그에 관한 기록이 혼미 하다. 흉노의 급습으로 기원전 209년에 동호왕 이 살해 되었다. 흉노가 죽인 동호왕 (東胡王)을 진수는 위약 (魏略曰)을 인용하여 삼국지 한전 (韓傳)에 조선왕비(朝鮮王否)라고 밝혔다. 흔히들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만주에 살던 사람들 예기로는 연인 위만이 상투에 (호복이 아닌)동이 옷을 입고 (燕人衞滿, 魋結夷服), 되돌아 와서 (復來王之) 왕이 되었다고 했다. 오늘의 발해만 서안을 따라 남북이 교류가 왕성 했다는 증거다.
오팽이 매멸한 조선은 아들 준(準)이 통치 하던 영역이다.[3] 중원이 전쟁에 시달리는 동안, 고조선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에서 해하 수계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예맥이라 부르던 고조선 사람들이 청진 항구에 모였다가 흐터졌다. 일부는 중원의 동해안을 따라내려가 남이 (擬於南夷) 가 되었다. 사마천은 연제지간에 조용히 살던 사람들 (燕齊之閒) 이 활발해 지기 시작(靡然發動) 했다고 장소와 동기를 밝혔다. 그후 위진시대의 역사 기록을 보면 발해만 서남쪽 해안이 한이 다스리던 바다란 뜻에 붙인 이름, 한해 (翰海)의 관문이 였다. 사마천은 북해 (北海) 라고 했다.[4] 그 곳에 조용히 살던 단군조선의 후예들을 한마(閒靡)라고 했다.
상나라 무정(武丁, 기원전1250-1192년)이 부암 (傅巖) 에서 노예로 일하던 사람을 등용하여 상의 중흥을 이르켰다고 하여 부암에서 구한 즐거움 이란 뜻의 부열 (Buyuel傅說) 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가 기자의 먼 조상이다. 유가 에서는 기자가 무왕의 호의를 차버리고 도망 갔다하여 나뿐 사람(수미 Xumi 胥靡;相也。靡,隨也), 또는 수유, 서여, Xuyu/Suyu 胥餘, 즉 수미 후손 기자 箕子”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 후손의 한부류가 강남에 정착하여 대륙백제의 부여(夫餘)성씨가 되었다.[5]
서주(西周)의 제후국이였던 진(晉) 나라가 산서성에 있었다. 노예들 (고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노예(奴隸) 예성 (隸省) 이라고 했다. 같은 혈통의 한조위 (韓、趙、魏) 세 가문이 싸워 (晉陽之戰: 기원전 455-453년) 삼가분진 (三家分晉) 현상이 기원전403年에 나타 났다. 이때 부터를 전국시대라 한다. 위진 시대 (魏晉時代, 220년 ~ 420년) 혼란기에 옛 위나라의 영역이 었던 곳에서, 비준(不準) 이라는 도굴꾼이 281년에 왕릉을 도굴 하여 죽간과 보물을 발굴 했다. 그 내용은 모두 위나라 역사 었다. 이 자료를 근거로 옛부터 중원에 구전해 오던 우본기(禹本紀)가 모두 위나라의 역사서라는 사실이 밝혀 졌다. 이를 근거로 각종 위나라의 역사서가 나타났다. 그중에 하나가 일연스님이 단군신화의 출처를 밝힌 위서(魏書云)다. 우란 높다는 한국어다. 우본기란 지도자 집안 가첩(家諜;晉之乘) 이다. 음과 뜻을 이리저리 섞어 나타난 이름이 해모수의 햬씨, 고씨, 경씨, 위, 강씨, 최씨 등등 한국 성씨에 많이 있다.[6]
한초삼걸(漢初三傑) 중 하나로 꼽히는 한신(韓信, ? ~ 기원전 196년)을 두 사람으로 풀이 한다. 잘못이다. 장량이 고향 땅에 남아 그를 유후 (留侯)라 했다. 유후장량은 한인이다(留侯張良者,其先韓人也)라 했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 (秦) 나라가 셋을 모두 병합 했다. 선조 대대로 살아 오던 중원의 노른자위 (中國, 韓居中國)의 영역을 진시황에게 빼앗긴 장량이 동쪽 산동성에 가서 천하장사를 얻어 진시황을 살해 하려 했다. 방랑사에서 지나가는 진시황의 마차를 철퇴로 치려다 잘못하여 진시황이 살아 도망 가서 분서갱유 어명를 내렸었다.[7] 한(韓)씨었던 유후는 장(張)씨로 개명 했다. 오늘의 하북성 창주시 (滄州市) 일대가 창해역사 (滄海力士)란 이름의 출처다.
한무제의 제상이었던 하북성 사람 동중서(董仲舒)는 춘추 번로 (春秋繁露) 에서 흐르는 물이 창해에서 만난다(流水之宗滄海)라 했다.[8] 그 시대의 모든 강물 (海河, 黃河)이 창해로 흘러 들어 갔다. 수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발해에 이르렀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고 보냈던 수나라군이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넜다.[9] 창해란 어원의 출처는 발해만 서남쪽 연안이 분명 하다. 한반도 동북해안이 될수 없다. 확실한 증거가 시문에 남아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 (曹操)가 원소 잔당을 소탕하고 돌아 가는 길에 산해관 가까이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에 올라가 읊은 시문이 관창해 (觀滄海)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에 이르렀다. 그도 갈석산에 올라가서 시를 읊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두 군사령관이 같은 곳 같은 계절에 시를 읊었다. 전승장군 조조의 시문은 즐거움과 활기가 가득 하다. 전쟁터로 나가는 당태종의 시문은 밝지 못하고 번민이 숨어 있다. 그를 수행 하던 양사도 (楊師道) 가 읊어 ‘답예로 바친 시문’이 봉화성제 춘일망해 (奉和聖制春日望海)다. 양사도의 시문에는 그 일대 지명이 많이 나온다. 앞에 내려다 보이는 바다를 창해 (滄海)라 했다. 한국상고사 에서 논란이 되는 “청구 (靑丘), 노룡새(盧龍塞),숙신(肅愼), 대방(帶方)” 하는 이름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 지역을 진시황 (秦始皇)의 친 아버지로 알려진, 여불위(Lü Buwei 呂不韋) 가 남긴 여씨 춘추에서는 예인 (穢人) 들의 고향 이라 했다.[10] 태평어람에서도 후한서 내용을 인용 하여 [부여는 본래 맥족의 땅이다. 동명왕을 부여의 시조라 했다.[11] 태고적 부터 조선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 분명 하다.
해하(海河)가 천진시를 지나 바다로 들어 간다. 천진(天津)이란 천손의 항구란 뜻이다. 남방 세력은 노예들의 소유라 하여 직예(直隸)라 했다. 이 곳은 산동성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사회가 혼란해 지면 이 길목을 통하여 남북으로 또는 뱃길로 피란을 갔다.[12].
전국시대 말기에 연의 동쪽에 있던 조선이 대부 예를 서쪽에 있던 연나라에 보네 연왕을 설득 하여 (使禮西說燕)전쟁이 나지 않았다는 전국시대 말기의 조선 땅에 창해군이 있었다.[13]
왜? 누가 바꾸어 허위 선전을 하나?
사마천이 기록한 평준서(平準書)에는 보이지 않았던 문구가 한서(漢書)와 전한기 (前漢紀)에는; <예맥군 또는 동이 예맥군 남여 (穢貊君南閭, 薉君南閭)라는 지도자 이름이 나오고, 그가 280,000명을 인솔하고 요동에 들어 와살았다. 후한서에는 남여가 인솔하고 온 280,000명이 요동에 내속 (遼東內屬) 했다>고 한다.
또한 공손홍을 다룬 사기(史記) 평진후 주부 열전에는, 사마천이 죽은 뒤에 나타난 원제(漢 元皇帝: 기원전 76년 ~ 기원전 33년)의 황후와, 한서의 저자 반고가 이르기를 (班固稱曰) 하는 문구가 있다.[14] 이는 흉노 김일제 (金日磾, BC 134년 ~ 86년)의 후손 공손도 (公孫度, ? ~ 204년) 를 천진 나루터 일대를 평정 하여 바쳤다는 뜻의 평진 헌후 (平津獻侯) 공손홍(公孫弘)의 후손으로 바꿔치기 위한 모락의 시초다. [15]
서쪽 감숙성에서 잡힌 김일제(金日磾, 134-86 BC)의 후손이 전후한 혼란기에 해하(海河), 즉 영정하(永定河) 옛적 조수 (澡水) 수계에 올라 왔다. 그 곳에서 백제 시조 온조왕의 형 비류왕의 후손과 고구려 왕자 발기(拔奇) 세력을 흡수하여 정착했다.
진수가 단석괴(檀石槐)에 관한 설명을 할때 나타난 한인(汗人) 이 망으로 생선을 잘잡는다는 소식을 듯고 그들이 살던 곳 한국(汗國)이라 했다. 후한서 에서는 왜인 (倭人) 왜인국(倭人國)이라고 바꾸어 기록 했다. 왜인들이 살던 곳이 옛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 황하 하류에 이르는 늪지대 였다.[16] 이러한 사실을 한서에서는 조선이 바다 안 (朝鮮在海中) 에 있다고 기록 했다.[17] 온조형 비류가 정착 했다는 대방 고지 미추홀(彌鄒忽)이 있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임나 가야, 미추성(彌鄒城), 양평, 염전의 북쪽” 이라고 실렸다. 이곳이 “신라, 백제, 가야 연맹, 왜라 부르던 사람들”의 옛 고향 이다.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할 당시 벌써 고조선 유민들이 여섯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는 곳이 고허촌(高墟村) 이다.[18] 진시황(秦始皇)의 장성이 끝났다는 양평 (襄平) 이다.[19] 연왕 (燕王)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을 토벌한 사마의 (司馬懿, 179년 ~ 251년)가 양평성에서 귀중품을 가져다 조위(曹魏)왕실에 바쳤다.[20]
중국문헌에 이렇게 시대와 장소 동기가 뚜렷하게 적혀 있는 천진항 일대의 사건을 한반도 동북 해안이라고 한다. 계회적으로 글자 작란을 하여 남의 영토를 빼았아 갔다. 같은 현상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끝
[1]. 三國志 東夷傳: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不得通於諸夏。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
[2]. 史記 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東至滄海之郡,人徒之費擬於南夷。
[3]. 三國志 韓傳: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朝鮮與燕界於浿水。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4]. 史記 項羽本紀:徇齊至北海,多所殘滅。齊人相聚而叛之,鑿山通道千餘里
封狼居胥山,禪於姑衍,登臨翰海. 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
[5]. 史記 封狼居胥山,禪於姑衍,登臨翰海. 驃騎封於狼居胥山,廣韻:作濊,濊貊,夫餘國名。東明因都王夫餘之地.又姓晉有餘頠又漢複姓三氏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6]. Mosol Don S 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Mystery of
the Five Kings of Wei. (Xlibris. 2018.) P 87. Changhai & Gongson clan in Liaodong.
[7]. 史記 留侯世家: 留侯張良者,其先韓人也。大父開地,相韓昭侯、襄哀王。良嘗學禮淮陽。東見倉海君。得力士,為鐵椎重百二十斤。秦皇帝東游,良與客狙擊秦皇帝博浪沙中,誤中副車。秦皇帝大怒,大索天下,求賊甚急,良乃更名姓,亡匿下邳。
[8].春秋繁露 故受命而海內順之,猶眾星之共北辰,流水之宗滄海也。
[9]. 隋書: 初平東夏,人情未一,叢臺之北,易水之南,西距井陘,東至滄海,比數千里,舉袂如帷。 護兒率樓船,指滄海,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與高麗相遇。進擊,大破之,乘勝直造城下,破其郛郭.通典 漕運:別以舟師濟滄海,舳艫數百里,並載軍糧,。
[10]. 呂氏春秋: 非濱之東,夷穢之鄉,大解、其、鹿野、搖山、揚島、大人之居,多無君
[11]. 太平御覽 夫餘,《後漢書》曰:夫餘國在玄菟北千里,本獩地也。初,北夷橐離國王出行,豕以口氣噓之,不死,復徙於馬欄,馬亦如之。名曰東明。東明長而善射。
[12]. Mosol Don S 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Mystery of
the Five Kings of Wei. (Xlibris. 2018.): P 147.Seafarers and Seafaring in the NEA.
[13]. 三國志 韓傳: 魏略曰: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
[14]. 史記平津侯主父列傳: 太史公曰:公孫弘行義雖修,然亦遇時。漢興八十餘年矣,弘為舉首. 太皇太后詔大司徒大司空.弘子度嗣爵,后為山陽太守,坐法失侯。班固稱曰:公孫弘。漢之得人,於茲為盛。儒雅則公孫弘、董仲舒、兒寬,篤行則石建、石慶,質直則汲黯、卜式,推賢則韓安國、將帥則衛青、霍去病,受遺則霍光、金日磾。其餘不可勝紀。
[15]. Mosol Don S 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Mystery of
the Five Kings of Wei. (Xlibris. 2018.): P 135. Fallacy of Han Commandries.
[16]. 三國志 魏書三十 鮮卑傳: 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
後漢書:烏桓鮮卑列傳: 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
[17]. 漢書 天文志:元封中,星孛于河戍。占曰:「南戍為越門,北戍為胡門。」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18].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 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 是為辰韓六部。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北溟人耕田,得濊王印,獻之
[19].史記匈奴列傳: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遼西、遼東郡以拒胡. 《史記·高祖功臣侯表》襄平。《索隱曰》屬臨淮。
[20].晉書: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